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때부터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떻게 나를 훈련시키셨는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나의 맥박은 46입니다. 이 정도면 보조심장을 달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24시간 심전도를 check 했는데 밤에 잠 잘 때는 32까지 내려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심장내과 선생님은 나의 심장근육이 튼튼 해서 pacemaker을 달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마라톤 선수나 프로 농구, 배구, 축구선수들의 맥박도 46정도라고 합니다. 나는 타고 날 때부터 그랬던 것 같습니다. 내 맥박이 너무 느리기에 어른들이 걱정을 해서 침도 맞게 하고 약도 먹이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맥박이 느리게 뛰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춥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어릴 때부터 너무 activity 했었습니다. 움직이면 쉽게 더워집니다. 그래서 체질적으로 움직여야 했던 것 같습니다.
어릴 때(5-6살)에 산으로 들로 강으로 좇아 다녔습니다. 혼자 다닐 때도 있고, 동네아이들과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지내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가기가 싫었습니다. 등교하는 첫 날인데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뻗대니까 할머니가 내 멱살을 잡고 신장로로 끌고 나갔습니다. 그 때에 많은 학생들이 등교하느라고 길을 가고 있었는데 너무 챙피해서 할머니 께 사정을 해서 멱살을 놓아 주면 학교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지만 학교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수업하다가 슬므시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학교를 빠져 나왔습니다. 책보는 이웃 집 친구에게 수업이 끝나면 가져와 달라고 부탁하고 강둑으로 나갔습니다. 내 고향은 합천입 니다. 합은 한자로 낄 협입니다. 천은 내천이고요. 합천이란 뜻은 강으로 둘러싸인 동네란 뜻입니 다. 그런데 동네 이름을 부를 때는 협이 아니고 합으로 발음해야 한답니다.
수업시간에 빠져나와 혼자서 여름에는 강물에서 미역도 감고 물고기도 잡고 겨울이면 논바닥의 얼음 위를 걷기도 하고 추우면 강둑의 말라붙은 풀들에 불을 붙여 젖은 양말과 바지를 말리곤 했습니다. 혼자서 지나는 것이 심심해서 동네아이들을 꼬셔서 같이 땡땡이를 쳤습니다. 나는 어릴 때에 가만이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세 살 이하 때의 이야기는 내가 알 수 없었는데 형이 제 아내에게 이야기해 주었다고 합니다. 제 아내가 한국에 방문을 했는데 두 조카들을 보지 못했기에 그들이 궁금했던가 봅니다. 머슴아 (남자 아이)가 어떻냐고 묻드랍니다. 아들이 굉장히 난하지 않느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하니까 그럴 수 밖에 없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어릴 때에 너무나 난해서 아침에 바지를 입혀 내보내면 저녁에 돌아 올 때에 치마를 입고 들어 온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바지가 찢어져 치마가 된 것입니다. 우리 집 옆에 변전소가 불이 났는데 불탄 장소에 가서 온갖 쇠꼬챙이들을 주어 몸에 주렁주렁 달고 들어와 누워 잘 때도 차고 잤다고 하는 이야기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지나다가 소학교 2학년 때에 병이 들었습니다. 내 자신은 병으로 인한 고통을 느끼지 못 했는데 어른들이 걱정을 했습니다. 늑막염, 기관지염 등. 그래서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부산에 있는 독일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에 외래환자로 꼬박 1년 동안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지겨운 학교생활도 하지 않게 되었고 땡땡이도 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땡땡이 수업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집에서 집안 식구들이 나를 심하게 대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너무 집이 싫어서 도망을 치고 싶었지만 도망을 쳐서 어떻게 살 수 없어서 하루 하루 꾹꾹 참고 지내야만 했었는데 병이 들어 집을 뛰쳐 나오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 이었는지 몰랐습니다.
나는 어릴 때에 집에서 두가지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가졌었습니다. 하나는 묵돌이, 다른 하나는 도둑놈이었습니다. 묵돌이란 별명은 좀 억울했습니다. 집안 사람들이나 친척들이 어처구니 없이 붙인 별명입니다. 전쟁 중에는 먹을 것이 부족한 때입니다. 우리 집은 멀리 피난 가지 않고 강 건너 산 기슭의 굴에서 온 식구가 숨어 살았습니다. 숨어 살다가 양식이 떨어지면 집에 숨겨두었던 양식을 밤에 몰래 가지고 오기위해 오고 가곤 했습니다. 그 일은 젊은 여인들이 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젊은 남자들은 인민군이 군대나 부역을 시키기 위해 잡아갔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이 강을 건너, 사선을 넘어 양식을 머리에 이고 돌아 오면 남자들이 나서서 무거운 짐들을 내려 주어야 할 텐데 입구에 가까우면 어김없이 기저기를 찬 녀석이 나와서 ‘작은 엄마, 동부(콩 종류)가져왔어’ 했답니다. 작은 엄마와 여인들은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양식을 가져왔는데 남자 들이 나서서 맞이하지 않고 기저기 찬 녀석이 먹을 것을 찾으니 그 화난 것을 배고 픈 기저기 찬 녀석에게 화풀이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붙인 별명이 ‘묵돌이’었습니다. 친척들이 나를 부를 때에 항상 ‘묵돌아’ 하고 불렀습니다. 나는 동네 아이들 앞에서 묵돌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어느 날 밖에서 동네 아이들 하고 놀고 있었는데 저녁이 되니 아이들이 하나씩 슬금슬금 없어지는 것입니다. 나 혼자 남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지 팥죽 쑤는 날이었습니다. 나는 집에 가 봤자 아무 도 없을 것이기에 우리 옆집에 정부미 빻는 부자 친척집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어머니가 그곳 에 있는가 해서 엄마 찾아 그 집을 찾아갔는데 안방으로 가려면 부엌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부엌 앞을 통과하는데 마침 친척 할머니가 팥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나를 보고 전에 항상 부르던 데로 무심코 ‘묵돌아 왔나, 팥죽 먹으라’ 고 하시는데 내가 하필 그 때에 팥죽 얻어먹으려 온 것 같아 창피해서 대꾸도 없이 돌아왔습니다.
그 할머니가 내 기분을 알아채고 우리 어머니와 친척들 앞에 그 이야기를 하게 됨으로 ‘준식에게 절대로 묵돌이라고 하지말자’라는 의견이 통과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집안 어른이 나를 부를 때에 묵돌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붙은 불명예를 벗겨낼 수 있었습니다. 에서는 팥죽 때문에 신세 망쳤지만 나는 팥죽 때문에 묵돌이란 불명예를 벗어 버릴 수 있었습니다.
두번째 불명예는 집에서 붙여준 것인데 도둑놈입니다. 이 별명은 내가 저지른 엄청난 사건으로 인해 붙여진 별명입니다. 어쩔 수 없이 마땅히 받아야할 벌이었습니다. 국민 학교(현재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 니다. 추석 때였습니다. 아침에 동네 친구들 하고 밖에서 놀고 있는데 상점에 울긋 불긋 온갖 요란한 추석 장난감들이 내 눈을 현란하게 했습니다. 친구들과 병정놀이를 하다가 불쑥 생각이 나기를 저 상점에 있는 칼, 창, 장 총, 권총 등등을 사서 아이들에게 무장을 시켜 놀면 정말 신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한 장면이 내 머리에 떠 올랐습니다. 대청마루에서 식구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있을 때에 이웃 아줌마가 우리 할머니께 빌린 돈을 갚으려 왔습니다. 할머니가 그 돈을 받아 장롱 속에 넣는 것이 내 눈에 무심코 보였는데 그것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즉시 집으로 가서 장롱 속의 그 보물을 끄집어 내어 동네 내 또래 친구들에게 중무장을 시켜 정신 없이 신나게 병정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점심 먹을 때가 되었습니다. 묵돌이가 점심을 먹으려 오지 않자 누나가 점심 먹으라고 연락하려 왔습니다. 나는 노느라 정신없었기에 점심 먹으라는 소리를 무시하고 아이들과 떠들며 놀았습니 다. 어느덧 저녁 때가 되었습니다. 저녁밥을 먹는데 묵돌이가 저녁밥상에 보이지 않기에 저녁 먹 으려 들어오라고 누나를 보냈습니다. 나는 그때까지 신나게 놀고 있어 듣는 둥 마는 둥 하기에 누나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돈을 사용할 데가 있어 장롱에 돈을 끄집어 내려고 하는데 돈이 없어졌습니다. 집안에서 야단이 낳습니다. 돈의 행방이 오리무중입니다.
그 때 누나의 뇌리에 섬광 같은 것이 번쩍하고 지나갔습니다. 묵돌이가 점심도 거르고 저녁밥도 거르면서 신나게 노는데, 온갖 요란한 것으로 장식을 하고 있는 아이들? 이 아이들에게 무슨 돈이 있었기에 그 가난한 동네아이들이 그런 장난감들을 사서 몸에 두를 수가 있었을까? 그 많은 장난감 들을 살 수 있는 돈이 누구에게서, 그 아이들에게 돈들이 어디서 생겼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장롱 속에 넣어둔 돈이 도망칠 리가 없는데 누나가 생각하기를 준식이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점심 먹으려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누나가 보니까 동네아이들이 온갖 장난감으로 몸에 두르고 있었습 니다. 그래서 식구들에게 내가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 호출되어 갔습니다. 쓰고 남은 그 돈은 어 떻게 했는냐고 초달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훔친 것이 아니고 우리 옆집 친구가 훔친 것이라 했습니 다. 우리 옆집은 동네에서 도둑 집안으로 지목되어 있었기에 둘러대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 아이 를 불러 세워 그 장난감들을 어떻게 샀는냐고 물었더니 준식이가 다 사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다시 심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직고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장난감을 사서 아이들과 놀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돈을 가져다가 사고 남은 돈은 담벼락 구멍에 넣었다고 해서 현장에 끌려가 남은 돈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집안식구들이 내게 도둑놈이란 너울을 씌 우고 협박을 합니다. 온갖 심부름을 시키고 반항의 끼가 있으면 도둑놈이 그것을 안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해서 도둑놈 소리 안 들으려고 열심히 굴종을 했습니다. 그 때부터 집에 있는 것이 지옥 과 같았습니다. 집에 있는 것이 싫었습니다. 도망을 치고 싶었는데 집을 떠나올 기회가 온 것입니 다. 그 때에 하나님이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어른들이 내가 중병에 걸렸다고 걱정했습니다. 나는 병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잘 때 진땀을 흘리고 어른들이 판단할 때에 심상치 않다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부산 고모집으로 보내 부산에 있는 독일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에 일년간 외래 환자로 치료를 받게 되어 집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 집에서 탈출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나 오래 동안 집을 떠나 살게 되니 집이 그리웠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 갔더니 집안 사람들도 내가 도둑놈이란 것을 잊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에 도독질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 가를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1년 후에 학교에 돌아 갔더니 내 또래 동내아이들은 4학년에 다니는데 내 혼자 3학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나는 자존심 상해서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해서 월반하여 4학년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내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담임선생님이 반가 후 교실 청소를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나는 본의 아니게 꼼짝 할 수 없었습니다. 운동장에 나가 아이들과 함께 뛰어 놀고 싶었는데 아프 다고 청소도 면제된 주제에 어떻게 운동장에서 뛰어 놀 수 있었겠습니까? 그 때부터 나의 행동은 묶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도둑질에 대한 또 다른 경험이 있습니다. 군대 시절이었는데 휴가 때에 군대에서 사용하는 우비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것을 집에 가서 사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군대 사무실에서 같이 근무하는 친구가 기타를 잘 쳤습니다. 기타 치며 노래하는 것이 좋아서 그가 가지고 있는 프린트로 된 노래집을 몰래 훔쳐 휴가백 맨 밑에 넣고 버스를 타고 오는데 그곳은 휴전선과 가까운 곳이라 곳곳에 헌병 검문소가 있습니다. 헌병들이 버스를 멈추고 올라와 군인들과 일반 인들을 살피다가 내려 가곤 했습니다.
그날에 한 검문소에서 헌병이 나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내리라고 했습니다. 나는 얼마나 두려웠던지 하나님께 간절히 빌고 회개하면서 절대로 다시는 도둑질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습 니다. 어릴 때 도둑질한 것을 상기하면서 말입니다. 그랬더니 헌병이 이것저것 묻고 내 짐을 조사 하고 내가 훔친 우비를 보고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음 차로 가게했습니다. 정말 십년 감수했습니다. 이제부터 절대로 남의 것을 도둑질 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때부터 남의 물건 이라 하면 식은 땀이 납니다. 십의 일조도 정확히 안내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기에 비교 적 정확히 바치려고 노력합니다. 그 후 내 아이들에게도 도둑질에 대해 트라우마성의 반응을 보였기에 우리 아이들도 남의 것에 관심이 없는 것 같은데 모르지요. 십일조를 잘 내라고 했는데 잘 내 고 있는 지?
나는 집에서 내 위에 남자 어른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2살 때에 세상을 떠나셨고, 형은 나와 일곱 살 차이인데 중학교 때부터 집을 떠났기에 나는 남자 어른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랐습니다. 산으로 들로 강가로 자유의 몸이 되어 헐헐 날아 다녔습니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자유의 영혼으로 만드셨습니다.
어릴 때에 토끼를 키웠습니다. 토끼에게 싱싱한 풀을 사계절 공급해 주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까지는 주위에서 쉽게 싱싱한 풀을 공급할 수 있었지만 겨울에는 가까운 주위에서 풀을 얻을 수 없기에 산으로 가면 싱싱하게 살아있는 풀들이 있습니다. 그 풀들을 뜯기 위해 눈보라가 치고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온 산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풍부한 음식을 공급했는데도 토끼가 새끼를 낳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집 앞에 사시는 어떤 할머니집의 토끼는 일년에 두번, 세번 토끼 새끼들을 한번에 다섯 마리, 여섯 마리 씩 낳았습니다. 그 때 생각하기를 나는 그렇게 잘 먹여서 토끼가 토실토실한데 새끼를 낳지 않고, 그 할머니 집 토끼는 못 먹어서 비실비실한데 새끼는 그렇게 잘 낳는 지에 대해 의문이 있었습니다. 요즘 생각해 보니 혹시 내가 우리집 암토끼를 숫토끼에게 교배를 시키지 않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동물이 암수 교배를 해서 새끼를 낳는지 몰랐으니까요. 나는 어머니가 남편 이 없었기에 부부간에 성교하는 것을 알지 못 했습니다. 그 당시는 매스콤이 전혀 없었습니다. 신문 이나 잡지나 라디오나 물론 텔레비전도 없었을 때입니다. 물론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전기도 없었 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도 성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진주에서 방학을 맞아 고향 집으로 돌아 왔을 때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왔습니다. 내방에서 아이가 어디서 나오는지에 대한 열렬한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 방 옆에는 갓 결혼한 아줌마가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고 우리의 토론을 듣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눈치챘습니다. 그때 내가 큰 소리로 우겨 아이는 엄마의 배꼽으로 나오는 것으로 결론지었습니다. 물론 그 때에 그 친구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아 는 아이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중 2학년 때부터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삶을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질병 으로 꼼짝 못하고 방에서 투병하는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내 왼쪽 다리 발목 안쪽 복숭씨에 피부병이 생겼었습니다. 습진이라 했습니다. 이 병은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봄철과 가을철에 꼭 그 자리에 모기에게 물릴 때에 생기는 뽀드락치 같은 것이 솟아 납니다. 그리고는 점점 커져 가서 큰 감자 알 정도의 크기로 커지면서 진물이 나고 아프고 가렵고 못 견딜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온갖 피부약을 다 발라 봤습니다.
치료하면 나았다가 봄철, 가을철이 되면 또 솟아나고 해서 정말 혼란스러웠습니다. 내 가까운 친척의 내 나이 또래도 이 습진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눈썹이 빠지면서 마치 나병은 아니지만 나병 환자 같은 모습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나도 저렇게 되지 않을까 하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치료하는 방법이 아무리 무섭고 아파도 치료해서 병 낫겠다는 결심이 대단했습니다. 치료하면 또 생기니까 한의사가 그 종처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해서 황산을 밥에 뿌려 종처에 발랐습니다. 얼마나 아픈지 하루 종일 그 통증과 싸웠습니다. 그 때는 고통을 완화해 주는 타이레놀 이 없었는지 아니면 몰라서 못 먹었는지 그 고통을 온 몸으로24시간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도 또 종처가 재발하게 되자 이제는 그 황산을 쥐똥 같이 양 옆을 빼쪽하게 만든 한약을 그 종처의 핵심부분에 망치로 박아 넣었습니다. 근원지를 뿌리 채 뽑아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때 부터 나는 그 질병과의 투쟁에 온 정신을 쏟았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통증과 싸우고 그 병과 싸웠습니다. 그렇게 싸돌아 다녀야만 했던 내가 방에 갇혀 투병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중학교 2 학년, 3학년이 지나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진주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집을 떠나게 되었습 니다. 동네 교회에 새벽기도에 참석하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병을 낫게 해 줍시사 하고요. 그 병이 그 고통이 내게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 병이 하나님 아버지가 주는 것인 줄 알았습 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 아버지가 무서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내게 고통과 병을 주시고 징계 하시는 분이시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 잘 보여 벌받지 않으려고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봉사도 열심히 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벌을 주실까 해서입니다. 마치 내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기를 성가시게 구는 파리를 잡기 위해 파리 채를 쥐고 파리가 자리에 앉기 만을 기다리다가 기회가 오면 쳐서 잡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이시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눈치만 보았습니다. 나쁜 생각도 할 수도 없고, 아무런 나쁜 행동을 할 수 없고, 율법 준수, 주일성수, 십일조 생활, 교회 출석, 교회봉사 등 열심히 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가 아니라 하나님의 노여움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내가 중학생, 고등학생 때에 투병하게 하신 것은 나의 위험한 사춘기를 곱게 지나가게 하신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에 대한간호협회 회장이었던 이모님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모 님이 미국유학을 갔다 돌아오신 피부학 의학 박사님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선생님이 미국에서 가져온 캄비손(스테로이드, 프레드니손)피부연고를 발랐더니 며칠 만에 당장 낫는 것입니다. 그리 고 몸 속에 있는 균을 잡아야 한다면서 먹는 약도 주었습니다. 아마도 지금 생각해 보니 프레드니 손 계통의 복용약인 것 같습니다. 첫 일주일은 하루에 한 알씩 칠일, 둘째 주일은 매일 두알씩, 셋째 주일은 매일 세 알씩… 일곱째 주일은 매일 일곱 알씩 먹었는데 5주째부터 피부에 발진이 나기 시 작 했습니다. 그리고 여덟째 주일에는 매일 6알씩, 매주 점점 알약을 줄이다가 열 넷째 주에는 매일 한 알씩 먹었는데 11주째부터 피부에 붉은 점들이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부터 그 병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그 때에 내 주위의 어떤 아줌마는 평생 동안 그 병으로 고통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한국에 이 약들이 소개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그 의사 선생님도 그 약을 가져와 나를 통해 임상실험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오, 하나님께 감사, 나는 그 병의 속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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