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
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계 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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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해석
‘청황색 말’은 경제전 뒤에 또 하나의 전쟁이 뒤를 이을 것을 의미합니다. 청황색이란 푸르스름한 색깔로 사람이 죽었을 때의 피부색이니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죽게 될 것을 상징합니다.
‘탄 자의 이름이 죽음’이요 그 뒤에는 ‘음부’ 즉 지옥이 따르고 있습니다. 여기에 탄 자는 정치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종교적 지도자라는 암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정당에 속한다고 해서 지옥에 가거나 천국에 가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잘못된 이단종교나 적그리스도적인 종교를 따를 때에만 지옥에 가게 됩니다. 탄 자의 이름이 죽음이라고 한 것도 그 종교 지도자가 생명 없는 이단적이요, 적그리스도적인 종교로 영원한 생명이 없는 죽음의 종교의 교리로 사람들을 유혹하여 지옥으로 가게 하는 종교라는 암시입니다.
‘땅 4분의 1을 지배하는 권한’은 땅 4분의 1을 지배한다는 말은 다음 네 가지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세계 지면의 4분의 1의 가능성
- 세계 인구의 4분의 1일 가능성
- 세계 생산고의 4분의 1일 가능성
- 세계 나라 4분의 1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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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면의 4분의 1의 가능성
이 가능성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식민주의 시대라면 전 세계 표면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나라들을 점령하여 다스릴 수도 있었으나 이미 그런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모든 약소민족들이 독립을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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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구의 4분의 1의 가능성
이 가능성은 20세기 후반에 나타났습니다. 한 나라가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나 되는 나라가 출현한다는 것은 전에는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인구가 13억을 넘으면서 1970년 이후 현재 세계 인구(70억)의 4분의 1정도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상당히 가깝게되었습니다. 만일 앞으로 중국에 적그리스도 같은 지도자가 나타나서 세계의 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가게 하는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중국은 지금 겉으로는 공산주의 국가이나 내용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국가로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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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생산고의 4분의 1의 가능성
현재 미국은 전 세계 총 생산량의 약 4분의 1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또한 통합 유럽도 거의 비슷한 생산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지역은 오랫동안 민주주의가 가장 잘 실현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이런 세력이 등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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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4분의 1의 나라들의 연합세력
현대 역사에서 여러 가지 국가들의 연맹체를 보아 왔습니다. NATO와 같은 군사동맹도 있고 유럽공동체 같은 경제 동맹체도 있으며 지역의 나라들이 함께 하는 지역 국가 연맹체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기록된 세계 4분의 1을 지배하는 공동체의 특색은 위에서 설명한 대로 다음과 같은 특색을 가진 공동체 여야합니다.
- 종교적인 공동체이면서도 정치적, 군사적 세력을 가지는 국가 공동체
- 반 기독교적이며 적그리스도적인 공동체
- 많은 사람을 죽이는 잔인한 공동체
- 흉년의 원인을 제공하는 공동체이며 이 공동체가 1950년 경제전이 시작된 이후에 나타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면 이 공동체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종교 공동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독교, 불교, 도교, 유대교, 힌두교 등의 공동체가 존재하는데 불교, 힌두교, 도교, 유대교의 공동체는 아직 몇 개의 나라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또한 기독교 공동체는 국가와 정치를 분리시켜서 국가 권력을 장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보면 가능성은 이슬람뿐입니다. 이슬람은 종교인 동시에 정치 세력입니다. 그리고 현재 이슬람은 55개국으로 확장되었으니 세계 국가 수의 4분의 1을 초과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청황색 말을 탄 자는 이슬람이라고 해석함이 타당합니다.
청황색 말을 사용하는 4가지 무기에서 ‘검’은 적마에서 이미 해석한 대로 정치적 세력을 의미하며, ‘흉년’은 이 말을 탄 자가 흉년이 오게 하는 무기를 사용한다는 뜻이며, ‘사망’은 원어에 타바토스(THAVATOS)인데 이는 전염병이라는 뜻입니다. ‘짐승’은 잔인성을 무기로 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백마는 식민주의의 전쟁이며, 적마는 공산주의 사상의 물결을 타고 퍼져간 공산주의 혁명운동 즉 사상전이며, 손에 저울을 가진 흑마를 탄 자는 유럽공동체 운동의 물결을 타고 시작된 경제전이며, 이 청황색 말은 모슬렘 운동의 물결을 타고 나타난 에너지 전쟁, 즉 석유전쟁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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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재기
이슬람의 재기는 1970년대 초의 유가 상승에서 자극을 받고 거기서 힘을 얻었고 유가 파동으로 이슬람 국가들이 부와 힘을 엄청나게 축적하였고 그것을 밑천으로 삼아 서구에 지배되고 종속당하던 관계를 역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등은 풍부한 석유자원을 이용하여 이슬람의 소생을 지원하고 자극하였습니다. 경제력을 갖춘 이슬람교도들은 서구 문화에 매료당했던 상태를 부정하고 비 이슬람 사회에서 이슬람의 위치와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데 혼신의 힘을 쏟고 있습니다. 과거 서구의 경제력이 서구 문화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던 것처럼 석유자산은 이슬람의 우위를 알리는 증거로 내 새웠습니다. 이슬람의 부활은 근대화의 산물이자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노력입니다. 이슬람 부활의 저변에는 도시화, 사회 활동, 인구의 증가, 문맹률의 축소와 교육의 확대, 통신과 매체의 발전, 서구를 비롯한 다른 문명들과의 접촉 강화 같은 원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힘으로 기독교에 대한 경멸과 이슬람의 우월성을 공공연하게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슬람은 근대화는 받아들이되 서구화는 반대하며, 이슬람에 귀의하는 것이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올바른 생활방식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재기운동은 단순한 종교운동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종교운동입니다. 이슬람의 전략은 어디에 가든지 먼저 그 사회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지운동을 시작합니다. 구제, 진료소건립, 병원건축, 학교설립 등으로 확대합니다. 특히 이슬람은 학교를 세우고 점차적으로 공립학교에 대하여는 이슬람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갑니다. 그리고 이 학교 출신들로 학교연맹, 청년조직, 종교사회 교육연합체 등을 조직합니다. 이슬람 운동에 가장 핵심적인 계층은 근대화 과정에서 자란 젊은 학생, 젊은 지식인이 절대 다수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이슬람 인구가 증가하면 배후에서 반 정부운동을 일으키고 그 후에 이슬람 정부를 세우고 정권을 장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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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무기들
- ‘검’은 군사적 정치적 세력을 의미하는데 1973년 유가 상승과 걸프 전쟁을 전후하여 이슬람 국가들은 엄청난 무기를 구입하고 있으며 정치적인 세력도 점차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 국가가 침략을 당할 때에 다른 이슬람 국가들이 모두 협력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1979년 12월 27일에 소련이 아프카니스탄을 침략하자 이슬람 국가들은 일제히 이를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30억 달러 이상을 제공했고 이슬람 국가들이 2,5000명의 의용군을 전쟁에 참가시켰습니다. 특히 걸프 전쟁 때에도 요르단, 리비아, 모리타니, 예멘, 수단, 튀니지 등이 이락을 지지했고 사담 후세인은 이 전쟁을 미국을 중심한 서구 기독교의 세력이 아랍의 이슬람 세력을 말살하기 위한 전쟁이며 이슬람의 지하드 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은 최근 핵무기와 그 운반체를 소유했으며 그 밖에 이란, 리비아, 알제리도 핵무기를 가지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 ‘흉년’은 ‘처처에 기근이 있겠고’(마 24:7)와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막 13:8),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눅 21:11)의 구절에서 모두 종말의 징조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입니다. 종말에는 흉년이 많이 올 것이며 이로 인하여 기근이 전 세계적이 문제로 등장할 것을 예언합니다. 1990년 이후부터 오늘까지 전 세계 곳곳에 흉년이 심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흉년이 근년에 와서 왜 더욱 심각해진 것입니까? 과학자들은 엘리뇨 현상이 나타나면서 그 다음해에 흉년이 왔다고 합니다. 엘니뇨 현상이란 성탄절에 적도의 물의 온도가 7~8도 높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과학자들은 지구의 온난화를 매우 걱정하는데, 이 지구 온난화가 엘리뇨 현상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지구온난화는 석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흉년이란 모슬렘이 석유를 무기로 사용하게 된다는 예언인 것입니다.
- ‘사망’은 이슬람이 사용하는 세 번째 무기입니다. 이 사망이란 단어는 원어에 ‘타바토스’인데 이는 전염병이란 뜻입니다. 이슬람이 전염병을 사용하여 많은 사람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슬람이 전염병을 만들어 전 인류에게 전염시켜 많이 죽게 할 것입니까? 이것을 물리적으로, 영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물리적이란 이 전염병 세균을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에게서 채취하여 배양해서 게릴라 전쟁에서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이슬람이 전 세계에 확산되면서 많은 영혼들을 죽이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 ‘짐승’은 이슬람이 사용할 네 번째 무기인데 이 짐승이란 잔인성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이슬람 게릴라의 잔인한 모습을 보면 ‘짐승으로써 죽이더라’는 말을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외국의 대사관은 외국의 영토로 간주하는 것이 국제법입니다. 그러나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주재하던 미국 대사관 직원을 폭력으로 납치하여 444일 간이나 가두어둔 역사적인 사건이며, 또한 2011년 11월 30일자 중앙일보에서 이란의 대학생들이 영국정부가 이란 핵개발을 반대하는데 대한 분노로 영국 대사관을 점령한 기사가 나왔습니다. 성탄절 휴가를 위하여 팬암 103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려던 비행기를 영국 상공에서 폭파하여 무죄한 사람들을 모두 죽인 범인이기도 합니다.
뉴욕의 110층짜리 무역 빌딩을 폭파한 범인과 그리고 케냐와 잠비아의 미국 대사관을 폭파한 범인도 이슬람입니다. 우리는 이슬람의 자살 특공대가 미국의 대사관들이나 베이루트의 해병대 기지를 폭파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짐승이란 이슬람이 사용하고 있는 잔인한 자살 특공대라고 생각합니다. 이슬람은 이 네 가지 무기를 가지고 전 세계를 이슬람화하기 위하여 지금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석유는 핵무기보다 더 무서운 무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핵무기는 어느 나라가 먼저 사용하면 보복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석유 무기는 이슬람이 사용해도 반격이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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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석유의 위치
석유는 자본주의와 현대 산업사회를 등장시키며 발전의 중심을 이루었다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석유는 현대 산업사회에 가장 큰 규모로 그리고 깊숙히 침투한 산업입니다. 19세기 말 약 10년간에 등장한 거대한 산업 가운데 가장 크게 발전한 것이 석유 산업입니다. 20세기 산업혁명으로 석유회사들은 국제적인 대기업으로 등장하여 경영전략, 기술혁신, 시장개발 등을 통해서 세계 경제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석유는 제 1차 대전 때부터 하나의 중요한 전략물자가 되었습니다. 제 2차 대전시에는 석유가 전쟁의 결과를 결정하는 중심 역할 했습니다. 독일이 러시아를 공격한 이유도 코카샤스의 유전을 점령하기 위해서 입니다.
냉전시대에도 강대국들은 석유생산국을 지배하려는 암투가 계속되었습니다. 1956년의 수에즈 운하 위기는 구 유럽의 식민주의의 종지부를 찍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석유를 지닌 나라가 거대한 부국이 되었고 석유를 기초로 선진 공업국들이 경제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석유는 황금이요 무기요, 생활의 동맥이요 석유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인류 학자들은 현대인을 ‘석유인간’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석유 없이는 한 시간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석유는 도시생활의 동맥이며, 불가결의 요소입니다. 석유는 또한 화학비료의 원료로써 현대 농업을 지배하고 있으며 또한 농촌에서 도시로 식량을 운반하는데 절대 필요한 차량의 연료를 공급합니다. 플라스틱과 기타 공산품에서도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현대문명은 석유문명이며 석유가 없으면 현대 문명은 붕괴될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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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의 부작용 1.환경오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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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오염의 주범은 석유입니다. 석유가 연소될 때에 연기, 대기오염, 산성비 및 오존층 파괴에 이릅니다. 그렇다고 자동차를 타지 않을 수도 없고 공장을 돌리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석유의 수요는 해마다 증가하기 때문에 환경오염 문제도 더욱 심각해 질 것입니다. 세계 인구의 증가율에 따라 자동차의 수도 늘어나며, 산업생산도 더 늘어나게 마련입니다. 이에 따라 대기오염도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지구에 산소를 공급하던 브라질의 아마존강 유역의 정글이 농지로 변하고 남양군도의 정글들도 목재의 필요에 따라 계속 벌목함으로 모두 삭막하게 될 것입니다.
- 공해와 흉년
과학자들은 엘리뇨현상이 나타나면 기후의 이변이 일어나서 지구의 곳곳에 홍수도 나고 가뭄도 계속되며 흉년이 온다고 합니다. 1993년의 엘리뇨 현상이 나타났을 때에는 미국의 미시시피강이 범람하여 도시들이 홍수로 물에 잠기고 농작물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1995년에 또다시 엘리뇨 현상이 나타났는데 북켈리포니아 지역에 홍수가 나서 큰 피해를 당했습니다. 눈을 구경하기가 힘들던 골란고원에 1m 정도의 눈이 쌓이고 요르단, 시리아 이스라엘 등지의 사막성 기후에도 눈이 내려 대부분의 도로가 폐쇠되었습니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는 40cm가 넘는 눈이 내렸으며, 반면에 한국과 일본은 가뭄으로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엘리뇨 현상은 대개 폭풍우, 폭우, 한발 등 천재지변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농산물 작황에 큰 피해를 초래하여 전 세계적으로 곡물가가 올라갔습니다. 아시아 해안 국가들의 여름 저온, 대륙 지역에는 고온현상 등 여러 가지 피해를 가져옵니다. 엘리뇨 현상은 과거보다 자주 발생하고 있으며 과거 5년에서 7년 사이에 일어나던 엘리뇨현상이 5년에서 3년으로 짧아지다가 최근에는 2년으로 쫍아지고 있으며 그 위력이 과거보다 더 강력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미국, 카나다, 호주 같이 농산물을 많이 생산하여 세계에 보급하는 나라들이 엘리뇨 현상으로 대 흉작을 맞이 할 때가 올 것인데 그 때에는 그런 나라의 식량에 의지하던 나라들은 엄청난 재난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 석유 무기의 태동
현대 산업국가에서 석유는 동맥이요, 전략물자요 필수품이어서 석유 없이는 하루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석유는 농산물처럼 어느 나라나 생산하는 물질이 아니며 공장에서 만들어 낼 수도 없으며 또한 어느 나라도 영원토록 생산할 수도 없습니다. 석유매장량을 모두 생산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므로 석유생산국가들은 이 필수불가결한 석유가 모두 바닥나기 전에 그것을 정치, 외교, 경제, 국방 등의 힘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석유분쟁 역사를 간추려 보겠습니다.
- 제 1차 석유위기(1951년)
다니엘 예진 박사가 저술한 ‘프라이즈’에서 그는 제 1차 석유위기는 1950년에 이란 수상 모하메드 모사덱이 엥글로 이라니안(현재 영국의 HP 석유회사 전신)석유회사를 국유화하려는 데서 발생했습니다. 영국은 50대 50으로 수익금을 나누자고 했으나 거절당했고 미국이 중재했으나 듣지 아니했고 영국이 군대를 동원하여 석유회사를 지키려 했으나 미국이 반대했습니다. 이유는 소련이 이를 미끼로 이란에 군대를 파견할지 모르며 그렇게 되면 3차대전이 발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미국은 한국 전쟁에 많은 미군을 파견하여 많은 희생을 치르고 있던 때였으므로 더욱 반대했습니다. 영국의 엥글로 이라니안 석유회사의 이란 국유화는 중동의 많은 나라들이 석유회사를 국유화하는 모델 케이스로 석유역사에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 제 2차 석유위기(1956년)
제 2차 석유위기는 1956년에 일어난 수에즈 운하사건이었습니다. 수에즈 운하는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100마일의 긴 수로인데 19세기 때 프랑스의 페르데이난도 데 레셉스라는 사람의 개인의 의지와 기술력, 인맥을 동원한 사업으로 건설되었습니다. 그는 스페인 외교관시절 훗날 나폴레옹 3세의 황후가 될 소녀인 유제니와 깊은 친분을 쌓게 됩니다. 이어 이집트 영사로 오게 된 레셉스는 기사도 정신과 품위 있는 행동으로 금세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를 매료시키고, 알리는 아들인 사이드의 신체 단련을 레셉스에게 맡겼는데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 후 사이드가 이집트 총독이 되면서 수에즈 운하의 건설권을 따냈고, 그는 1859년에 착공하여 10년 후인 1869년에 완공했습니다. 프랑스가 주식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운영하던 중 이 운하를 영국이 침을 삼키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 당시 식민지인 인도에 왕래하는 무역선이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서 오는 것보다 이 운하를 이용하면 거리가 엄청나게 짧아지기 때문입니다. 희망봉을 돌아서 오면 11, 000마일이나 되는데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면 약 6,5000마일 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1875년에 행운이 날아들었습니다. 이집트의 지배자인 헤디비(Khedive)일가는 프랑스로부터 사들인 운하주식으로 인해 파산을 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가 소유하고 있던 수에즈 운하의 주식의 44%를 영국이 매입하게 되었는데 이 자금의 출처는 영국 로드차일드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영국과 프랑스가 수에즈 운하의 운영권을 가지고 공동으로 운영해 왔습니다. 그런데 제 2차 대전 후 유럽의 산업이 다시 부흥되면서 1948년부터 이 운하는 돌연 석유를 운반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선박의 전체 통과화물의 3분의 2가 석유였습니다, 수에즈 운하는 유럽의 동맥이나 다름이 없이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952년 이집트에 가말 아부델 낫셀 대령이 쿠데타에 성공하면서 이집트의 독재자로 군림합니다. 그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 하면 그 통행료를 가지고 국가 경제에 이바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소련을 가까이 끌어들이면서 아랍민족의 연합을 주창하면서 선동했습니다. 소련은 중동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하여 많은 무기를 이집트에 공급했습니다. 낫셀은 석유가 없으면 공업국의 기계들은 파괴될 것이니 우리가 소유한 석유를 무기로 사용하면 아랍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망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낫셀은 스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려고 했습니다. 낫셀의 이러한 계획을 알게 된 영국과 프랑스는 이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와 이스라엘은 1956년 10월 24일 파리에서의 비밀 회담에서 3국의 합동작전을 토의했는데 이스라엘은 시내반도를 공격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를 점령 하기로 했습니다. 결국 1956년 10월 29일에 이스라엘군이 시내반도의 이집트 군대를 공격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군의 보급이 늦어져서 운하에 진주가 수일간 늦어지면서 낫셀은 때를 놓치지 않고 수에즈 운하를 암석들과 시멘트 덩어리와 빈 병들을 선박에 실어 폭파시켜서 수에즈 운하를 메워 효과적으로 봉쇄하여 석유가 중동에서 유럽으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수에즈 운하가 봉쇄되니 유럽으로 수송되던 석유의 4분의 3이 제지를 당했습니다. 만일에 미국이 석유를 유럽에 공급해 주지 않으면 유럽은 겨울을 지낼 석유조차 없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에 석유 가격이 폭등하자 물가가 하늘이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습니다. 결국 11월 중순에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군대를 이집트에서 철수하고 유엔군으로 대치하면서 미국은 대서양을 건너 석유를 수송하게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석유 수송선박이 유럽의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석유를 각 나라에 분배하는 작업을 OEEC에서 주관해서1957년 봄에 제 2차 석유위기는 종결되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가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의 강대국이었으나 석유가 없는 나라는 강대국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 제 3차 석유 위기(1967년)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에 성공한 낫셀은 자신만만하여 자기 과신에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눈에 가시 같은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파멸시키려고 결심했습니다. 1957년 5월에 이집트에 주재하던 유엔군을 철군시키려고 이집트 군대를 다시 시내반도에 진주시켰습니다. 낫셀은 동맹군인 시리아를 시켜서 이스라엘에게 테러를 가하게 하고 요르단군을 낫셀의 지휘하에 두도록했으며 아카파만을 봉쇄하여 이스라엘에 석유 수송루트를 막으려고 했습니다. 모든 중동의 아랍국들도 이집트에 군대를 보내도록 계획을 수립하고 6월 4일에는 이집트와 이락과 요르단이 군사협정을 맺으니 이스라엘은 아랍 대군에게 포위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낫셀의 이스라엘 공격이 있을 것을 판단하고 6월 5일 새벽 8시에 선제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6일 전쟁입니다. 개전 수시간 내에 이집트와 아랍군의 공군을 지상에서 대파하고 시내 반도로 진격해서 이집트군을 붕괴시켰고 6월 8일에는 수에즈 운하까지 진격했습니다.이집트 군의 80%가 괴멸되었고 3일째 되는 날부터 요르단과 시리아군을 향하여 전진하니 양국군대는 공포 속에 전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후퇴해 버렸습니다. 6일 후에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고 휴전에 들어갔습니다. 6월 6일인 전쟁을 시작한 이튿날에 아랍 석유 생산국들의 석유 상들이 이스라엘의 우호국인 미국과 영국과 서독에 대하여 석유금수조치를 취했고 사우디 아라비아 석유상은 미국에 한 방울의 석유도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아랍산유국들이 석유금수 조치를 취한 것은 아랍민족의 단결을 과시한다는 대의명분이었으나 실제로는 국내의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즉 석유 노동자의 파업, 폭동, 파괴행위, 그 위에 정치적인 타격이 가중되었습니다. 아랍 석유 산유국들은 6월 8일부터 석유생산을 40%감했으며 이란의 거대한 아바단 석유회사가 폐쇄되고 그 밖에 수송방해에 의하여 아랍의 석유공급량이 하루 600만 배럴씩이나 감소했습니다.
1967년의 석유위기는 6월 하순에는 더욱 심각한 사태가 발생했는데 산유국인 나이지리아에서 내전이 일어나서 생산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동 각국의 위기가 안정되면서 석유위기는 예상했던 것보다는 신속히 진정되었고 이 위기에 손해를 본 나라들은 석유 금수에 참여했던 나라들입니다. 그들은 석유수출에서 얻을 수 있는 돈이 들어오지 않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결국 9월에 영국 미국 서독에 대해 감행했던 석유금수는 해제되고 산유국들은 경쟁적으로 생산을 증가했기 때문에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 석유값이 떨어졌습니다.
- 제 4차 석유위기(1973년, 제 4차 중동전쟁)
1973년 10월 6일은 이스라엘의 최고의 명절인 대속죄일이었습니다. 정부고관에서부터 군 장성과 전 국민이 이 명절을 지키기 위해 축제의 분위기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2시경 갑자기 이집트 공군기 222가 발진하여 시내반도의 이스라엘 사령부와 군사기지를 폭격하는 동시에 약 3,000문의 야포가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시리아군 전투기들도 이스라엘 북부 국경지대에 군사시설을 공격했으며 동시에 약 700문의 포문을 열고 포격했습니다. 이것이 제 4차 중동전쟁이라고 불리는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중동 전쟁 중에서도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었으며 미국과 소련 초강대국들이 서로 무기를 제공한 전쟁이며 중동 특유의 석유가 무기로 등장한 전쟁이기도 합니다. 이집트와 시리아군은 소련에서 공급받은 최신 무기들로 무장되어 있었으며 또한 선제 기습공격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소련의 대량 군수물자 보급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에게 군수물자를 보급해 줌으로써 이스라엘의 우방으로서 이스라엘에 군수물자를 보급해 주었습니다. 10월 16일에 아랍의 5개 산유국들은 석유가격을 다시 70% 올리기로 결의해서 역사상 처음으로 아랍국들이 석유 가격의 결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전에는 전쟁에서 장군들과 장병들이 전투를 했으나 이제는 석유가 장군처럼 군림하여 전쟁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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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무기의 영향
1973년 석유전쟁은 전 세계적으로 여러 가지 영향을 주었습니다.
- 전 세계적인 불경기를 초래했습니다.
1973년에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 가격을 조종하는 권리를 가지고 자기들 마음대로 올렸습니다. 석유 감산의 영향은 석유가격의 상승이었고 석유가격의 인상은 엄청난 물가의 상승을 가져왔습니다. 석유가 필수품이기에 모든 물가의 상승을 가져왔습니다. 공장의 물품생산, 생산된 물건의 운반, 교통, 시민의 가정생활에 이르기까지 석유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결국 석유가 현대 공업국가들의 경제성장의 정지, 경기의 후퇴, 인플레이션, 국제 금융의 타격, 실업률의 상승 등 엄청난 경제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 동맹국 간의 분열
석유 금수가 시작되자 국제적으로 경제적인 문제가 생겼고 경제문제는 정치적 문제가 되었고 이 정치적인 문제도 국제적인 문제로 발전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랍 산유국들이 미국과 미국의 중동정책을 지지하는 모든 나라에 석유를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동맹국들은 미국의 중동정책을 지지하고 석유금수를 감수하든지 아니면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무시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취하여 아랍을 지지하여 석유를 보급받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했습니다. 특히 수에즈 운하를 포기하면서 미국과 유럽은 정치적으로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설명한 대로 유럽동맹의 궁극적인 목적은 미국과 소련이 대결하는 국제 정치적인 상황에서 유럽은 독자적인 노선을 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아랍의 석유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의 석유탱크도 비어있습니다. 유럽은 독자적으로 석유문제를 해결하는 길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EC는 동맹국인 미국의 중동정책에 반기를 들고 중동에서 이스라엘을 지지하지 않고 아랍국들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아랍국가들은 일본에도 동일한 위협을 가했고 미국의 중동정책을 지지한다면 석유를 팔 수 없다고 했습니다. 73년 이전에는 돈만 있으면 석유를 언제나 살 수 있었으나 석유가 무기가 된 상황하에서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모두 자국의 생존을 위해서 미국을 고립시키고 자기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석유의 무기화는 미국의 동맹국간의 분열을 가져오게 함으로써 국제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석유와 국제 금융가와의 관계
이제 까지는 표면적으로 나타난 역사적 사건들을 진술한 것이요, 이제부터는 표면적으로 나타난 눈에 보이는 사건들이 발생한 근본원인이 무엇이며 왜 그런 사건들이 일어났는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유전의 주인들이 아랍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국제 재벌가, 국제 금융가들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실제 주인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자신들의 정체가 알려져서 이로울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로스차일드는 자신의 재산 보전을 위해 이스라엘을 만들었으며, 중동문제는 로스차일드가 중동에 있는 자기의 재산을 영원히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입니다. 중동문제는 이들이 중동의 기름을 자신이 원할 때면 언제든지 손쉽고 안전하게 갖고 나올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부산물에 불과합니다.
- 영국의 석유시장 선점 작전
현대 경제에서 석유는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 금융가들은 세계 굴지의 유전을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 석유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전쟁을 치르고 목숨을 잃는 등 인류의 운명이 좌우되고 있습니다. 국제 금유가들은 석유와 금융을 하나로 묶어 정책을 펴나감으로써 사실상 많은 국가의 영토와 국민들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석유는 지금으로부터 약 1백년 전인 180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등잔불에 쓰는 것 외에는 별로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1883년에 다임러(Gottlieb Daimler)라는 사람이 석유를 사용하는 내연 기관을 발명하고, 특히 자동차 엔진에 석유가 쓰이면서 그 가치가 치솟았으며, 그에 따라 정치와 경제의 판도마저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영국의 제독이었던 피셔 경(Lord Fisher)이 처음으로 군사적 목적을 위한 석유의 중요성을 자각하면서 전무하다시피 한 영국이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중 오스트레일리아의 윌리엄 다시(William Knox D’Arcy)가 지금의 이란 지역인 페르시아만 북쪽에서 유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란의 샤로부터 유전 개발 권리를 2만 달러에 사서 판매액의 16퍼센트에 해당하는 로열티를 주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이 권리는 1961년까지 지속되어, 윌리엄 다시가 죽더라도 그가 지명한 사람이나 유산 상속자에게 그 권리가 계속 이양되도록 계약을 맺었던 것입니다. 이에 영국 정부는 유대인 라일리(Sidney Reilly-원래는 러시아 오데사 출신으로 본명은 조제비치 (Sigmund Geogjevich)를 목사로 가장시켜 중동에 보내어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윌리엄 다시를 설득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전권을 가진 그의 폐르시아 석유 회사(Persian Oil Company)를 기독교 기구의 산하 조직인 ‘앵글로-페르시아 석유 회사(Anglo-Persian Oil Company)에 이양할 것을 종용하여 인계받았습니다.
그 후 1913년 해군장관으로 있던 윈스턴 처칠이 정부를 대신해 비밀리에 그 소유권을 인수받아 현재의 브리티시 페트로리움 사(British Petroleum:BP)가 된 것입니다. 그 밖에도 영국은 세계 석유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유럽과 중동에서 많은 마찰을 일으켰습니다. 독일이 베를린에서 바그다드까지 철로를 건설하면 영국의 중동 발판에 위협이 될까 봐 발칸, 터키, 불가리아에서 전쟁이 일어나도록 배후 조정을 해 이 철도건설을 방해했으며, 쿠웨이트의 기득권을 이용해 바그다드에서 페르시아만까지의 철도건설을 방해 했으며, 영국군대와 부패한 아랍 지도자들을 이용해 아랍국가들을 장악하고 석유공급을 확보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때부터 시작된 중동 전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그 지역에 세워놓은 것도 석유 때문입니다.
영국이 소유한 석유회사 중에 셸(Royal Dutch Shell)이라는 대기업이 있습니다.이 회사는 네델란드 태생의 헨리 데터딩 경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셸은 원래 로열 더치 석유회사와 셸 트렌스포트 앤드 트레이딩 회사(Shell Transportand Trading Co.)가 합병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이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영국정부가 임명하고 있는데 미국의 스탠더드 오일 사(록펠러 가문의 회사)에 대항하도록 영국 정부가 비밀리에 뒷받침하여 거대한 회사로 탈바꿈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네델란드 여왕의 남편이자 빌더버그 그룹 창설의 공로자인 번하트 왕자도 셸의 대주주가 되었습니다. 세계의 여러 석유 회사들이 군림하여 서로 주도권쟁탈전을 벌이던 중 1920년대 후반에 비밀 카르텔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카릍텔을 가리켜 7자매(Seven Sisters)라고 부르는데, 이7자매는 하나의 회사처럼 행동하며 세계의 석유 가격을 조종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에 속한 회사는 셸, 앵글로-이란니안, 엣소/엑손(Esso/Exxon Standard Oil of New Jersey), 걸프(Gulf), 소코니-배큠(Socony-Vacuum Oil, Mobil의 방계), 소칼(SOCAL, Standard Oil of California), 일명 칼소(Calso), 텍사코(Texaco)등입니다. 이것은 마치 금융 산업에서 록펠러계의 체이스 은행과 로스차일드 계의 맨해튼 은행이 합병했듯이, 석유 산업에서도 록펠러 계의 미국회사와 로스차일드 계의 영국회사가 힘을 합쳐 세계 주도권을 쥐었음을 의미합니다.
1952년 이란에서는 민족주의 지도자 모사데가 수상 자리에 오르면서 석유회사를 국유화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이란에 대해 경제 봉쇄령을 내렸고, 영국 은행에 있는 모든 자산을 차압하고 이란의 석유를 불매함은 물론 수송까지 금지했는데 이른 물론 7자매가 집단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영국의 비밀 첩보대와 미국의 CIA는 합동으로 ‘에이잭스 작전(Operation AJAX)’을 펴서 1953년 모사데를 제거한 뒤 미국과 영국의 꼭두각시였던 샤를 권자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일단 권좌에 오른 샤는 자국을 위해 석유의 이권을 더 차지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자 결국 그가 득세한 지 25년 후인 1979년 영국의 비밀 첩보대와 미국의 CIA는 대중봉기를 일으키도록 공작하고 그 동안 키워온 호메이니를 대신 권좌에 앉힌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도 중동의 회교들이 서로 분쟁을 일삼는 것은 서로 갈라 놓아 다스리기 쉽도록 하는 엘리트들의 Divide and Rule의 원칙에 의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란과 이스라엘은 서로 원수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양쪽의 고위층은 모두 엘리트들의 지령으로 함께 일하는 동지로 이를 테면 연극을 할 뿐입니다. 국민들만 연극 각본에 의해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석유회사와 정부, 정보부, 은행, 언론, 그 외 다국적 기업들은 분리시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유주가 모두 동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정보부가 석유회사를 위해 일한다고도 할 수 있고, 석유회사가 정보부를 위해 일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2) 유테인이 점령한 석유자원
1999년 12월 1일에 미국 랭킹 1위 석유업체인 엑슨(EXXON)과 2위인 모빌(MOBILE)이 합병을 선언했습니다. 엑슨모빌은 단번에 유럽의 브리티시 석유와 로열더치셸을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랐습니다. BP도 미국계 아모크와 합병을 발표했지만 엑슨모빌의 덩치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 두 회사는 본래 스탠다드 오일이란 하나의 거대 독점 회사였는데 셔먼 반 독점법에 의해 강제로 분할되었다가 87년 만에 재 결합하게 된 것입니다.
엑슨과 모빌이 합병하기 이전에 세계 석유업계는 7개의 주요 석유회사들이 장악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들을 줄여 메이저라고 불렀고 7개 회사를 지칭해 세븐 시스터즈라고 얘기 했습니다. 미국의 엑슨, 모빌, 걸프, 세브론, 텍사코 등 5개 사와 영국의 브리티시 석유와 영국-네델란드 계열의 로열더치셀 등 7개사였습니다. 대규모 자본을 앞세워 석유의 생산, 유통, 정제, 판매 등을 통합한 일관조업회사로서 세계 석유산업을 지배해 온 이들 7대 메이저는1965년에는 하루 1,692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 서방측 세계 원유생산량의 68% 기록한 바 있으며, 한때 중동 석유생산의 99% 이상을 장악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물론 유럽의 메이저들도 모두 유태계 자본이라는 점과 로열더치셸은 유럽의 최대 갑부 유태인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소유이고 국영이었던 BP도 유테계 자본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3) 1970년 대 석유파동을 조장한 7자매
엘리트들이 일단 카르텔을 조직하고 전 세계의 오일 헤게모니를 차지한 뒤 그들이 할 일은 석유 파동을 만들어 돈을 왕창 버는 것입니다. 그 공작에 앞서 금융 엘리트들은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세계적으로 미국의 달러를 기본으로 무역 거래를 하기로 합의하고, 금 1온스당 35달러를 책정하여 언제든지 금으로 바꿀 수 있도록 했습니다. 1970년에 들어서자 미국의 금이 부족하기 시작하여 세계적으로 통화되고 있는 미국달러로는 도저히 원하는 만큼 금으로 환원시킬 수가 없어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닉슨은 달러로 금을 바꾸는 제도를 파기시켰는데 이로 말미암아 그 결과로 세계적인 환난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유럽에서 유통되던 미화를 금으로 바꿀 수 없게 된 상황에서 그들은 런던 금융센터를 기점으로 한 ‘유로 달러’를 만들어 내고 미국 돈의 가치가 엄청나게 떨어진 틈을 타서 유로 달러로 막대한 이익을 챙겼습니다.
1973년 5월에 빌더버그 그룹은 살초바덴이란 섬에서 회의를 열었는데 여기에 참석한 명단 중에는 네델란드 여왕의 남편 셸의 회장인 번하트 왕자, 헨리 키신저, BP의 회장인 드레이크 경, 셸의 사장 와그너, 체이스 맨해튼 은행의 데이비드 록펠러, 브레진스키, 로스차일드 남작 등인데, 이 회의에서 미국의 오일 경제학자인 레비는 세계 석유값을 4백 퍼센트 올리자는 의안을 제출하여 합의를 보게 하고, 아랍 산유국들에게 다음과 같이 제의했습니다. 그 제의는 생산지에서 배럴당 미화 25센트였던 원유값을 대폭 상승시키는 것이며, 이에 따른 이익의 차액은 그들이 지정하는 은행에만 입금하고, 그 예금액에 대해 10퍼센트라는 고액의 이자를 지불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산유국들은 이롭기만 한 그 제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5개월 후인 1973년 10월 이집트와 시리아는 승산이 없는 줄 알면서도 다만 원유값을 올리는 핑계를 만들기 위해 이스라엘을 침공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1973년의 ‘욤 키퍼르 전쟁’이었습니다. 그러자 전 아랍 국가들은 석유생산을 줄이면서 가격을 올려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에 석유공급을 중단하여 세계 석유 파동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그 당시 배럴당 1.40달러의 세계 석유 가격이 10년 후인 1983년에는 32달러로 폭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때에 전세계적으로 수 많은 실업자들이 양산되었고, 조업단축 등 여러 종류의 어려운 경험을 했으며,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석유에 의존하는 생활 문화를 만들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 3세계 국가들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외채를 얻게 되었고, 더욱 빈곤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국가들은 빚을 못 갚는 대신 자국의 자연 자원을 엘리트들에게 바치게 되었고, 다시 석유를 마음대로 살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은 어려웠던 과거를 잊은 채 석유를 흥청망청 소비하게 된 것입니다.
욤 키퍼르 전쟁을 만들어낸 사람은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 겸 국가 안전고문이던 헨리 키신저였습니다. 그는 당시 미국 주재 이스라엘 대사였던 디미츠(Simicha Dimitz)를 통해 아랍 국가를 이간질하여 전쟁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으며, 일단 전쟁이 일어나자 중재를 한답시고 순방외교를 하여 서로 화해시킨 다음 전쟁을 종결지었습니다. 그 공로로 키신저는 1973년 노벨평화상을 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짓은 하나의 대표적이 예에 불과합니다. 엘리트들은 항상 세계 여러 곳에서 분쟁을 고안하여 일으키는 당사자들이지만 언제나 책임을 엉뚱한 쪽에 돌리는 것이 그들의 특기입니다. 이 당시에도 책임은 아랍 석유 생산국들에게 돌아가, 모든 사람들이 그 국가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습니다.
1972-1973년의 사건을 다시 처음부터 정리해 보면 엑슨을 위시한 미국의 큰 회사들이 미국 국내 원유의 재고량과 공급량을 위험한 수준까지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산유국들이 미국에 석유 공급을 차단하기도 전의 일입니다. 그래서 1973년 말에는 석유 가격이 하늘로 치솟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계획했던 주요 인물은 닉슨 행정부의 에너지 담당 참모들, 즉 키신저, 슐츠, 에릭만 삼총사였습니다. 이들은 미국의 에너지 정책을 완전히 조종했을 뿐 아니라 빌더버그 회합의 4백 퍼센트나 되는 가격 인상 결정을 받들어 욤 키퍼르 전쟁을 일으키도록 만들었고,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 엠바고(특정 국가와 직접, 간접 교역, 투자, 금융거래 등 모든 부분의 경제 교류를 중단하는 조치) 작전을 펼쳐 그들의 모국인 미국의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조국이나 국경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비밀목적만을 위하는 자들입니다.
4) 1991년 걸프 전쟁과 석유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나 그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제임스 베이커는 모두 석유업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대로 석유회사의 주주이며, 이들을 움직이는 국제금융 엘리트들과 함께 정가를 주름 잡으며 세계 역사를 만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그룹뿐만 아니라 모든 석유회사들은 항상 기름값을 올리는 데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기름값을 올리는 데는 전쟁이 아주 긴요한 도구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만들기 위해 전 세계를 다니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이들에게는 참으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석유의 창고인 중동의 기름 생산을 분할하면 할수록 그들은 점점 이익을 많이 챙기며, 아랍국가들이 갈라져 서로 싸움을 하고 있으면 그들의 수입은 더 늘어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도 여러 면으로 덕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중동이 서로 이권다툼을 하고 전쟁을 하도록 연구하고 있습니다. 중동의 싸움은 신세계 질서 계획에 따른 세계 단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분할통치’ 즉 가를 수 있는 대로 갈라서 통치하기 쉽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에 딱 맞는 것입니다.
1970년 7월 런던의 랭커스터하우스에서 NATO정상회담이 있었습니다. 부시 미 대통령도 그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틀림없이 이 회의에서 걸프전쟁을 계획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데, 그 회의에서 원래 NATO의 영역인 북대서양이 아닌 중동 지역에도 NATO군을 출동시킬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로 인해 NATO군은 세계의 군대 또는 세계 단일의 UN군으로 일보 진전한 셈입니다. 이것을 NATO에서는 영역 외 배치라고 부르며, 소위 런던선언이라는 이 정상회담에서 결정한 내용에 따르면 NATO는 옛 소련 동맹국과 긴밀한 협조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NATO조직 안에 옛 소련의 동맹국들을 차례로 가입시켜 거대한 군사 조직으로 만들고, NATO군을 점차적으로 확대하여 유럽이나 북대서양의 범위를 벗어난 세계의 군대로 변모시킨다는 것입니다.
걸프전쟁은 이락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일어났습니다. 원래 이락과 쿠웨이트는 하나의 나라였는데 옛날 식민지 시대에 영국과 국제 금융 엘리트들이 이 지역을 차지하고 독립시켜 주면서 두 나라로 쪼개 통치자를 각각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분할통치 방식을 채용한 것입니다. 1990년 8월 16일자 [월스트리트]를 보면, 1968년에 미국의 CIA는 이락의 바트당(Bart Party)을 지원하여 정권을 잡도록 하였는데 사담 후세인이라는 독재자를 국가 원수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후세인은 CIA를 자기 은인이기도 하지만 속에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친구이자 항상 자기를 지원해 주는 듬직한 상대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과 영국의 정보 조직에서 이란의 호메이니 정권이 혁명을 일으켜 국가 질서가 엉망이니 이 기회를 틈타 쳐들어가면 곧 이란을 삼킬 수 있을 것이란 정보를 후세인에게 계속 던져 주었습니다. 후세인은 이 말에 솔깃하여 결국 이란과 전쟁을 벌였으며, 이란은 미국, 영국이 알려준 대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어서 결국 양쪽 다 전쟁 때문에 8년이란 긴 세월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호메이니가 혁명을 일으키기 전 ‘샤’를 권좌에 앉힌 것이 CIA였고, 샤에게 쫓겨 프랑스로 망명을 간 호메이니를 돌봐준 것도 CIA였던 사실을 상기해 보면, 이락에서 일어나는 후세인을 감언이설로 꾀어 이란과 이락을 싸움을 붙여놓고 8년 동안 무기를 잘 팔아먹은 데다가 기름장사로 돈도 벌고, 은행들은 군자금을 빌려 주어 이렇게 저렇게 돈을 흠뻑 빨아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어서 기진맥진한 후세인이 돈을 밝힐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쿠웨이트를 탐내게 되었고 그것을 모를 리 없는 미국과 영국은 그의 욕심을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써먹을 작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부시 대통령은 1990년 7월 16-17일 이락군대가 쿠웨이트 국경에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지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7월 25일에는 주 이락 미국 에이프릴 글래스피 대사가 바그다드에서 후세인을 만나 부시 대통령의 훈시를 전달합니다. ‘부시 행정부는 아랍국가들 사이의 분쟁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귀국과 쿠웨이트와의 국경 분쟁 같은 것 말입니다. 우리 대통령은 귀국과 더욱 두터운 유대관계를 갖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후세인은 미국의 이런 언질 때문에 더욱더 안심하고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것입니다.
한편 글래스피 대사가 후세인을 만나기 전에 백악관에서는 소련의 고르바쵸프 대통령에게 동의를 구하는 합의서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내용은, 미국이 이락을 침공해도 관여치 않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쿠웨이트 국경에는 이락 군대가 계속 집결하여 7월 30일 경에는 약 10만 명으로 추정되는 이락군대가 집결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8월 2일 이락은 마침내 쿠웨이트를 침공했고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게 후세인의 다음 공격은 사우디가 될 것이라고 겁을 준 다음 미군을 사우디에 집결시켰습니다. 그리고 세계에 대해서는 미국은 쿠웨이트의 일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사우디에 미군을 집결시킨 것은 사우디를 방어하기 위해서라 하면서 미국은 사우디 아라비아와 독일, 일본에게 비용을 분담하자며 돈을 내놓으라고 성화를 부렸습니다.
부시는 후세인을 제 2의 히틀러라고 부르며 2차 대전 때는 히틀러가 점점 커지는 것을 혹시나 하고 구경만 하다가 결국 큰 대가를 치렀지만, 제 2의 히틀러에게는 2차대전 때처럼 실수하지 않을 것이며 그가 더 커지기 전에 부숴야 한다고 점점 강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8월 23일 스코크로프트는 다음과 같은 의미있는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적대 관계에서 벗아나면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질서인 신세계 질서의 단계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이라고 믿는다’ 했습니다. 그때부터 부시를 비롯해 영국의 대처 총리,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 등 세계 정치 지도자들이 신세계 질서라는 용어를 공공연하게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시의 포석을 대처와 미태랑이 찬성하면서 UN에서 승인을 받게 되고, 11월 8일에 미군을 증파하여 사우디에 집결한 미군은 방어에서 공격으로 방향을 전환했고 1주일 후에 부시가 유럽과 중동을 방문하여 시리아 아사드 대통령으로부터 2만 명의 병력을 지원받아 1991년 1월16일 이락을 침공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한달 전이 1990년 12월 15일에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은 ‘새로운 쿠웨이트에서 이 미 육군 민간업무 명령 제 352호’라는 문서에 서명한 일이 있는데, 거기에는 쿠웨이트를 어떻게 완전히 파괴할 것이며, 어떻게 유전에 불을 지르고, 어떻게 다시 전보다 더 좋게 재건할 것이며, 더욱 강력한 독재 체제를 어떻게 건설한 것인가에 대한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으며 화재가 난 유전을 진화하는 일에 참여할 회사와 재건 공사에 참여할 회사, 그리고 전후에 미국이 접수하여 운영할 아랍 회사들의 명단까지 적혀 있었습니다. ‘제 352호’서류는 이제 비밀 해제가 되어 누구나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락이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유전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유전 확보를 둘러싼 최근의 분쟁
엘리트들은 근래에는 어떤 일을 벌리고 있는가? 1888년 러시아는 미국의 석유 생산량을 능가한 결과 1907년부터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약 10년간 러시아는 눈부신 경제성장을 했습니다. 이 때에 공산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국가 건설 자체의 목적이 중동의 석유를 확보하는데 있었으며, 이 때문에 로스차일드는 지중해의 아시켈론에서 아카바까지 운하를 건설하고 송유관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이처럼 석유는 세계 정세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1990년대 말과 2000년 초에 있었던 러시아의 체첸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그 동안 중동에 석유가 집중적으로 많이 있었는데 이제 얼마 있으면 석유가 고갈될 것을 알고 다른 곳에서 석유자원을 확보하려는 공작을 합니다.
1백년 전에 러시아가 주력을 쏟아 유전을 개발하려던 곳은 카스피해 지역의 구심점인 현재의 아제르바이잔의 바쿠라는 곳입니다. 그곳의 매장량은 석유 2천억 배럴, 천연가스가 24조㎥이며, 값으로 치면 4조달러가 넘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유전개발과 수송수단은 아직 완전히 개발되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파이프라인은 북쪽의 우크라이나를 통해 곧 바로 구 소련의 중심지로 직행을 했지만, 엘리트들은 이제부터 서서히 그 방향을 바꾸어 러시아의 영역을 거치지 않고 흑해와 지중해와 페르시아만으로 뽑아내려는 것입니다.
1999년 11월 18일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에너지 장관 리처드슨이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아, 타직스탄, 터키의 대통령들과 자리를 함께하여 24억 달러 규모의 파이프 라인을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터키의 세이한까지 설치하겠다고 발표했던 것입니다. 사실상 구 소련이 붕괴 된 이후 미국과 유럽의 11개 석유회사들의컨소시엄은 이미 이 지역 석유산업의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습니다. 얼마 전 러시아 정부는 미국이 체첸 분리 운동을 직접 사주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돕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국방장관 세르게예프는 코카서스 산맥 북단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미국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석유를 둘러싼 이러한 내막으로 러시아는 체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무력공세를 펼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카스피해 지역의 원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 주변 국가들을 여러 개로 나누는 것이 엘리트들에게는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래야 조종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아, 체첸, 카작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르메니아 등의 지역에 바람 잘 날이 별로 없습니다. 러시아와 이란 또는 터키가 그 지역국인데 그 중에 엘리트들이 가장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나라가 터키입니다. 그런 연유로 송유관이 터키를 통과하도록 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넷째 인을 떼심으로 청황색 말이 뛰는데 넷째 인은 자원전, 에너지 전임을 확연히 보여 주고 있으며, 중동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의 배후에는 석유를 확보하려는 국제 금융 엘리트들의 음모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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