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눈길이 머무는 곳

 

나는 목회를 시작하면서 요나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부성애를 깨달았습니다. 요나의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나와 하나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왕도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 메시지 내용은 ‘너희들이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으면 40일이 되면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였습니다. 요나에게 있어 앗수르는 어떤 나라입니까? 앗수르는 요나의 조국 이스라엘 나라를 말할 수 없이 괴롭힌 나라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앗수르나라에 망하지 않았습니까? 앗수르는 이스라엘에 철천지 원수 나라입니다.

그런데 요나의 입장에서 앗수르는 망해야 이스라엘이 사는데 자신이 앗수르에 가서 하나님의 메 세지를 전달하여 이들이 회개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자신의 조국은 앗수르에게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죽어도 그 일을 하기 싫어 하나님을 피해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서 배 밑층에 숨었습니다. 그리고 잠이 들었습니다.

결국에 하나님께서 요나를 잡아 내어 물고기 뱃속에 집어 넣으시고 회개시킨 후에 니느웨로 보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호되게 맞은 후에 할 수 없이 니느웨로 가서 3일 길의 니느웨성을 하룻만에 적당히 외치고 니느웨 성이 내려다 보이는 산에 올라가 니느웨가 무너지는 것을 보기 위해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기대와는 달리 니느웨가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요나는 적당히 외치고 산에 올라가 니느웨가 무너지는 것을 보려고 했기에 니느웨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알지 못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불성실한 메세지를 받고는 왕으로부터 짐승에게 이르기까지 금식하며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40일이 지나도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으니까 신경질을 부립니다. 요나서 4:1-4에,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 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 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엄청나게 화를 냅니다. 차라리 죽어버리고 쉽다고 합니다. 이장면에서 요나는 마치 망나니 아들과 같고 하나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운 아버지 사이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들 요나가 아버지의 명령을 제 마음에들지 않는다고 도망을 치고 억지로 잡아와 그 일을 시키는 아버지 때문에 할 수 없이 하기는 했지만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보고 아버지께 화를 내는 아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아들을 전혀 꾸중하지 않으시고 아들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시는 모습을 봅니다.

요나는 성읍이 어떻게 되는가 계속 주시하기 위해 초막을 짓고 계속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가 만든 초막위로 박넝쿨이 생겨나게해서  초막을 덮으니 어찌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제발 니느웨야 무너지라 용을 쓰면서 그 이튿날 새벽부터 니느웨를 내려다 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짓궂게도 벌레를 보내어 박넝쿨을 깕아 먹게하고 뜨거운 동풍을 불게 하니  박넝쿨이 시드니 더워서 죽을 지경입니다. 신경질이 나서 다시 하나님께 화를 냅니다.

요나서 4:8에,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또  9절에, ‘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요나는 하나님께 대들기도 하고 성도 내고 두번이나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자기가 옳다고 우기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놀랬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이렇게 해도 되는 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화내시거나 벌을 내리시지 않고 요나에게 짓궂게 장난도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재미 있는 분이시구나, 짓궂게 장난도 하시고 망나니 아들의 신경질내는 것도 받아 주시고 못된 놈이라 꾸중도 하지 않으시면서 유머스럽게 요나을 깨우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부드럽고 인자하시고 유머스러운 아버지의 부성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목사가 된 것을 기쁘게 여겼으며 신나게 목회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다니던  충정로 장로 교회의 대학부 회장이었을 때에 어느날 우리 대학부 회원이 다른 교회 다니는 대학생 친구를 우리 교회 대학부에 대려 왔습니다. 그 친구가 내게 와서 말하기를 ‘형, 구원받았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말을 들었을 때에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릅니다. ‘야, 니가 나를 누구로 알고 감히 그 따위 질문을 하느냐’ 하고 발길질하여 쫓아 버렸습니다(속으로 생각하기를, 나는 4대째 믿는 집안이요, 성가대 회원, 유년주일학교 교사요 대학부 회장인 나에게 감히 구원받았냐고 묻다니…)

그런 후에 내 마음 속에 ‘너 구원받았느냐?’ 하는 질문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길을 가도 너 구원 받았느냐, 밥을 먹을 때도 너 구원받았느냐, 책을 볼 때도, 강의를 들을 때도 잠을 자려고 누워도 너 구원받았느냐고 말합니다. 그 때부터 나의 구도의 깊고 긴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살아 계시느냐, 천당과 지옥이 있느냐, 나는 누구인가하고 궁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철학 책도 읽고 심리학 책도 읽고 강의도 듣고 합니다. 아무런 결말을 얻지 못하고 심한 노이로제에 걸려 죽겠다고 하고서 높은 산 가파른 바위로 올라가 떨어져 죽으려고 했는데 믿을 내려다 보니 현기증이 나고 죽을 것 같아서 내려 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열심히 교회 다녔고 온갖 교회 봉사를 열심히 했는데 구원이란 말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교회에서 왜 구원에 대해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듣지 못한 것이지요.  그 때까지 누구에게도 구원받았느냐고 도전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성경을 읽은 적이 없고 크게 도전 받은 신앙동기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깨달은 사실은 내가 예배에 참석하여 말씀을 듣는데 한 마디도 귀에 들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서 말씀을 들으려고 해도 한 마디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노력하면 할 수록 내 머리 속은 온갖 상상, 공상으로 충만했습니다.  얼마나 노이로제가 심했는가 하면 밤에 잠을 자려고 하는데 바람에 지붕이 날아 갈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공부도 전혀 머리에 들어 오지 않았습니다. 2학년 2학기를 겨우 마치고 군에 입대 하였습니다.

군에 입대 하여 신경을 쓰지 않았더니 노이로제가 괜찮아졌습니다. 군 교회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군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 귀를 열어 주셔서 말씀을 듣게 하옵소서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말씀하시기를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하신 말씀이 이제 생각이 납니다. 사람들이 귀가 있다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듣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군대생활하면서 교회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주일 아침, 저녁, 수요저녁에 다녔습니다. 졸병일 때는 전임자들에게 인솔되어 갔고, 병장이 되어서는 졸병들을 인솔해 갔습니다. 그 당시는 군에 TV가 없었기에 내무반 고참들이 아랫 병사들을 굉장히 괴롭혔습니다. 관물 정리, 내무반 청소, 아래 병사들을 소집해서 기압을 주고 때리고 돌리고 했습니다. 교인들은 교회 가는 날은 그런 시간들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날, 예배를 드리고 돌아 오는데 중대원들이 연병장에 집합해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살벌했습니다. 한 고참이 나를 따로 불러 한 방 안으로 밀어 넣고서는 준비된 장비들로 나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M1총 나무 부분은 떼 내고 총구로 나의 횡경막을 쑤셨습니다. 억하고 소리치고 자빠졌습니다. 그 다음 날 월요일부터 일주일간 유격훈련이 있게 되는데 뼈가 뿌르졌는지 고개를 숙일 수 없었습니다. 통증이 심한 채로 일주일 유격훈련을 했는데 마지막 코스가 높은 산에서 도르레 줄을 타고 강으로 뛰어 내리는 하강훈련입니다. 이 훈련코스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들도 자주 있었습니다. 그것까지 다 마쳤습니다.

그 고참에게 왜 때리느냐고 물었더니 다른 사람들은 내무반 생활을 하는데 너희 신자들은 그것을 피하려고 교회 핑계 대고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었으면 죽었지 교회 가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을 했더니 그 고참이 꿈질하면서 그 다음부터는 교회 간다고 간섭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교회 따라 다니던 병사들 중에 요령 피우는 자들을 소집해서 교회로 보내곤 했습니다. 내가 제대하기 얼마 전에 내무반에 TV가 생기자 고참들이 졸병들을 들 괴롭혔는데 그러자 교회 신자들이 교회 가지 않고 머무적 거리면 교회로 쫓아 보내곤 했습니다. 교회는 열심히 다녔지만 여전이 말씀은 귀에 들리지 않았고 하나님께 말씀 듣는 귀를 열어 달라고 계속 기도했지만 군 3년 6개월 동안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제대할 때가 되어 마지막 휴가를 나가서 전에 다니던 교회에 가서 목사님께 제대하면 다시 교회로 복귀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부대로 돌아왔습니다. 군에서 제대하고서는 그 교회에 다시 다니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내 영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부산에서 큰 교회 전도사로 일하시던 큰 고모님이 서울에 개척하시기 위해 올라오신 경향교회 석 원태 목사님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 고모님께 가서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앙상담을 했습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고 했더니, 고모님 말씀이 교회라고 다 같은 교회가 아니고 목사라고 다 같은 목사가 아니니까, 신앙은 네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했습니다. 고모님 자신은 큰 교회에서 사례비도 많이 받고 일했지만 말씀을 따라왔기에 사례비도 받지 않고 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고모님이 섬기는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들어 보고 역시 말씀이 안 들리면 네가 가고 싶은 교회로 찾아 가라고 했습니다. 경향교회에 첫 주일 예배에 참석했는데 말씀이 내 귀에 쏙쏙 들어 왔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제야 내 기도 응답이 이루어졌다고 기뻐하는데 마음 한 켠에서 음성이 들 리기를  ‘야, 너, 너무 좋아하지 말라, 네가 전에도 순간적으로 체험했다가 사라진 그런 것들 중에 하나일 뿐이야’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교회에서 부흥회를 할 때에 부흥강사님들이 재미 있게 말씀을 전하면 귀에 잘들어 오고 또 구원받은 사람 손들라 하면 성가대에 앉아 있었기에 눈치 봐서 손을 들곤 했던 그런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마음 다른 켠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그러면 한 달 동안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주일 대 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 등 한 번이라도 말씀 시간에 말씀이 잘들리는지 아닌지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한달 동안 시험을 했는데 한번도 빠짐없이 말씀이 계속 잘 들리면서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고 그 때부터 신앙생활에 활기가 넘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무엇을 달라고 기도할 때에 주실 때마다  쉽게 주시지 않습니다. 매달리고 추구하고 떼를 써야만 겨우 주십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실험하고 이론화해서 은사나 주님 영접을 하고 구원의 확신을 시키는 것을 체계화하고 성도들에게 가르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목회에 실천하게 됩니다.

내가 목회를 시작하면서 결심하기를 우리 교회에 오는 자들은 결코 나와 같은 날날이 신자인 체로 오래 남겨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나는 택사스 주 엘파소 시에서 13년간 목회했습니다. 이 곳은 한국의 논산 훈련소와 같은 곳입니다. 우리 교회는 미군과 결혼한 한국 부인들 중심의 교회 였습니다. 미군은 한 기지에서 3년 있으면 다른 곳으로 옮겨 갑니다. 우리 교회에 들어온 교인들은 떠나기 한달 전, 6개월 전, 1년, 2년, 3년이 다되어 떠날 무렵에 교회에 들어 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출석한 그 다음 주중에 그 성도님들 집에 방문하여 주로 3시간에 걸쳐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의 성경의 맥을 가르칩니다.

대개 성도님들은 성경에 대해 잘 모릅니다. 성경을 다 읽어 보지도 않지만 교회에서는 계속 말씀을 단편적으로만 듣습니다.  성경전체를 연결하는 맥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성경의 맥을 연결해 주면 쉽게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고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창세기와 재림이야기, 아담과 하와 이야기, 죄 문제,  하나님이 어떤 분 이신가, 예수님, 성령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구원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는지,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성도들이 성경에 대해서 확실이 이해하고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영접하여 확신 있는 신앙생활과 십일조 생활을 하다가  성령세례도 받고 세계 전역으로 전출되어 갔습니다. 엘파소에서의 제 목회는 속전속결이었습니다. 성도들이 언제 떠날지 모르기에 속히 주님 영접을 시켜 떠나 보내는 목회였습니다. 어떤 해는 20가족이 떠났습니다. 전도를 게을리하다간 교회에 성도들이 텅 비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때에는 교회당에서의 공식예배가 주일 낮 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6일간 새벽예배, 구역예배가 6번 해서  16번에다가 수시로 심방해서 성도들을 주님 영접시켜 떠나 보냈습니다. 목요일은 아침부터 저녁 8시까지 구역예배가 세번 있었는데 마지막 예배 때는 피곤해서 말씀을 전하다가 졸면서 말씀을 전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다른 성도들도 다 졸고 있어 내가 졸면서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더군요.  화이트 샌드(한 시간 반 거리)부대 구역과  알라모 고르도(3시간 거리)까지  정규 심방을 갔습니다.  매번 예배 마다 예배  1시간 전에 자동차가 없는 분들을 모시기 위해 가장 먼 곳에 사시는 분들부터 시작해서 차례로 차에 태워 모십니다.  주일예배에도 예배 1시간 전에 출발해서 성도님들을 모시려 갑니다.  처음에는 그 일을 성도들에게 부탁을 했는데 봉사하는 성도와 차를 사용 하시는 분들 사이에 불화가 생겨 두사람이 모두 시험을 받아 교회에 안 나옵니다. 그래서 차동차 핍업까지 목사가  나서야 했습니다.

그 때에는 떠나가는 가난한 군인 가족들이요 가정경제를 미군남편들이 가졌기에  아내된 여성도들은 가난해서 교회에 십일조도, 헌금도 잘하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생활비로 주는 것에서 십일조, 주일헌금, 감사헌금을 했습니다.  그래도 교회가 무슨 일을 한다 하면 돈을 내어 그  프로잭트를 완성했습니다.  교회가 가난했기에 목사 사례비를 거의 10년 동안 제대로 주지 못했습니다. 헌금이 들어오면 우선 교회당 모게지 내고, 사택 모게지 내고. 자동차 모게지내고  돈이 남으면 2백불, 3백불, 혹은 조금 여유가 있으면 6백불을 받았습니다.  교회 자동차 게스 값은  내가 넣고 교회에 청구해서 받는 형식이었는데  교회가 그것도  줄 수 없어 교회가 제게 빚을 졌었습니 다.  저의 가정경제는 사택비는 교회에서 나오고, 자동차 모게지도  교회에서 지불하니까 그리고 아이들도 어렸으므로 돈이 들지 않았기에 살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내 생각이고 아내는 고생이 많았습니다.

우리 동생부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한국의 동생부부가 모두 의사들입니다.  제수씨가 십년 간 매달 천 불씩 보내와서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 형제는 3남 1녀 입니다.  형, 누나, 나,  동생이었는 데 동생은 유복자였습니다. 제수씨는 아들이 신학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매달 천불씩 보내왔습니다.  주식에 투자하여 돈을 벌었다고 해서 십일조 만불을 보내 왔습니다. 우리 교회 교육관 지을  때도 오천불을 보내왔었고,’ 부활의 신비와 영광’ 책을 출판할 때도 출판비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작년에(2023년)는 우리 형제들 크루즈 선 여행을 주선하면서 나에게 8천불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는 사르밧의 과부를(열왕기상17:9) 붙여 주셨듯이 가난한 교회 목회하는 나에게는 천사 같은 제수씨를 보내주셨습니다.

 

Darren, Medline, Anabelle, Dante야,  역대하 16:9에서 하나님은 온 천하를 두루 살피시사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찾기 위해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신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위해 찾아내신 네 명의  사람들에게 그분의 눈길이 머문 것을 보게 되었답니다. 그 첫째는 시돈 지방의 사르밧 과부였고, 둘째는 기드온이었고, 셋째는 모세요, 넷째는 마리아 였습니다.

 

첫째로 사렙다 과부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로 하여금 이스라엘나라에 수년  동안 기근을 내릴 것이라고 선언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는 그 기근을 피해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어지내라고 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까마귀들을  통해서 떡과 고기를 공급받으며 그릿 시내의 물을 마시며 살게 했습니다. 이제 그릿 시내도 말랐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시돈 지방의 사르밧에 사는 과부에게로 가라. 내가 그로 너를 공궤하게 하리라 했습니다. 엘리야가 사르밧에 갔을 때에 그 여인이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그 여인에게 말하기를 자신에게 마실 물과 먹을 음식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이 선지자에게 말하기를 자기에게는 자신과 아들이 먹을 한끼 음식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이 음식을 먹은 후에는 자기들은 굶어 죽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때 선지자의 말이 네 말대로 하라,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 가져 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했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땅에 비가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다하지 않을 것이요 기름 통에 기름이 마르지 않으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르밧 과부의 경우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자신과 아들이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음식을 선지자가 먼저 자기에게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만약 그 처음 보는 나그네가 진짜 하나님의 선지자인지 가짜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선지자에게 먼저 음식을 갔다 바친 후에 자신들의 음식 몫이 줄어 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음식인데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여인은 선지자의 말을 듣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이라 믿고 실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종 엘리야 선지자를 공궤할 사람을 찾기 위해 온 천하를 두루 살피시사 이 사르밧 여인에게 하나님의 눈길이 멈춘 것입니다. 이 여인은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하고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을 믿었습니다 (열왕기상 17:1-16).

 

둘째 인물은 기드온입니다.

기드온 시대에 미디안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메뚜기 떼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식량을 약탈하고 양과 소와 나귀들을 남기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미디안에게서 구원할 인물을 찾고 있었습니다. 온 천하를 두루 살피시사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눈길이 고정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3백 명 군인들을 내주면서 미디안 군대 135,000명과 싸워 이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했습 니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나와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표징을 내게 베풀어 달라고 말했습니다. 기드온이 가져온 떡과 고기를 바위에 놓았더니 여호와께서 지팡이로 떡과 고기에 대매 반석에서 불이 나와 그것들을 살랐고 하나님은 사라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기도온이 다시 하나님께 양털 시험을 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양털 시험을 두번 한 후에 기드온은 자신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구원케 하실 하나님의 의도를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두렵습니다. 3백명으로 십 삼만 오천명과 싸워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이 마음으로 두려워하는 것을 아시고  기드온에게 밤에 미디안 진으로 잠입하게 해서 미디안 군인들 두 사람들이 잠자다가 깨어나 자기들의 꿈이야기를 하는 것을 기드온이 듣게 합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미디안 군대를 이긴다는 꿈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드온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무리 여러가지 표징으로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함께 하시고 이기게 해 주시겠다고 했지만 삼백명으로 십삼만 오천 명과 싸우려 나갈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그런데 기드온은 그 명령에 순종했고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두루 감찰하사 죽음을 각오한 기드온의 믿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 기도온에게 하나님의 눈길이 머무셨던 것입니다(사사기 6:1-7:25).

 

세번째 인물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그 당시 애굽왕궁에서 왕이 되는 서열 3번째 였습니다. 그는 애굽인이 아니고 노예민족인 히브리민족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40세에 히브리인과 애굽인이 싸우는 것을 보고 히브리인을 돕다가 애굽인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탄로나 권력 다툼에서 벗어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도망쳐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출애굽기 2:15을 보면서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가자마자 십보라와 결혼하게 되고 두 아들을 갖게 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출2: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 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했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 모세가 미디안 땅에 가자마자 우물 곁에 앉아 십보라를 만난 것 같이 보입니다.

우리는 성경 특히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읽을 때에 한 줄과 한 줄 사이 혹은 한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수천, 수백년, 수십년의 시간과 공간이 압축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출애굽기 2:15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가자마자  십보라를 만난 것이 아니고 40 년 동안 바로가 보낸 추적군들에게 피해 다닌 후에야 그녀를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그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애급으로 가서 바로를 만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데려 나오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네 번이나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모세는 애굽과 바로왕에 대해 트라우마를 가진 자입니다. 40년 동안 자기를 죽이려고 추적군들에 의해 추적되었고 일촉 즉발 죽을 수 있는 급박한 환경에서 40년을 지냈는데 그 애굽으로 돌라가라, 바로왕을 만나라고 했을 때에 이 명령을 받아 수행 할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이제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위해 출애굽기 4:20에서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이상합니다.  모세가 미디안에 도망해 간 즉시로 십보라와 결혼했으면 게르솜과 엘리에셀의 나이가 적어도 20-30세 이상이나 되었을 텐데 이 20-30대 청년들이 엄마와 함께 한 나귀에 타고간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또 의심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출4:24-25에 모세가 애굽으로 가는 도중에 숙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모세를 붙들자 십보라가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에 던지며 당신은 나의 피남편입니다 했습니다. 26절에 설명하기를 피남편이란 할례를 뜻한다는 것이라 했습니다. 아마도 모세가 아들에게 할례를 하려고 했을 때에 미디안 출신의 십보라가 반대를 해서 할례를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25절에 아들들이라 하지 않고 한 아들의 양피만 베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장성한 두 아들의 양피를 다 베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출4:15절과 24, 25절을 종합해 생각해 볼  때에 나귀에 이 세 사람이 탄 것은 십보라와 그의 품에 안겨 있는 2-4세 정도의 어린 게르솜과 둘째 엘리에셀은 엄마 뱃속에 있었기에 엄마와 두 아들들이 한 나귀에 탈 수 있었던 것입니다. 25절에서 그래서 게르솜의 양피만 베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살펴보면 모세가 40년 전에 결혼한 것이 아니고 40년이 지난 80세 정도에서 겨우  결혼해서 게르솜을 낳고 한 아들은 엄마의 뱃속에서 아빠와 함께 애굽으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라고 말씀하실 때에 출4:19에서 모세의 생명을 찾든 자들이 다 죽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모세가 우물가에서 십보라를 만난 때가 40년 동안 추적군들을 피해 다니다가 언젠가부터 추적군들이 없어진 것을 알고 마음에 여유가 생겨 사람들이 있는 우물가에 가 앉게 되고 그곳에서 십보라를 만나게 되고 결혼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바로가 보낸 추적군들을 피해 다녔으니 애굽과 바로왕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지 않았겠습니까? 아무리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바로가 죽었다고 하지만 애굽에는 다른 바로가 있고 그 바로를 상대해야 하는데 그 일을 세상에 몇명이나 감당하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일을 수행합니다.  모세는 자기의 목숨을 담보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은 온 천하를 두루 살펴 보시고 그 일에 적합한 한 사람 모세에게 그 눈길을 고정하셨던 것입니다.

 

네번째 사람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창3:15에서 약속하시기를 여자의 후손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인류의 죄의 속박에서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인류는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세상에 보내실 때가 차매 어린 메시야가 성인이 될 때가지 돌봐 주게 할 여인을 두루 찾으시다가 한 여인에게 눈을 고정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처녀 마리아에게 보내셔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을 것인데 그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했습니다. 그 당시에 처녀가 아이를 임신하면 돌로 쳐 죽임을 당합니 다.  그 때에 마리아가 대답하기를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목숨을 바칠 각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누가복음 1:30-38).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으리라 했습니다.

Darren, Medline, Anabelle, Dante도 하나님의 눈길이 머무는 사람들이 되기를 할아버지는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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