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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온 이유
나는 체험적인 신앙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철저했습니다. 어릴 때에 어린이 아침 예배(조기회)가 일주일 내내 있었습니다. 그 때는 너무 추웠었는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조기회에 꼭 다녔습니다. 성탄절 때에 유년주일학교의 제일 큰 상은 조기회의 개근상이었습니다. 나는 한번도 타지 못했습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때에 학교에서 아이들을 불러 내어 동네 청소를 시켰습니다. 나는 아침예배에 참석하느라 동네청소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침에 교회 가는 길에서 청소하는 반 아이들과 담임선생님과 마딱드려 선생님께 얻어맞기도 했습니다. 교회 가는 길에 다른 동네 형들이 자기 동네 길을 통과한다고 텃세를 행사하기도 하였습니다. 항상 그 동네 앞을 통과할 때마다 위기감으로 긴장해야만 했습니다. 군대 생활에서는 제대를 앞둔 고참이 내가 교회간다고 붙잡아 M1총구로 무방비한 상태의 내 명치를 찔러 뼈가 금이 간 채로 그 다음날인 월요일부터 일주일간 유격훈련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고참에게 선언을 했습니다. 나는 죽어도 교회 다닐 것이라고 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내게 호의를 베풀어주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순교정신으로 무장되었으며 철저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나는 성경에서 하나님은 아버지라고 하셨기에 보이지 않고 말씀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받아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께서 나를 너무나 혹독하게 훈련하시기에 그 아버지가 무서웠습니다. 혹시 벌 주실까봐 조심하고 벌 받지 않기 위해 교회생활에 열심이었습니다. 가까이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러나 멀리 해서도 안되는 아버지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께서 내가 어릴 때에 너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싫었습니다. 목사가 되면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하고 평생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싫었습니다.
교회생활에 열심이고 예배출석도 열심, 봉사에도 열심하니 친구들이 너는 목사가 되라, 신학교 가라고 합니다. 대학교 졸업할 무렵 담임목사님도 나를 불러서 신학교 가라고 하십니다. 나는 한국에 있다가는 목사가 되겠구나 생각하고 도망을 가기로 했습니다. 1975년 때는 캐나다의 형제 초청 이민수속은 6개월 만으로 가능했습니다. 누나가 1970년에 캐나다 간호사취업을 갔기 때문에 쉽게 캐나다로 갈 수 있었습니다. 대학교 마지막 학기가 끝나자 마자 졸업식도 하지 않고 10월 24일에 캐나다로 왔습니다. 그때는 유엔 데이로서 공휴일이었습니다.
친척친구들의 전송을 받으며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토론토에 도착했을 때에 그곳은 온 세상이 푸르렀습니다. 잔디가 곱게 푸르게 잘 관리되어 있었습니다. 마음으로 이곳이 지상천국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일년 후에 아내를 피앙세로 초청해서 그 이듬해인 1976년 12월 18일에 결혼했습니다. 결혼을 했으니 둘이서 먹고 살기 위해 직장을 구해야 했습니다. 조용히 하나님께로부터 숨어살아야 하겠기에 공장 일을 택했습니다.
아내는 내가 군대에서 제대하여 복학한 후 내가 다니는 을지로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한 경향 교회에서 만났습니다. 나는 그 때에 대학생회 회장이었는데 주일 저녁 예배 마친 후에 대학 생끼리 모여 기도모임을 가졌습니다. 그 때에 부산에서 방문한 예쁜 여학생이 그 기도모임에 참석했습니다. 회장인 내가 그녀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얼마나 은혜스럽게 기도하는지 그 기도에 반했습니다. 그 때 내 마음에 저 여학생은 내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친구의 소개로 사귀게 되어 나는 먼저 캐나다로 오고 그 이듬해에 그녀가 캐나다로 와서 결혼하였습니다.
2. 직장에서의 사고
하나님께로부터 숨어 살아야 하겠기에 작은 직장을 얻어 숨어 살기로 했습니다. 직장은 백화점에 납품하는 상품을 포장하는 박스를 만드는 회사였습니다. 프린트 머신을 사용하다가 오른 손이 기계에 압착되었습니다. 종이를 프린트하는 기계에 내 손을 압착시켰으니 그 손이 새카맣게 타고 뼈가 뿌르저 흐늘흐늘 하였습니다. 그때에 아버지께 부르짖었습니다. ‘아버지, 나는 이런 손을 가지고는 살 수 없습니다. 이 손 가지고 사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하고 외쳤습니다. 급하게 병원에 실려갔는데 6월의 오후 6시쯤이었습니다. 의사들이 퇴근 한 후이기에 그 시간에 병원에 남아 있는 아무 외과의사를 불러 내 손을 수술하게 했습니다. 여섯 시간 동안 터진 피부 를 꿰매고 뼈를 맞추는 수술을 했습니다. 그때에 아버지께 기도하기를 내 손을 완전히 낫게 해 주시면 목사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캐스팅한 것을 풀어 받더니 실망이었습니다. 그후 손 전문의사를 통하여 3여년에 걸쳐6번 수 술을 했습니다. 손바닥 중에서 엄지와 둘째 손가락 부분이 가장 두꺼운 부분입니다. 프린트 기계에 손을 넣었을 때에 이 부분이 가장 심하게 다친 부분입니다. 그 부분의 살이 거이다 없어 졌습니다. 이 부분에 살을 채우기 위해서 왼쪽 허벅지에서 오른 쪽 허벅지에서 그리고 마지막 수술 때는 오른쪽 허리 부분을 살을 반쯤 떼 내어 오른 손에 붙여 오른손과 허리를 연결시켜 한 달 동안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피가 통하게 한 후에 이 부분을 잘라 오른손에 붙일 때는 한 시간 동안 집게로 차단시킬 때에 단말마의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때에는 고통을 덜하게 하는 주사나 약도 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지독한 고통을 견뎌냈습니다.
3. 장사
치료를 하는 동안 생각하기를 앞으로 손으로 하는 일로는 먹고 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장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5만불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5만불은 요즘의 50만 불에 해당합니다. 그 돈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요. 토론토 시내에서 사업체를 운영 하려면 주일에도 문을 열어야 했습니다. 주일성수하려면 시골 쪽으로 가게를 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친구들이나 주위의 사람들이 나에게 신학교 가라고 권했습니다. 이곳에 있다 간 또 목사되라는 소리 듣겠구나 생각하고 멀리 도망가기로 했습니다. 말로는 주일성수하면서 장사하기 위해 시골로 간다고 말했습니다.
주일성수하기 위해 시골에 가서 장사한다고 했으니 주일예배는 꼭 본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기로 하나님 아버지께 약속했습니다. 장사 5년 동안 하면서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장사하는 장소는 토론토 시내에서 120마일 거리의 Tillsonburg였습니다. 독일계의 이민자들의 동네인데 인구가 1만명 정도였습니다. 동양인으로는 내하고 회사에서 일하는 대만계 박사인 부부였습니다. 그 마을이 내 마음에 평안을 주었고 아늑했고 포근했습니다. 숨어 지내기 좋은 곳이라 생각했 습니다.
그런데 그 가게는 몸에 바르고 씻는 종류의 비유티샵(Beauty shop)이었습니다. 그 가게를 한국 사람에게 샀는데 사기를 당했습니다. 나에게 가게를 팔기 위해 그 주변의 모든 도매상들에게서 물건을 사서 가게에 잔뜩 채우고 나에게 가게 재고물건으로 팔았습니다. 도매상들에게서 사들인 물건값을 지불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도매상들은 내게 그 돈을 갚으라고 합니다. 그 돈을 대신 갚지 않으면 물건을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건을 조달하기 위해 120마일 거리 에 있는 토론토까지 겨울에는 눈길, 어름 길을 다녀야 했습니다.
어떤 해 여름에는 가게의 에어컨이 고장이 났습니다. 근방의 에어컨 샵에 전화를 했더니 이 가게 에어컨은 특별한 종류이라서 아무나 고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곳에서만 그 에어컨을 고칠 수 있다해서 연락했더니 전 주인이 서비스를 받고 돈을 지불하지 않았기에 그 돈을 내가 지불하면 고쳐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돈을 내가 지불하지 않으면 여름 날씨에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으므로 가게 안의 샴퓨, 컨디스너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상태에서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해서 가게 지하실로 내려가 땅을 치면서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왜 나를 따라 다니면서 나를 이렇게 괴롭히십니까 하고 말입니다.
사업하는 5년 동안에 토론토에 있는 교회로 예배보러 다녔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청소년 지도 부장 겸 교사로 일했는데 어느 해 여름에 청소년 하기 수련회 기간 동안에 나는 5일간 금식기도하였습니다. 기도 내용은 사업의 축복을 위해서입니다.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날 밤 새벽 1시경에 메시지에 은혜를 받고 찬송을 부르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감정에 의한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눈물이 너무 많이 흘러 나와서 눈을 감고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3장의 활동 사진인데 첫 그림은 갈보리 산상의 세 십자가였습니다. 반대 쪽에서는 찬란한 은빛이 비추이면서 상대적으로 그 십자가들은 흑색이었습니다. 실루엣의 십자가였습니다. 그 후 장면이 바뀌어 큰 광장을 보여주시는데 스포츠 아레나였습니다. 입추의 여지없이 사람들로 가득 찬 광장이었습니다. 저 멀리서 한 사람이 강단에 올라 말씀을 전하고 있었고 그 광장의 공중에는 은빛 찬란한 십자가가 광장을 가로 놓여 덮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그림은 십자가 군병들이 군마를 타고 먼지를 휘 날리며 전장으로 달리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그 석장의 그림이 반복되면서 30여분 이상 동안 보이는데 눈을 감으면 보이고 눈을 뜨면 안보이곤 했습니다. 내 평생에 환상을 본 것이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내 금식기도의 응답은 받지 못한 채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것이 금식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인 줄 몰랐습니다.
또 하나의 환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직접 받은 것은 아니고, 디트로이트에서 목회할 때 인데 원종숙전도사가 다른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었는데 우리 교회에 와서 기도회 모임을 가졌을 때입니다. 원종숙 전도사님은 원종수 집사(암 전문의사)의 누나입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시는데 내가 젖강(우유가 흐르는 강)에서 목욕을 하는 그림인데, 말하기를 하나님의 깊고 풍성한 말씀의 은사가 있다고 했습니다.
4. 콤퓨터 공부를 하다
WALMART이 우리 타운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장사가 꾀 괜찮았습니다. 장사하기 위해 빌린 돈 중에 3만불을 갚고 교회 1만불 건축헌금도 하였습니다. 드디어 WALMART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K-MART는 미국 전역에 130개 있었습니다. WALMAT은 그 때 시작이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캐이맏과 경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기위해 도시로 진출해야 했습니다. 도시로 진출하기 전에 5천명, 만명 되는 타운부터 점령해서 실력을 키운 뒤에 도시로 진출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우리 타운이 그들의 타겟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타운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지만 타운 사람들의 반대로 타운 외곽에 월맏을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결과적으로는 타운 비지네스 사람들에게 더 불리해졌습니다.
타운 안에 월맏이 있었다면 월맏에서 시장을 보고 어슬렁 어슬렁 타운 상가에도 사람들이 들락 날락 할 수 있었을 텐데 외곽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월맏에 들어가 물건을 사고 아예 타운에는 들어오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같은 뜨내기 장사꾼들, 빚을 가지고 장사 하는 자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장사로 먹고 살 수 없겠구나 생각하고 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무슨 공부를 할가 생각하다가 콤퓨터 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에 교회에서 학생들에게 조용기 목사님의 요한계시록 강해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내가 아이들에게 왜 요한계시록을 가르치려는 생각을 했는지 모릅니다.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몇몇 집사님들이 아이들에게 계시록을 가르친다고 반대를 많이 했습니다. 그 때에 목사님이 ‘계시록은 성경이 아닙니까?’ 하고서 내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장사가 잘 안되어 한가한 가게 안에 앉아서 생각하기를 ‘내가 목사가 되어야 하나?’하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콤퓨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재미 있었습니다. 어떤 학기는 ALL A PLUS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흥분이 되어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앞으로 콤퓨터를 잘해 그 방면으로 나가겠다는 큰 꿈에 부풀었습니다. 내가 공부를 시작할 때에 하나님께 아양을 떨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앞으로 영어로 신학공부를 해야 할 텐데 미리 영어로 공부를 하게 해 주세요’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콤퓨터 공부에 재미를 느끼면서 딴 마음을 먹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학교에 갔는데 중요한 과목인 코블 프로그래밍 교과서를 도둑맞았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학교 책방에서도 살 수 없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얼마나 좌절되었는지 모릅니다. 오! 하나님께서 또 간섭하셨군요.
그 때부터 겨우 공부를 마치고 졸업했습니다. 가게는 형편없는 상태가 되었기에 남에게 1만불을 받는 조건으로 돈도 받지 않고 넘겨 주었습니다. 그 돈은 영영 못 받았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가족은 콤퓨터 직장을 잡기 위해 다시 토론토로 이사 왔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직장을 벌써 구했는데 나는 1년 동안 직장을 갖지 못했습니다.
어느날 장모님과 아내가 큰 몰의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올라가는데 장모님이 잘못되어 미끄러지면서 그 밑에 있던 아내와 함께 아래로 굴러 떨어져 내렸습니다. 장모님은 아내 위에 있었기에 괜찮았는데 아내가 많이 다쳤습니다. 응급으로 병원에 가서 치료 받았는데, 그 전부터 아내는 산부인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 후에 아내는 유방암 3기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면서 생각하기를 ‘내 신세가 와 이래 댔노’ 한탄했습니다. 목사가 되어야 하나? 하나님 아버지, 내가 목사가 되겠습니다. 손 다치고, 장사 말아먹고, 고생해서 콤퓨터 공부를 했는데 직장도 못 얻었는데, 이제 아내 마저 죽게 되었습니다. 목사가 되겠습니다.
‘내가 장사 잘 해서 성공할 자신이 있었는데, 콤퓨터 잘할 자신이 있었는데 다 내려 놓겠습니다. 나는 이제 죽었습니다. 두손 두발 다 들었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했습니다. 목사 안되겠다고 도망친지 10년 만이었습니다. 손 다친지 10년 째 되는 때이었습니다.
장사하고 공부하는 동안 매 주일 토론토 본 교회를 다녔습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런던에서 토론토 지역은 겨울은 소노우 벨트(Snow belt)라고 합니다. 하이웨이가 항상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습니다. 조심 조심 운전하지 않으면 미끄러집니다. 우리는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친구들과 모처럼 함께 이야기하다 보면 밤 12시 혹은 새벽 1시에 집으로 돌아 옵니다. 길이 어둡고 얼음으로 덮여 있어 위험합니다. 차사고를 당해서 폐차를 한 적도 있습니다. 공부하느라 잠이 모자라는데 밤 늦게 운전을 하다보면 조는 것이 아니고 쿨쿨 주무시고 있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어떤 때는 자다가 잠을 깨어 보면 눈길의 얼음길을 자동차 혼자서 달리고 있었습니다. King’s Highway 401 도중에 Tillsonburg로 가는 길로 빠져야 하는데 졸다가 몇 번이나 그냥 런던, 온타리오 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 적도 많았습니다.
내가 엘파소에서 사역을 시작할 무렵 아내는 토론토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아내가 나와 합력하기 위해 살던 아파트를 정리하고 물건들도 처리한 후에 1월달 어느날 아침 친구들이 환송하기 위해 왔습니다. 손을 잡고 기도한 후에 아내가 차안에 들어가 시동을 거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그런 경우 후드를 열고 캬브레타 뚜껑을 열면 신선한 공기가 유입되면서 시동이 걸립니다.
그런데 친구가 카브레타 뚜껑을 열기위해 플라스틱 구두 주걱을 사용하다가 그것이 부러져 카브레타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기아를 중립위치로 놓고 차를 밀어 가까운 정비소로 갔습니다. 정비사가 말하기를 카브레타를 분해하여 구두주걱을 빼 낼려면 하루가 걸린다고 했습니다. 환송 나온 사람들을 보낸 후 우연히 시동을 걸어 봤는데 놀랍게도 시동이 걸 렸습니다. 디트로이트에 와서 연료를 넣고 시동을 걸려고 했는데 또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지나가는 사람이 다가와서 자기가 도와 주겠다고 하더니 몇 번 이것 저것 만진 후에 다시 시동을 걸어 보라고 해서 시동을 걸었더니 시동이 걸렸습니다. 그후 아무 문제없이 2000 마일을 여행하여 무사히 아내와 장모님 그리고 7살 딸, 4살 아들이 엘파소에 도착했습니다.
그 때의 일을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아찔한 생각이 듭니다. 만약 하이웨이 도로상에서 엔진이 멈춘다면 1월달의 동부 추위에 4식구는 얼어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카브레타에 구두 주걱이 들어갔는데도 엔진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도중에 시동이 꺼졌을 때에 어떤 사람이 도와주었는데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가 아니었을 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앞을 향해 가는 길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두려움 없이 나아갑니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젓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안긴 것 같이 언제나 주님 품에 안겨 마음이 평안하고 (peaceful, restful) 아늑하고(snug) 편안(comfortable)합니다. 다음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만약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이라도 날씨 탓으로 교회 가지 말자 했으면 안 갔거나 못 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뜻 앞에서 한 마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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