창세기 26:1-25
아브라함을 성경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믿음이야 하면 부활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부활의 믿음을 가졌습니다. 자신이 죽은 후에 다시 살 것을 믿었습니다. 창세기 22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했을 때에 그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이삭에게 번제로 사용할 나무를 지우고 불붙일 햇불을 가지고 산을 오르면서 산 기슭에 남겨둔 하인들에게 아들 이삭과 함께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산에 올라가서 아비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잡아 묶고 칼을 들어 이삭을 죽이기 위해 내리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급하게 두번이나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않았으니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겠다고 했습니다. 이 장면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보여준 최상의 순종이요 믿음이었습니다. 이 행위는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린 사건입니다.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하찮은 인간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보여준 믿음의 최고의 절정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최상의 믿음이요 순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최상의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장면에서 노쳐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삭의 믿음과 순종이었습니다. 이삭 역시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 못지 않은 믿음과 순종을 보여 주었습니다. 만약 이삭이 아버지를 신뢰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아버지를 밀치고 도망을 쳤다면 아무리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고 쉽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삭을 바치는 일은 아브라함 한 사람의 순종이나 믿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의 마음이 일치하고 믿음과 순종이 일치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의 인정을 받았다면 이삭 역시 아버지와 똑같은 인정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22장 본문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직접 축복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에 창세기 22:17, 18에,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레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여기 ‘네 씨’는 직접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네 씨’ 속에 이삭도 포함됩니다. 에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셨음으로 하늘과 땅의 권세를 얻으셨던 것고 같이 이삭 역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레와 같이 그 자손이 많으리라 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영적 후손들이 많은 것은 그 아들 이삭도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 안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2장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하나님을 깜짝 놀라에 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기 위해 칼을 들어 내려칠 때에 하나님이 놀라서 두번이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불러 세웠던 것입니다. 이삭 역시도 하나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자기를 죽기까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그 목숨을 내어맡겼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6장에 보면 이삭의 삶이 형통한 것을 봅니다. 창세기 26장에 보면 이삭이 살고 있던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이삭은 애급으로 가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애급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그 땅에 머물면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고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아마도 이삭이 애급에 가까운 그랄지방까지 내려 왔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셨던 것 같습니다. 이삭은 그곳 그랄 지방에 머물렀습니다.
1) 하나님께서 이삭의 생애에 간섭하시고 축복하시는 장면이 창세기 26장입니다. 애급을 향한 걸음을 멈추고 멈춘 얼마간의 기간 동안에 그 땅 그랄 땅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그랄 사람들 사이에 이삭의 아네가 너무나 아름답다고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사건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내 사라를 애급의 바로 왕에게 내어주는 위기까지 당하였지만 이삭의 경우는 그랄왕 아비멜렉이 이삭과 리브가의 관계가 오빠와 누이의 관계가 아니고 부부지간이란 사실을 스스로 발견하고 아비멜렉 자신이 온 백성들에게 이삭과 리브가를 건더리지 말라고 엄명을 합니다.
2) 그런데 이삭이 그랄 지역에 살면서 농사를 지었는데 한해 농사에 백배의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이삭은 농삿군이 아닙니다. 그는 목축을 하는 자입니다. 양떼를 몰고 이리저리 다니는 사람입니다. 농사에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는데도 농사를 지었더니 백배의 소득을 얻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심으로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불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했다고 했습니다.
3)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 마다 우물을 팠습니다. 가나안 땅은 척박한 땅입니다. 물이 많지 않습니다. 물이 귀한 지역입니다. 아무 곳에나 우물을 판다고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물이 필요한 곳 마다 땅을 파면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물이 귀한 곳이기 때문에 우물을 파면 우물을 판 주인이 그 우물을 중심으로 해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우물은 그 주변 사람들에게 공유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이 죽자, 죽은 사람은 소유할 수가 없으므로 그랄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우물들을 다 메워버렸습니다.
4) 그런데 그 아들 이삭은 가는 곳마다 아버지가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팝니다. 그러면 그랄 사람들이 와서 그 우물에 대해 시비를 겁니다. 그러면 이삭은 그 우물을 양보하고 또 다른 곳으로 가서 우물을 팝니다. 물이 없으면 죽습니다. 우물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울 때문에 싸우고 죽이고 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우물을 이삭은 아무 말 없이 양보하고 다른 곳에 가서 또 우물을 파면 우물이 나옵니다. 그러면 또 그랄 사람들이 와서 시비흘 합니다. 그러면 이삭은 그 우물을 내어주고 또 다른 곳에 가서 우물을 파면 물이 나옵니다. 세번째 다를 곳으로 옮겨 가서 우물을 팠는데 이제 그들이 시비를 걸지 않아 그곳을 로호봇이라 칭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삭은 삶에 대한 여유와 자신감이 넘칩니다. 사람들고 다투고 아웅다웅하지 않아도 넉넉하게 삶니다.
창세기 26:24에 이삭이 브엘세바로 옮겨 갔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했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리라 했습니다. 아마도 가는 곳 마다 주변 사람들이 몰려와서 시비를 걸었기에 이삭이 마음으로 두려움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니 두려워말라 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살펴 볼 때에 이삭의 삶은 형통함을 봅니다. 가는 곳마다 형통하고 하는 것 마다 잘됩니다. 하나님은 한 번의 죽기까지 순종하는 믿음을 내 보이시면 하나님께서 너무나 감동하심을 봅니다. 그 때부터 그 사람은 형통합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을 놀라게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을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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