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창 시절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학교에서 음악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시골학교라서 음악선생님을 찾기가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진주고등학교 때도 3학년 2학기 때까지 음악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 때에 진주시 전체적으로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진주 고등학교는 그 지방에서는 명문 고등 학교로 알려지고 있었으며, 매년 서울대학교에 50명 정도 입학시켰습니다.

한번은 진주고등학교와 진주여자고등학교 사이에 라디오에서 음악퀴즈대회가 있었습니다. 음악이 들리면 그 노래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 맞추는 게임이었습니다.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 나오자 마자 남학생이 먼저 스톱하고 노래 곡목을 이야기 했습니다.  아마도 그 노래가 보편적으로 아주 쉬운 클래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뽕짝의 노래 제목을 말함으로써 진주 사회에 큰 화제거 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장 선생님께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도대체 학생들의 교양을 어떻게 가르쳤느냐 하고 말입니다.

그일로 아마도 한 음악선생님이 자원을 한 것 같습니다. 남편과 이혼하던 무렵이었던 교대 여자 교수님이셨습니다. 나는 너무 좋았습니다. 풍금도 없고 피아노는 물론 없지만 우선 고3학년 학생들에게 음악이론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기초 작곡하는 법도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는 음악 이론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학기 동안 음악의 맛만 살짝 보고 대학시험 치루기 위해 서울로 올로 오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진주에 계시는 할머니께 연락을 했습니다. 학교에서 서울대학교 입학 원서를 내게 안 써주겠다고 하는데 할머니께서 이 문제를 처리해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 외할머니는 머리가 예리하고 기질도 강하신 분입니다. 내 말이라 하면 깜박하시는 분이십니다. 할머니는 우리 고등 학교 교장선생님의 아버지이신 장로님과 친구였습니다. 할머니가 장로님께 이야기해서 교장선생님이 내 원서를 써주도록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원서가 올라 왔고 서울대학교에 합격했습니다. 만약 그 학교에서 내게 원서를 써주지 않았다면 어떻했겠습니까? 그 후에 내 후배가 서울에 올라와서 내게 말해 주기를 내가 그 학교에서 쎈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학교에서는  합격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학생이 합격했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에게 권능을 주셨듯이 제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동안의 질병을 통한 인생훈련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보상이었습니다. 나의 기를 살려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질병으로인해 공부를 많이 못했습니다. 대학 2학년 때입니다. 나는 내가 다니던  교회의 대학부 회장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우리 대학부 회원이 다른 교회 다니는 대학생 친구를 우리 교회 대학부에 대려 왔습니다. 그 친구가 내게 와서 말하기를 ‘형, 구원받았소’라고 말하는 것입니 다. 나는 이 말을 들었을 때에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릅니다. ‘야, 니가 나를 누구로 알고 감히 그 따 위 질문을 하느냐’ 하고 발길질하여 쫓아버렸습니다(속으로 생각하기를 나는 4대째 믿는 집안이 요, 성가대 회원, 유년주일학교 교사요 대학부 회장인 나에게 감히 구원받았느냐고 묻다니…..)

그런 후에 내 마음 속에 ‘너 구원받았느냐?’ 하는 질문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길을 가는데 너 구원받았느냐, 밥을 먹을 때도 너 구원받았느냐, 책을 볼 때도, 강의를 들을 때도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도 너 구원받았느냐고 말합니다. 그 때부터 나는 믿음에 대한 깊고 긴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믿는 기독교가 참 진리인가, 성경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나님이 실제로 살아 계시냐, 천당과 지옥이 있느냐, 나는 누구인가 하고 궁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철학책도 읽고 심리학 책도 읽고 강의도 듣기도 했습니다. 아무런 결말을 얻지 못하고 심한 노이로제에 걸려 죽겠다고 하고서 높은 산 가파른 바위로 올라가 떨어져 죽으려고 믿을 내려다 보니 감감하고 현기증이 나서 죽을 것 만같아서 내려 왔습니다. 심한 노이로제 때문에 공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생화학,  유기화학, 무기화학, 켈큘러스 등 이 과목들을 시험 볼 때에 다 수학으로 풀어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한 없는 실망의 늪에서 허우적 거렸습니다.  그로인해 나는 기가 죽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기고만장하여 술을 먹고 서울 밤거리를 활보하고 다닐 때에 나는 서울대학 생이란 특권을 누리고 프라이드를 가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내 이종형은 서울대 2년 선배인데 나와 2년 동안 같이 대학생활을 했습니다.  그 형은 친구들과 함께 술 먹고 어울리면서 한껏 최고의 젊음의 대학생활을 즐겼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서울대학교에 들여 보내주셔서 그동안 질병으로 고통당했던 것에 대한 보상을 해 주셨지만 교만하지 말고 딴 생각 품지 말라고 나를 짖이기고 발로 눌러 꼼짝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름방학마다 시골에 근로 봉사 겸 시골교회에 여름성경학교를 인도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기차 할인, 회원모집, 교인들의 집집 마다 다니면서 보조금, 쌀, 반찬 등 여러 가지를 준비하는데 아무도 도와 주지 않았습니다. 내 혼자 모든 준비를 다 해야 했습니다. 본 교회 토박이 대학생들은 시골출신인 나에게 일을 맡기고 자신들은 몰려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기차역에 가서 기차표 할인 받는 것도 버스를 타고가서 여러 번 들락 날락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내 혼자서 뙤약볕에 다니면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방학 동안에 산속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면 뒤처 진 과목들을 다 따라 잡을 수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가 하고 한 없이 괴로워 했습니다. 그래도 그 일을 해냈습니다. 봉사활동 때는 고생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방학이 끝나 학교에 가서는 또 고통을 당했습니다. 2학년 여름 방학 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다 보상해 주십니다.

캐나다에 와서 콤퓨터 학과에서 공부할 때에 통계 수학인지 먼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대학 때 수학과목에 질렸지만 마음 속으로 언제 가는 나의 원수인 수학에 대한 복수를 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학기말 시험에서 수학시험을 치게 되었습니다. 조교가 백지 시험지 6장을 배부했습니다. 2문제가 나왔는데 수학 시험 한 문제를 푸는데 시험지가 3장이었습니다. 한 문제를 푸는데 3 페이지를 사용하는데 푸는 과정도 정확해야 하며 해답도 정확히 맞추어야 했습니다.  그런 시험 문제에 백점을 받았습니다. 그 반에서 백점 받은 것은 둘이었는데 나와 그리고 해군대위 출신 베트남 난민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대학교에서의 수학에 대한 설움을 날려버렸습니다. 나도 수학을 잘 할 수 있구나를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내가 다시 대학공부를 한다면 수학과를 공부하고 싶습니다. 수학공부는 재미있습니다. 수학책 다섯권을 사서 서가에 꽂아 놓고 그 책들을 볼 때마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수학공부를 해야지 말합니다.

지금까지 학교생활 동안 질병과 수학문제로 나를 묶으시고 자유분방했던 나의 어릴 때의 기질을 잡으시고 관조하는 훈련을 시키셨고, 겸손하게 하셨고 나서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나를 숨겨 두 \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성격은 강하게, 행동은 신중하도록 훈련시키셨습니다. 나는 책상에 앉아 있지 못할 체질인데 오래 고된 훈련을 통해 그렇게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대학교 때까지 운동을 못했습니다. 50대까지 계속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60살부터 마라톤 대회에 참석하게 했습니 다.

50대의 어느날 새벽예배를 마치고 교회 앞에 있는 공원의 공설 수영장에 수영을 하려 갔습니다. 25야아드 (22.86miteres) 거리의 수영장에 물속에 들어와 생각하기를 내가 왕복 10번만 하면 좋겠다고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10바뀌를 돌았는데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 50바뀌 돌겠다고 했는 데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100바뀌 돌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어서 이번엔 계속300바뀌까지 해도 되겠구나 생각하고 계속하다가 200번까지 쉬지 않고 돌면서 내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게 이런 괴력이 있다는 것에  두렵고 놀랐습니다. 그날은 그만 두었습니다. 5.7마일 정도의 거리요 시간으로는 3시간이 넘었습니다. 자유형이 아니고 소위 개헤엄으로 해냈습니다. 개나 소가 물속에서 헤엄치는 방식의 헤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수영방법을 개 헤엄이라 불렀습니다. 머리를 물속에 넣지 않고 물 밖에 두기에 물속에서  몸이 물과 수직이 되기 때문에 온몸으로 물의 저항을 받으며 헤엄을 칩니다. 그래서 굉장히 힘들고 느린 헤엄 방법입니다. 어릴 때에 고향의 황강은 보통 때는 물이 없다가 홍수 때에 누른 흙탕물이 흘러 갑니다. 이때에 머리를 물속에 넣지 않고 헤엄치는 수영이었습니다. 그 때에는 자유형 수영법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자유형은 몸을 수면과 평행하게 하는 수영이기에 힘도 덜 들고 개 헤엄에 비해 속도가 훨씬 빠릅니다

내가 그렇게 수영을 오래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 집에 돌아와 흥분했습니다.  그 다음 다시 한번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우연인가 아니면 내 힘인가를 시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도 쉬지 않고 50바뀌, 100바뀌, 200바뀌, 300바뀌, 그리고 계속 헤엄쳐 나갑니다. 여름 방학 때였기에  정오 12시 부터 일반인 입장 시간이 되어 아이들이 몰려 들어와 물이 출렁거려 더 이상 헤엄 칠 수 없어 물밖으로 나와서 보니  4시간 반을 물속에서 안 쉬고 헤엄을 쳤던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능력을 주셨구나하고 감격했습니다.

수영 이야기가 나와서 기억이 나는데 나는 산골 촌놈입니다. 한번도 바다에서 수영을 해 보지 못 했습니다. 대학 2년 여름 방학 때에 남해에 해양 생물 생태 연구를 갔었습니다. 그 때가 장마철 이라 일주일 내내 실험실에서 실험만 하고 있다가 어느 날 아침에 밖에 나와 보니 날이 개어 있었습니다. 나는 이 때다 싶어 앞 바다 한 가운데에 작은 보트가 있는 것을 보고 저기까지 헤엄쳐 가서 그 위에 올라가 잠깐 쉬었다가 다시 돌아 오리라 하고서 헤엄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쯤 가니까 갑자기 물 온도가 차가워졌습니다. 나는 두려워서 뒤돌아 보니 돌아갈 거리가 더 멀어 앞으로 전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작은 보트가 아니라 큰 배였습니다. 수면에서 높이가  2m가 넘는 큰 배였습니다. 배 주위 물 위에 직경이 50cm되는 유리공이 있어 그 위에 매달려 쉬어 보겠다고 했으나 이것이 뺑뺑 돌기에 쉬지도 못하고 다시 돌아 와야 했습니다.  몇 시간이 걸렸는지 모릅니다. 학생들이 내가 없어진 것을 알고 찾았는데 아무데도 없고, 아무도 나를 보지 못했습니다.  한 참 후에 바다 저 멀리서 헤엄치고 오는 나를 발견한 것입니다. 나는 해변에 가까이 와서 다리로 바닥을 짚었는데 물속에 꼬꾸라져 버렸습니다. 요즘에 그 크기의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조그만 보트로 보일 정도의 거리는 몇 마일일까 생각 합니다. 바다 수영을 하는데 1마일까지 헤엄쳐가서 돌아오는데(삼종 경기를 위해), 바다에서 1마일 거리에 있는 배는 그렇게 작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 이야기 를 하는 것은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라톤을 하다보면 5-6시간 동안 길 위를 달리는 것이 단조로워  3종 경기를 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달리기와 수영은 할 줄 알기에 자전거만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전거는 레이싱 바이크이기에 최소 2천불에서 만불 이상의 가격입니다. 최소의 가격으로 자전거를 구입해서 연습 합니다. 하루에 80마일까지 달려 봤습니다. 이렇게 장거리를 달릴 때는 달리는 중에 자주 먹고, 잘 먹어야 하는데 레이싱 바이크는 음식물을 가지고 다닐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단체로 장거리 바이시클링 연습을 합니다.  나는 항상 혼자 해야만 했습니다. 목사이기에 남들이 일하는 월요일에  혼자서 운동을 해야 했습니다.

3종 경기를 하려면 수영은 속력을 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유형 수영을 해야 합니다. 머리를 물에 넣고 몸을 수면과 평행하게 해서 물의 저항을 최소화해야 힘도 덜 들고 빨리 달리고 멀리 수영을 할 수 있습니다.

자유형을 배우기 위해  3종경기에 대한 책을 아마존에서 5권 주문했습니다.  어떤 책은1000 페이지나 되는 책도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자유형 수영의 요령을 찾아냈습니다. 첫째는 몸을 수면과 평행하도록 하라.  둘째는 몸을 좌우로 기울이라 이 때에 머리를 물위로 내어 숨을 쉬라. 셋째는 몸의 길이를 최대한 길게 하라.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한 손을 머리 쪽으로 길게 뻗고 연속적으로 다른 손을 머리 쪽으로 길게 뻗어 될 수 있는 데로 몸의 길이를 길게 하라. 머리를 물속에 넣는 법과 그 때에 숨쉬는 법을 읽고 수영장에 와서 그 원리들을 실험해 보고 터득하기 시작했습 니다. 이 이론대로 내가 실제로 물속에서 할 수 있는지 실험했는데 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두번 왔다 갔다 하는데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수영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마음에 생각이) ‘빨리 달리려고 하지 말고 천천히 수영하라’고 코치해 주었습니다. 그래 서 수영 속도를 천천히 했더니 힘들지 않고 열번 왔다 갔다 했습니다. 책의 이론이 실제로 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날은 그 정도로 하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 다음 부터는 10분, 30분, 1시간, 2 시간 동안 물속에서 헤엄을 칠수 있어 드디어 3종경기에 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수영도 코치하시고 공부도 코치하시고 수학도 코치하십니다.

엘파소에서 목회할 때에 그 당시에 학원이 있는지, 있다 하더라도 아이들을 학원에 보낼 형편도 없었고 학원에 대한 생각조차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의 공부를 내가 도와 주었습니다. 아이들의  수학공부를 가르칠  때에 수학교과서에 쉬운 문제, 중간 문제,  제일 어려운 문제들이 있습니다.  숙제 문제 중에 제일 어려운 문제를 풀어가는 학생은 우리 집 아이들 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수학 담당 선생님이 우리 아이들을 전국 수학 영재 클럽에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아이들과 수학 공부를 할 때에 문제가 안 풀리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문제를 알게 해 주세요 하면 생각이 납니다. 그렇게 해서 문제들을 풀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부목사로 사역하던 교회에서 회계를 담당한 때가 있었습니다.  월요일 아침에 은행에 예금 하려 가기 전에 다시 돈을 확인하고 수표들을 확인하는데 수표 한 장이 없었습니다. 큰 일 났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생각을 주시는데 아래 설합을 깊숙이 조사해 보라고 해서 봤더니 윗 설합을 닫을 때에 한 장이 아래 설합으로 빠져 내러 갔던 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나는 대학 다닐 때에 하나님은 절대로 공부를 가르쳐 주시거나 시험을 도와 주시거나 잘 칠 수 있도록 하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생 시절에 기도해도 도와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시골에서 목회할 때에 내 아이들에게 학교 생활에서 공부 때문에 나같이 고생하지 않도록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요즘 와서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 시험도 도우시고 공부도 도우시고 수학도 도우시고 지혜도 주시고 명철도 주시고 생각으로 주시고 음성도 들려 주시는 것을 철저히 깨닫고 사람들에게 그 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어릴 때에 운동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남들은 운동을 하다가 그만 두는 나이인 60세부터 마라톤대회에 참석하게 하시고 삼종경기에도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삼종 경기하면 사람들이 철인 삼종경기로 생각합니다. 삼종경기에도 거리에 따른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진짜 철인삼종경기는 수영이 2마일, 자전거 120마일, 달리기 26.2마일입니다. 처음에는 cut off가 없었지만 참가하는 숫자가 늘어나면서 대회시간을 줄이기 위해 17시간의 컫 오프 시간이 생겼고  수영, 자전거, 달리기에도 컫 오프 시간이 생겼습니다.  나는 80세 까지 마라톤을 하기 위해 70세 부터는 하프 마라톤을 하고 있습니다. 제 아내는 67세부터 마라톤에 합세했기에 아내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하프 마라톤으로 바꾸었습니다. 아내는 67세에  8개월 만에 하프 마라톤 대회에 참석하여 매달을 받았습니다. 나는 공부하는 것을 싫어 했는데 책상에 앉게 하시고 책을 쓰게 하셨습니다. 책을 쓰는 중에는 하루에 10시간, 12시간씩 책상에 머물게 됩니다.

나는 한번도 머리가 좋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학교 다닐 때에 열심히 해 본적도 없었습니다. 투병하는 것에 온 힘을 쏟았고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1-2학년을 제외하고는 공부가 어렵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다닐 때에 진주고등학교는 매 월말 시험을 쳐서 420명 동급 학생들의 성적 석차를 벽에 발표했습니다.  나는 50등 안에 들었습니다.

나는 내 주 위의 사람들이 모두 서울대학교 출신이라 서울대학교 밖에 없는 줄 알았습니다. 친척 아제인 김광일은 경남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대, 내 이종형들 역시 서울대학생, 내 형의 친구들은 서울 법대, 상대,  공대, 문리대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나의 형은 서울법대, 상대 경제학과에 들어가려고 몇 번이나 실패하면서도 계속 제수하는 것을 보고 서울대학교 밖에 없는 줄 생각했습니다. 나도 당연히 서울대학교에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실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로 말입니다.

서울대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어려운 공부로 인해 나는 몹시 기가 죽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기고 만장하여 술파티하고 여학생들과 팀 미팅하고  서울 밤거리를 활보하고 다닐 때에 나는 서울대학생이란 특권을 누리고 프라이드를 가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내 이종형은 서울 대 2년 선배인데 내하고 2년 같이 대학생활을 했는데 그 형은 친구들과 함께 술 먹고 어울리면서 마음 끗 최고의 젊음의 대학생활을 즐겼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서울대학교에 입학시켜 그동안 질병으로 고통당했던 것에 대한 보상을 해주셨지만 교만하지 말고 딴 생각 품지 말라고 나를 짖이기고 발로 눌려 꼼짝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대학교 1- 2학년 때에 대학부 회장이었습니다. 여름방학마다 시골에 근로봉사 겸 시골교회에 여름 성경학교를 인도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기차표 할인, 회원모집, 교인들 집집마다 다니면서 보조금, 쌀, 반찬, 등 여러가지를 준비하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 다. 내 혼자 모든 준비를 다 해야 했습니다. 본 교회 토박이 대학생들은 시골 출신인 나에게 일을 맡기고 자신들은 몰려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기차역에 가서 기차표 할인 받는 것도 여러 번 들락 날락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내 혼자서 뙤약볕에 땀을 줄줄 흘리고 다니면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방학 동안에 산속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면 뒤처진 과목들을 다 따라잡을 수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가 하고 한없이 괴로워했습니다. 그래도 그 일을 해냈습니다. 봉사활동 때는 고생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방학이 끝나 학교에 가서는 또 고통을 당했습니다. 2학년 여름 방학 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보상해 주십니다.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한 번도 은혜를 받아 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신앙의 도전도 한번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교회 형이나 누나들이 겨울 SFC수련회, 여름 SFC 수련회 같은 것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 마산, 대구 등 도시로 갔다 와서 은혜받았다고 교회 앞에서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런 것에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그런 곳에 참석시키겠다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들을 먹이고 공부시키기 위해 군청서기로 일했습니다.  6개월 월급도 받지 못한 채로 자유당 말기 당시 대통령 선거를 위해 매일 시골로 출장 나가서 여성운동 강연을 하려 다녔습니 다.  우리 집은 아직 윗대에서 물려준 논 밭이 많이 남아 있어 어릴 때에 굶는 고생을 하지 않았습니 다. 형님은 외지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누나, 나, 동생 셋이서 자고 먹고 놀고 닭 키우고 돼지 키우고 토키 키우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지냈습니다. 어머니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흥분해서 그 날이 어서 오기를 기다렸는데, 새벽녘에 닭장에서 꼬꼬댁하는 요란한 소 리가 나서 가봤더니 족제비가 닭장에 들어와 닭을 물어 가고 닭장 온 곳에 피가 뿌려져 있었습니 다. 그일로 인해 어머니를 만나는 흥분이 걱정으로 변했습니다.

그 때 누나는 중 3때나 되었을까, 나는 초등학교 6학년 정도, 그리고 동생은 3학년 이었습니다. 또 어떤 날은 누나와 우리가 저녁에 공부를 하다가 호롱불을 켜 놓은 채로 자다가  누가 쳤는지는 모르지만 이불에 불이 붙어 타고 있었습니다.  옆방에 세들어 사는 어른들이 불타는 냄새를 맡고 우리 방문을 열고 들어와 불을 꺼주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올 때가 가까웠기에 누나가 이불은 다시 원상태로 만들었습니다.  호롱뚜껑이 깨져서  불을 켤 수 없었습니다. 그 때는 글루나 태이프 같은 것이 없었기에 밥풀로 부치려고 애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호롱불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이 나는데 나는 고등학교 3년 동안 호롱불에서 공부했습니다. 진주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는데 할머니가 한국전쟁 때에 피난가지 않고 집에 계셨는데 폭격으로 인해 전기줄이  합선되어 집에 불이 붙으려는 순간에 그것을 보고 맨 손으로 전기줄을 뜯어내서 집이 불타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 이후로 자기가 그 집에 사는 동안은 전기를 갖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내가 혼자 사시는 할머니께 합세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저녁 10시의 할머니가 주무시는 시간부터 호롱불을 켤 수 없었습니다.

우리 누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친척 어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누나는 어린 나이에 부뚜막 위에 올라가 큰 가마솥 뚜껑을 밀어내고 밥을 안치고 밥을 펄 때에도 부뚜막에 올라가 가마솥 뚜껑을 밀어 내고 밥을 펐다고 합니다. 우리는 셋이서 지낼  때가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직장생활로 타지에 출장나가시고, 할머니도 안 계실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내가 중학교 때에 하늘나라로 가셨기에 우리들끼리 지내게 되었습니다. 누나는  빨래 일, 밥짓고 반찬 만들어 먹이고 농사일 하고 학교다니기에 바쁘게 지냈습니다.  누나는 나보다 3살 위이지만 동생과 나에게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습니 다.

우리 어머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막내 동생은 형들과 누나가 집을 떠난 후에 엄마와 단 둘이 살 때입니다.  동생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데 엄마가 학교방문을 하였습니다. 동생이 수업시간에 교실 창문을 통하여 보니 엄마가 농구대에서 혼자 공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진주여고보에 다닐 때에 농구선수였다고 했습니다. 진주 여고보 농구부와 평양 여고보와의 농구 시합이 있을 때에 학교 대표 선수로 나갔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시골 합천의 교육과 문화를 이끄신 분이기도 하십니다. 유치원을 시작하셨고 일 년에 한번씩 유치원 원아들에게 연극 춤 노래 등을 훈련시키고 소품들도 만들어 합천읍 극장에 공연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육영수 여사의 초청을 받아 청와대 어떤 행사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 네 자녀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형은 8살, 누나가 5살, 내가 2살, 막내는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에 나오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집안 어른들이 젊고 예쁘고 유능한 여인을 붙들어서는 안된다 하여 자신이 가기를 원하는 곳으로 가게하자고 의논했습니다.  아이들은 친척들이 하나씩 맡아 키우기로 하고 떠나 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떠나지 않고 자식들을 키우겠다고 했답니다.

우리집은 안채와 바깥채 해서 두 채가 있었습니다. 안채는 살림집이고 바깥채는 길가와 면해 있었습니다.  길가 쪽에는 가게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양쪽으로 두개 있었고 방과 부엌이 있었습니다.  안 쪽으로도 방 두개 부엌 두개가 있어 방들을 세로 내주기도 하고 가게 할 사람들에게 세를 주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가게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안채는 전쟁 때에 폭격을 당해 없어졌습니다. 안채 보다 바깥채가 살아 있어 감사했습니다.

웃어른들로부터 물러 받은 집, 논밭으로 인해 어릴 때에 굶는 고생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밭은 우리가 농사를 짓고, 논은 친척이 짓게 하여 4:6제로 나누어 가졌습니다. 가을이 되면 나락가마니가 우리집 한쪽 가게 자리에 50가마니로 쌓여 있었습니다.  나는 그 위에서 놀기도 하고 잠자기도 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그 쌀가마니들을 지키고 있었기에 쥐들이 얼씬도 못한 것 같습니다. 쌀이 필요할 때가 되면 중학생인 내가 나락가마니를 지게에 지고 정미소에서  빻아 왔습니다.

우리 4형제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으로 신기합니다. 양부모 있는 가 정에서도 한 명 대학 보내기가 쉽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홀로부모(홑부모 자식들을 나중에는 비하해서 호로자식이라 했습니다. 어릴 때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아래서 모두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어머니가 큰 고생을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키우셨습니다.

초등학교 때에는 일주일에 한 번 모든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아 보건체조도 시키고 교장선생님이 훈시도 했습니다. 학교는 학생들 중에서 기성회비를 내지 않은 학생들을 불러 내어 전교 모든 학생들 앞에서 부모에게 가서 기성회비 받아 오라고 쫓아 보냈습니다. 그 때 누나, 나, 동생도 쫓겨났습니다. 누나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에 학비를 내지 못해 외상 졸업을 했습니다. 졸업장을 받지 못하고 나중에 돈을 벌어 학비를 갚은 후에야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내 대학 2년 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Views: 18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