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마리아를 선택하셨는가? 누가복음 1:26-38

하나님은 왜 마리아를 선택하셨는가? 누가복음 1:26-38

 

(우리는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거짓된 마리아 교리인 마리아 승천설, 마리아 중보설,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이므로 마리아도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삼위일체가 아닌 사위일체 하나님 등등으로 인해 마리아에 대해 언급을 자제하여 왔는데 성경이 보여 주는 마리아를 대하면서 참으로 귀하신 분이시다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수 많은 여인 가운데 뽑은 한 사람이시니 얼마나 훌륭한 여인이겠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왜 마리아를 선택하셨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된 동기

하나님은 왜 마리아를 선택하셨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된 동기를 말하자면 창세기 3:15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창세기 3:15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먹지 말라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은 후에 인간을 구원하려 오실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첫 언약입니다. 그 때 이후로 모든 인류는 인간으로 오실 메시야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역사 속으로 들어오실 통로가 필요했습니다. 창세기3:15에서는 여자의 후손이라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누가될 것인가? 누가 그 통로가 될 것인가? 하나님을 몸에 담을 여자가 누구인가?

하나님은 그 여인을 찾고 있었습니다. 디모데전서 2:15에, 비록 여인이 먼저 죄를 지었지만 메시야를 낳는 축복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2: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또 갈라디아 4:4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하셨는데,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모든 상황을 점검하고 계셨습니다. 이 ‘때가 차매’란 말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실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하실 그 때를 조성하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그 때는 정치적으로 로마가 주변나라들을 붙들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팍스 로마나’라 해서 로마가 세상에 전쟁이 없는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조용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세상이 어지럽고 번거로우면 안됩니다.

그리고 로마시대를 두고 ‘모든 길은 로마로’라 했습니다. 이 말은 로마가 정복지를 다스리기 위해 길을 딲았습니다. 그 길로 복음이 신속히 모든 지역에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이 길은 복음전도자들이 다니는 길이었고 그리고 그 길로 복음서와 서신서의 전달이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언어적으로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요즘은 영어가 세계 통용어 이듯이 그 당시는 헬라어가 세계 공통어였기에 신약성경도 헬라어로 집필되었습니다. 언어가 다르면 복음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완벽한 준비를 갖추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것들 보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담을 인간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은 온 세상을 두루 살피고 있었습니다. 역대하16:9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3:15을 아는 구약시대의 모든 여자들이 사모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를 자신의 몸에 담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에 동참한 여인들이 마태복음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었습니다. 시아버지 유다에게서 아들을 낳은 다말과 모압 여인 룻과 가나안 여인 기생 라합과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주자가 마리아였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나사렛 동네의 한 소녀에게 집중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마리아에게 보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많아야 16세 되는 어린 유대인 시골 처녀에게 나타났습니다. 천사가 이 소녀에게 알리기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의 어머니(눅1:35)가 될 것이라 했습니다. 마리아는 놀래서 왜 이런 인사를 자기에게 하는지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처녀요 남자를 알지 못하며, 요셉과 결혼하기로 정혼한 사이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을 것이라 했습니다. 마리아는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든지 간에 요셉이 자기 정혼녀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한 신중한 문제에 당면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에게 성령에 의해 임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했을 때에 요셉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실제로는 돌로 죽임을 당한 여인들은 많지는 않지만, 그들의 모든 인생은 수치 속에 살 것이며 그 자녀들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이고, 이 모범적인 젊은 여인의 관심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행하라고 하신 일들을 어떻게 하면 잘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1;31에,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했습니다. 그 아이가 인간 여자에게서 낳으니 완전한 사람이요, 또한 그 아이가 하나님에의해 태어났으니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는 그의 수태에서부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요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우리는 종종 동정녀 탄생교리에 매달립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정상적인 인간 경험으로는 이런 일을 볼 수 없습니다. 동정녀탄생의 기적은 동정녀탄생 보다 더 크고 더 심오한 성육신의 신비에 기초를 둡니다. 하나님께서 아기로 태어나서 우리의 지구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마리아의 자궁에 이식된 태아로서 가장 기본적이요 단순한 인간형태로 이 세상에 들어오시기까지 낮아지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동정녀탄생의 기적은 성육신의 신비에 기초합니다. 처녀가 어떻게 임신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성육신에 비하면 거의 하찮은 것입니다.  큰 기적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신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실 때의 일은 창세기 1:1,2에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신이 물위에 운행하실 때에 하신 것과 맞먹는 어떤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한 어린 소녀에게 임신시키실 때에 하신 일은 천지창조와 맞먹는 큰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인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택하신 이유는 마리아의 수용성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례없는 어떤 새로운 창조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십니다. 이런 거대한 일을 수행하시려는 일에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하시겠습니까?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그리고 성령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위해 어떤 사람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자질을 가진 사람을 원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마리아를 택하셨습니까?

마리아는 명확히 수용적인 사람입니다. 천사가 나타나거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무서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마리아를 당황하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내용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사가랴 제사장과 같지 않았습니다. 사가랴는 자기가 보고 있는 것에 굉장히 두려워했습니다. 누가복음 1:11-12에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사가랴가 보고 무서워 놀라워하니’했습니다. 누가복음 1:29에,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며’했는데 여기의 NIV 성경은 마리아가 놀랐다는 말은 ‘wondered’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사가랴의 경우는 ‘was startled’와 ‘was gripped with fear’로 표현했습니다. 이 두 문장을 비교할 때에 마리아는 천사가 나타났을 때에 그의 존재에 대해 놀라지 않았지만 그가 전하는 말에 놀랐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받아드렸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도록 마음을 열어 놓고 있는 자세였습니다. 마리아는 그의 젊은 몸에 하나님의 아들을 수용할 마음을 열어 놓았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수용할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행해야 할 사항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는 자세입니다. 동정녀 탄생의 교리는 예수님이 땅으로부터 나신 것이 아니고 위 하늘로부터 오신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고 또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할 때에 거기에 잠자코 서있지만 마시고 빨리 이루어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습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어떤 일을 행하시기를 원하실 때에, 너는 어떤 일을 행하려고 하지 말고 거기 가만이 서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삶 속에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도록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삶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받아드릴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령님은 바람이 임의로 불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성령의 바람이 불 때에 그 바람을 최고로 받도록 우리의 돛대를 활짝 넓게 펼치는 일입니다.

나다니엘 호돈이 행복에 대해서 말하기를, 행복은 나비와 같다고 했습니다. 내가 나비를 잡으려고 하면 나비는 항상 달아나지만, 당신이 조용히 앉아 있으면 나비가 당신 어깨에 내려 앉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끌어드릴려고 하면 잡히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오실 때에 우리는 거져 모셔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수용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첫째로 우리가 수용적인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수용성이란 것도 우리가 그렇게 되겠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삶에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주시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지 아닌지 모르겠거든 하나님께 진정으로 원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핵심적인 것은 성령님의 은사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양질의 수용성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 만드셔야만 할 어떤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수용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방해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너무나 시간에 얽매이고 바빠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만날 틈이 없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너무나 계획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시간에 얽매이고 계획적인 분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의 전 인생 삶이 너무 계획에 따라 움직인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까지는 너무나 오래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일예배에만 제한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조건이나 시간에 당신을 만날 수가 없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전혀 만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생활에 실천적으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 이웃들의 필요를 채워줄 때에 하나님을 만난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5:31-46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말씀하시기를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이 예수님께 하는 것이요,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주님께 그렇게 하는 것이요, 감옥에 갖힌 자를 찾아가 주는 것이 주님을 만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이런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시간을 쪼개야 하고, 우리의 스케줄을 중단시켜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만나는 조건이 우리 이웃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주님을 만나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시간, 우리의 조건, 우리의 방법대로 주님을 만나려고 하기위해 주님의 조건대로 하지 않으면 평생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 이웃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그들을 영접할 시간이 없으면, 우리는 주님을 만날 시간을 가질 수 없습니다. 불쌍한 아이나 외로운 사람들이 당신의 스케줄을 방해할 수 없다면  하나님도 당신을 만나려 당신의 시간이나 스케줄을 방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번째로 수용적인 사람은 기대하는 마음자세를 갖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알아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언제 행할지 조종할 수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기대하는 가운데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즐겨 사용하시는 표현 중에 하나는 귀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눈을 크게 뜨고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려 올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실 것에 대한 기대를 해야 합니다.

넷째로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은 마리아의 겸손함입니다.

누가복음 1:28에,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하니’했습니다. 이 말이 마리아를 당황케 했습니다. 이 말은 마리아를 칭송하는 말입니다. 왜 마리아가 이런 말을 들어야 했습니까? 처녀로서 그녀의 평판과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위태로울지도 모르는데, 아이를 임신할 것이라는 말에 오직 말하기를, ‘주의 계집종이오니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했습니다. 마리아로서는 하나님께서 그녀를 통해서 그리고 그녀 안에서 행하시고자하는 일은 모든 것이 직통적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와 낮은 자와 함께 거하십니다.

시편 138:6에, ‘여호와께서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하감하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나이다;했습니다.

이사야 57:15에,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했습니다.

중세 화가들이 색유리 창문 안에 마리아를 표현할 때는 색유리로 하지 않고 색을 넣지 않은 투명한 유리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그림이 있는 유리만 색이 없는 유일한 유리입니다. 그외 모든 유리들은 색깔이 있어 태양빛을 그들 자신들의 색깔과 디자인을 통하여 빛을 여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유리는 투명해서 태양광선이 그대로 통과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유리는 태양광선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일만 앞세우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앞세우는 일을 중단시키는 수단으로서 어머니 만큼 더 좋은 예는 없을 것입니다. 엄마가 임신을 하면 엄마의 전체 몸이 오직 아기출산에 필요하도록  자기 몸을 조절합니다. 임신의 순간부터 엄마의 몸은 엄마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생명이 이와 같아야 하겠습니다.

다섯째로 하나님이 마리아를 택하신 이유는 마리아는 종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38에서,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했습니다. 이제부터 마리의 몸과 마리아의 평판과 마리아의 미래는 마리의 것이 아닙니다.

시편 123편에,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비록 마리아는 전에 이런 것에 대해 전혀 계획을 세운 것이 아니지만, 그녀는 하나님의 아들을 그녀의 몸에 임신케 하는 두려운 업무를 하나님께로부터 수용합니다. 그리고 순종적으로 그것을 수행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생애에 하나님의 생명을 수용해야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순종해야 하며, 심지어 가장 불행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다.

Everett Koop라는 한 미국 의사가 어떤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썼습니다. 그는 아주 심한 장애를 가진 아이의 출산을 도왔고 또 그 아이가 출생했을 때에 목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그 의사가 아이의 엄마에게 묻기를 당신에게 가장 힘들었던 일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에 그 엄마의 대답이, 장해를 교정하기 위해 37번 교정수술을 하게 될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들 폴을 가졌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엄마에게 묻기를 그 아이로 인해 당신의 생애에 가장 좋았던 일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었을 때에 대답이, 우리 아들 폴이 37번이나 교정수술을 하게 되도록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을 때라고 대답했습니다.

쿠프 의사가 설명하기를 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괴로웠지만 그러나 그 경험을 통해서 그들의 가족애가 엄청나게 성숙했고, 그들 가족 모두 주목할 만한 영적 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폴은 55번째인 마지막 수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너무나 괴로운 역경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압도적인 긍정적 경험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생명의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종으로서 하나님이신 그의 주인의 손으로부터 상상치도 않았던 업무를 부여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치도 못한 최악의 일들이 나중에는 우리에게 일어난 가장 좋은 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할 일을 왜 말씀하지 않으시나 하고 초조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뜻을 알기를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더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수행해야할 일을 보여 주실 때에 그 일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마리아에게 있는 종의 자세에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하나님의 음성을듣게 되도록하는 것이 우리 속에 있는 종의 자세입니다.

 

인간 역사의 모든 과정은 마리아에의한 선택과 결심과 응답에 의해 결정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글을 읽었는데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대면했을 때의 일을 묘사했습니다. 가브리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마리아에게 줄 메세지를 받아서 마리아에게 전달하면서 말하기를 마리아야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천사 자신이 떨고 있었음을 마리아가 눈치채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라 했습니다. 왜 가브리엘이 떨었느냐 하면 모든 피조물의 미래가 이 소녀의 응답에 매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인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했습니다.

 

누가복음 15:10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 올 때에 천국의 천사들이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볼 때에 천국에 먼저 간 성도들이 우리 이땅에 있는 성도들을 면밀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12:1에, 천국에 구름같이 둘러싼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위해 응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천국에 거주하고 있는 자들의 감시 아래에서 경주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백성들이 우리의 이 생애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하는 가를 보기 위해 발꿈치를 치켜들고 서 있습니다. 마리아에게 주어진 응답이 온 인류의 미래가 매달린 대답이었지만 이 세상의 모든 미래가 우리의 응답에 매여있지는 않지만 누가 압니까?  우리 자신의 미래가 매달려 있을지 모릅니다. 당신이 감히 하나님께 말할 수 있는 은혜를 갖게 된다면,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응답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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