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다섯째 인을 떼심(순교자들의 기도) 계시록 6:9-11

 

 

“다섯 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제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시록 6:9-11).

기독교는 피의 종교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사해 주셨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피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헤아릴 수 없는 짐승들이 피를 흘리며 희생제물이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도 필요하다면 피를 흘려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듯이 우리도 주님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할 때면 피를 흘릴 각오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너희가 내 제자가 되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피를 흘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구약시대 아벨을 비롯한 순교는 신약에서 세례 요한, 야고보, 스데반을 비롯해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과 사도 바울을 비롯해 로마황제 300여년 동안 로마통치 모든 지역에서 핍박과 박해가 있었으며 수 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했습니다. 또한 가톨릭 1260년 동안의 박해 동안에 수천만의 성도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뿐만 아니라 주님 지상재림 하시는 그날까지 이 땅에서는 박해가 계속될 것입니다.

  1. 본문 해석

 

  • 순교자의 정의

순교자는 천년왕국에서 최고의 영광을 받는,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고, 하늘나라에서는 왕족들이 사는 새 예루살렘성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의 죽음을 순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목숨 걸고 믿음으로 지키다가 죽임을 당한 자의 죽음을 말합니다. 계시록 6:9에,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라 했습니다. 구약의 경우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목숨 걸고 증거하다가 죽임을 당한 자의 죽음을 말합니다. 복음을 전도하고 선교하면서 복음 증거하다가, 외치다가 죽은 죽음을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계명, 법도, 교훈들을 준수하려 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경우였고 신약시대에서는 전도하다가, 선교하다가 복음 증거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셋째는 적그리스도와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당한 죽음을 말합니다. 계시록 20:4에,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했습니다. 이 말씀에 순교의 정의 세 가지가 다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순교를 한 사람들이 부활해서 주님과 함께 지상 재림하고 천년 동안 주님과 더불어 왕 노릇할 것이라 했습니다.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하는 자는 일반적으로 모든 부활한 성도나 살아서 변화되어 휴거된 자들이 지상 재림하여 천년왕국에서 왕 노릇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 가지 순교에 해당하는 순교자들만 왕노릇하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 하나님의 제단아래서 부르짖는 순교자들의 모습

여기 말씀에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하나님의 제단 아래에서 부르짖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라 하지 않고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라고 합니다. 왜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라고 하지 않고,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부르짖는, 그런 모습을 여기에 나타내고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이 순교자들은 부활체를 입지 못한 채 예수님의 공중강림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상태를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공중강림 하실 때를, 지상에 살아있는 우리 만이 아니라, 우리보다 더 애타게 기다리는 자들은 먼저 죽어 영혼으로 천국에 가 있는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공중강림하셔서 부활해서 부활체로 영원히 살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의 공중강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공중강림과 성도들의 휴거의 시기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다섯째 인을 떼실 때까지도 천국에 가 있는 자들의 영혼들이 아직도 부활체 몸을 가지지 않고 영혼 상태로 있는 것을 볼 때에 이때까지도 휴거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대주의 전 천년설 주장자들의 주장대로 계시록 4장의 ‘이리로 올라오라’ 한 그 대목이 환난 전에 성도들의 휴거가 있을 것이란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제단 아래서 영혼들이 부르짖기를 어느 때까지 우리를 신원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부르짖었을 때에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아직 잠시 동안 쉬고 있으라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너희들은 잠시 제단 아래 있으라 했습니다.

이 말은 언제 우리에게 부활체를 입혀서 완전한 구원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날이 오겠습니까 하고 부르짖습니다. 이 때에 주님의 대답은 아직도 순교자의 수가 차지 않았기에 그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 했는데, 그 수가 언제 차게 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암시적인 구절이 계시록 20:4에,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에서 순교자들의 수가 차는 시기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도 하지 않고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 않겠다는 자들이 순교함으로써 그 순교자들의 수가 채워지는 것입니다. 전 3년 반 시기에 표 받지 않으려던 자들이 엄청나게 순교하게 될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휴거 사건은 적어도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므로 죽게 되는 그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3) 왜 순교자들의 귀한 영혼을 번제단 아래 두셨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구약은 신약의 모형이요 그림자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죄제물을 반드시 번제단 앞에서 죽이는데 그 피는 제단 앞에 쏟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지은 죄를 위하여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모든 피를 쏟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누구든지 예수의 십자가 피 공로를 믿기만 하면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히브리서 9:11-14에, ‘그리스도께서 장례 좋은 일에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했습니다. 이러므로 구약성경의 제사제도의 배경을 생각해 볼 때에 제단 아래 있는 순교자들은 마치 하나님의 번제단 앞에서 산 제물로 희생된 것으로 간주해 주시는 일과 똑같습니다.

순교자들이 순교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피를 흘려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같이 간주해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제단 아래의 거룩한 처소에서 잠시 동안 안식하도록 하나님께서 그곳에 안식하도록 배려해 주신 것입니다. 왜 순교자들의 귀한 영혼을 번제단 아래 두셨을까 하는 의문이 풀려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순교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과 같은 것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순교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가장 거룩한 곳인 하나님의 제단 아래에서 부활하기 전까지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왜 순교자들은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그들의 피를 신원하여 달라고 하는가?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더 이상 말이 나타나지 않고 순교자들이 하나님께 심판을 호소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순교자들이 이 땅에서 계속되는 박해와 고난 속에 사는 믿음의 형제들을 볼 때에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 났기 때문에 심판을 호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좌로부터의 음성은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 땅 위에 고난이 계속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란 네 말이 뛰는 동안과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7년 환난 동안에 있을 대 박해, 즉 주의 재림 전에 우리가 살고 있는 말세에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박해와 환난 중에 순교할 순교자들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특히 첫째 인을 떼시는 그 때부터 주님 재림 전까지의 기간 동안에 세계 도처에서 많은 환난과 박해가 있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18세기부터 기독교 세계 선교운동이 시작되면서 수 많은 선교사들과 영국과 유럽 그리고 미국에서 복음을 전하려는 선교사들이 세계 여러 나라에 파송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어디를 가든지 어려운 시련과 환난과 박해와 질병에 시달리면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선교사들에 의해 믿게 된 수 많은 초대 신자들도 도처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한국의 초대 교회사를 보면 한국 천주교 신부들과 성도들이 엄청난 박해를 받아 순교하였습니다. 개신교의 초대 교회의 박해사도 1906년의 한국에 선교하려던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가에서 첫 순교의 피를 흘린 후에 계속적으로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음모와 신사참배 강요 등 노골적인 박해로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의 박해로 인하여 그리고 6.25동란을 통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에 의하여 참으로 많은 성도들의 피가 한국 땅을 적셨습니다. 이것은 한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본, 중국, 베트남, 인도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기독교 선교사들과 초대 성도들이 엄청난 고난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특히 19세기 초에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그들은 종교를 아편이라고 선전하면서 교회를 혁명의 타깃으로 정하고 박해하여 로마 시대 이후 기독교에 대한 가장 혹독한 박해를 가했습니다. 풀러 신학교 선교역사학 교수인 랄푸 윈터 박사는 그의 논문에서 1900년부터 1975년까지는 아무리 적게 추산한다 해도 순교자들이 2,500만 명은 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지구 상에서 더욱 광범위한 지역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화될 것입니다. 따라서 순교자들의 숫자도 엄청나게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이 땅에서 순교자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계시록 6:10에서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제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나이까 하니’ 했습니다. 이것은 순교한 성도들이 하늘 보좌 앞 제단 아래에서 외치는 소리입니다.

십 여년 전에 내 동생이 이 구절을 보면서 질문하기를 천국에 가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원한에 사무처서 복수를 해달라고 호소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내 동생이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이 계시록 6:10말씀의 무드를 말하자면 슬프고 괴롭고, 억울해서 원한에 찬 복수의 호소를 하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 ‘제단 아래’는 천국 하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천국은 눈물이 없는 곳이요 슬픔도 괴롬도 없는 기쁨과 환희와 즐거움만 있는 곳입니다. 계시록 7:14-17에서 환난 가운데서 박해로 인해 순교한 영혼들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찌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한 데서 알 수 있습니다. 계시록 6:10과 계시록 7:14-16은 같은 환경입니다. 다 같이 큰 환난을 통과하면서 순교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들이 천국의 하나님 보좌 앞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밤낮 하나님을 섬기며, 승리의 기쁨과 환희에 찬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땅 위의 환난 가운데 있는 자들이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는 사실을 보면서 박해자들에 의해 고통 당하는 자들을 구원해 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고 죽어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땅 위의 자녀들을 위해 계속 중보기도 하시듯이 천국에 들어간 영혼들도 온 성도들의 완전한 부활이 있기 까지 천국에서 지상의 성도들을 위해 계속 기도하는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브리서 11:35-38)’

 

  1. 핍박의 역사

선과 악의 대 쟁투가 걸려 있는 이 지구의 세상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와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과 사단이 인간 역사를 다루는 방법의 현저한 차이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에 자유의지를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셔서 인간 스스로 자원해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따르도록 만드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우리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모든 일을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시며 무슨 일이든지 우리를 억지로 강요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비록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섬기는 것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 할지라도 그분은 결코 인간의 양심을 강요하여 억지로 하나님을 믿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사단의 방법은 이것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는 항상 인간의 양심을 억압하고 강요하고 위협하여 어떤 것이든지 강제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 핍박의 기원

핍박은 항상 죄의 역사와 더불어 병행해 왔습니다. 죄가 들어와 선과 악의 투쟁이 시작된 이래 이 지구에는 항상 끊이지 않는 전쟁이 있어 왔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의와 불의 사이에, 사랑과 증오 사이에, 그리고 거짓과 진리 사이에 존재하는 마찰이었습니다. 제일 처음 나타난 핍박의 정신은 가인과 아벨 사이에 있었던 사건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가인은 자기의 동생 아벨과의 사이에 있었던 사건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가인은 자기의 동생 아벨이 의로웠음으로 그를 미워하여 죽였습니다. 잃어버린 세상을 구속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의 적인 원수들의 연합 세력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도 그와 같습니다. 의와 죄, 참과 거짓 사이에는 억제할 수 없는 갈등이 있습니다. 박해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그 원칙 곧 그 아래 깔려 있는 박해정신은 아벨 시대 이후로 지금껏 주님의 택한 자들을 살해해 온 바로 그것입니다.

 

  • 핍박의 시초

AD 64년경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이 성령의 능력 하에 온 천하에 전파되었다고 자신있게 공포할 수 있었을 만큼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교는 성공적으로 포교되었습니다. 그러나 AD 70년 로마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이 멸망된 후, 하나님을 믿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과 더불어 이방인들의 미움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디시우스(Decius) 황제는 한 법령을 발표하여 누구든지 로마의 신에게 경배하고 희생을 바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이 법령에 불복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레오날드 벌두인(Leonard Verduin)은 ‘개혁자들과 그의 양자들’이라는 저서에서 그 때 초기 그리스도교는 자신들을 이방 종교로 개종시키려는 세속적인 세력의 강렬한 반대에 처음으로 봉착했고, 그 때가 그리스도교에 세속주의가 들어와 발전하기 시작한 지점이 되었다고 언급하였습니다.

AD 303년에는 십 여년간에 걸쳐 로마에 이교도인 디오클레시안 황제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무서운 핍박이 계속되었는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고수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여파로 그 황제가 퇴위한 몇 년 뒤까지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자행된 핍박에 의하여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서운 고문과 형벌로 인하여 불구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생겼습니다.

 

  • 또 다른 핍박의 양상

그런데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에 즉위한 뒤에는 새로운 양상이 생기게 됩니다. 그는 매우 영리하고 정략적인 정치가였으므로 사방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이교도들을 화합시켜 그의 왕국과 정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일환으로 삼으려고 AD 312년에 한 법령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황제 자신이 침례를 받고 이방인이든지 누구든지 간에 강압에 의하여 그리스도교에 입적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했습니다. 이 법령이 얼마나 신속한 배도로 그리스도교를 인도하며, 그 무서운 종교 암흑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교회 성직자 지도자들에 의하여 반대자들을 참혹하게 핍박하는 무자비한 학정으로 변하게 하는 원천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그 법령이 선포되었을 때 그것은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을 그 동안 계속되던 핍박에서 구원하기 위한 얼마나 놀라운 사건으로 보였겠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양상이 바뀌었습니다. 예전에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던 모든 불이익이 이교도인들에게 이르렀는데, 그것은 어떤 이교도인들이든지 만일 집안에서라도 우상에게 아주 적은 제물일지라도 바치고 우상을 숭배하면 굉장한 벌을 받았고, 그들의 이교신을 섬기는 일들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아직 그리스도교의 침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침례 공부 후에는 반드시 침례를 받도록 하였고, 이에 불복하거나 아니면 침례를 받은 후에 다시 예전 이교도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심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세상 역사에서 이방종교가 쇠퇴하고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강해질 때에 세력이 왕성해지고 있는 크리스찬 종교가 이교의 세속적인 사회의 전례를 모방하여, 그리스도교 안에 세속주의를 발전시키는 형식적인 종교가 되어, 하나님의 참 교회를 핍박할 가능성은 항상 있습니다.

 

  • 반대하는 무리가 생겨남

그런데 교회가 세상적 세력을 얻어 커지고, 영적인 상태가 세속화될 뿐 아니라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는 이교의 정신을 나타내자, 이런 세속적인 양상을 따라가기를 거부하는 한 크리스챤 무리가 생겨났는데, 이들을 ‘도나티스트’라고 불리는 일단의 그리스도인 무리였습니다. 그들은 콘스탄틴 황제가 비 신앙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강제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일에 반대했습니다. 이들과 세속주의적 교회 사이에 있던 차이는 이들이 믿은 교리나 신학이론에 있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종교가 국가와 하나가 되어 다른 종교를 강요하도록 지배하는 세력에 대한 반기를 든 것입니다.

도나티스트들은 그리스도교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종교가 국가의 힘과 결탁하여 자기의 종교를 강요하는 사회제도는 그리스도의 정신과 방법이라기 보다는 사단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교의 정신을 가진 ‘그리스도교의 세속주의’에 의해서 초래되는 강요와 핍박에 반대하여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지금의 북아프리카 지역에 많이 모여 살았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그들의 마음이 참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기 보다는 ‘즉흥적인 개종’, 곧 명령을 듣지 않으면 생명의 위협과 위험과 핍박을 피하려고 막무가내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로 가득 찬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들 도나티스트들은 세상의 다수를 차지하는 가짜 그리스도인들과는 전혀 다른, 적은 수의 참된 남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일반적인 정신에 거부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이전 형제들에 의해 무서운 핍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언급하면, 이 핍박은 그들의 신앙 신조와 믿음에 대한 핍박이었다기 보다는 종교가 국가와 통합하여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결정할 수 있는 종교의 특권을 빼앗고, 황제의 강제 칙령을 강요하는 세력이 된 것에 대하여 반대하기 때문에 오는 핍박이었습니다.

  • 광야 교인들의 생성

이 핍박은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광야 교회’로 내 몰았습니다. 항상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와 종교의 통합’을 반대하던 ‘도나티스트’들이 걸은 길을 따라갔습니다. 이들이 4세기 경에 생긴, 종교 암흑시대 동안 성경에 나타나 있는 참 신앙을 고수하기 위해서 ‘광야’로 쫓겨 다니며 신앙생활을 한 ‘왈덴스인’들이 되었고, ‘위그노인’들이 되었습니다. 중세기 종교암흑시대에는 로마 천주교의 교황이 각 나라의 정권과 결합하여 세계의 주권을 장악하고, 그들의 종교를 강요하는 일이 광범위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천주교와 그들이 지어낸 교리를 믿지 않고 성경을 그대로 믿으려는 무리들을 핍박하였고, 13세기 경에는 그 무서운 종교 재판소를 세워 그 곳에서 세속적인 종교의 교인들에 의하여 4, 5세기 도나티스트들 처럼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주장하고 종교의 자유를 고수하려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무섭고 잔인하게 핍박하였으며,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이 참혹한 고문과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 개혁자들의 출현과 과거의 답습

앞서 나타났던 도나티스트 들이 가졌던 정신, 즉 죽음도 불사하고 항거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순교자들이 가졌던 참된 신앙의 정신은 16세기에 나타난 개혁자들에 의해 검증되었습니다. 쯔윙글리나 루터 같은 훌륭한 개혁자들은 이들이 닦아 놓은 터 위에 굳게 서서 종교개혁을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종교 개혁운동이 궤도에 올랐을 때 이들 종교개혁자들은 부패한 로마 천주교회가 행했던 과거의 실수를 그대로 모방하는 일을 답습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종교개혁운동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 정부의 권력, 즉 세속적인 지도자들의 힘에 보호를 신청한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가 국가의 방어와 보호를 구한 것은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결국 그 위대한 개혁자들도 교황의 발자취를 따라 자기들이 주장한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유아세례나 예정설에 동조하지 않은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아나벱티스트(Anabaptist)라고 불리 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올바른 침례의 의미와 종교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대로 스스로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하며, 교회는 신약시대의 교회처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한 기독교가 다른 기독교를 핍박함

루터는 아기가 태어나자 마자 물을 뿌려 세례를 주는 ‘유아세례’를 굳게 신봉했고 자기의 믿는 신조를 관철하기 위하여 세상 지도자들의 세력에 결탁함으로써 결국에는 이런 정신과 믿는 이론 때문에 독일이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종교가 정치 세력이나 세속적인 권력의 힘을 빌리게 됨으로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만약 그 주(State)를 다스리는 정치가가 로마 가톨릭을 믿으면 그 주는 천주교 주가 되어 개신교도(Lutheran Protestants)들을 핍박하였고, 만일 그 주의 지도자가 개신교를 믿는 사람이면 그 주는 개신교 주가 되어 천주교인들을 핍박하는 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에 맞는 주를 찾아 거주지를 옮겨야 했으며 이 종교도 저 종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 곳에서도 보호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아나벱티스트 같은 성경대로 믿으려는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북 아메리리카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종교사는 많은 경우에 참된 그리스도의 정신을 잊은 채,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과 진리를 버리고, 자기의 사상과 신조가 다른 종교와 성도들을 핍박한 역사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 핍박 신학의 원조 어거스틴

기원 후 3세기 경에 살았던 교회 감독 어거스틴은 로마 천주교의 교리를 조직화한 사람으로서 천주교에서뿐만 아니라 개신교에서까지 대부로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과거의 비극적인 교훈을 잊어버린 채, 정치와 종교의 분리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고 다수가 가진 신앙과 종교를 국가의 힘을 빌려 강요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음을 봅니다.

  • 핍박 신학의 이론

이제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핍박신학의 이론’에 대하여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히포에 있는 교회의 감독이었던 어거스틴은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죽은 지 17년 후에 태어났는데, 그는 콘스탄틴 황제의 ‘종교와 국가의 통합의 개념’과 ‘도나티스트’를 강하게 반대하는 정신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도나티스트’들은 신약 성경에 나타나 있는 개념대로 ‘교회의 몸은 그리스도께 그들의 삶을 온전히 헌신한 참된 교인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교회의 몸은 국가이고 교회와 국가는 분리할 수 없는 한 몸이며, 그렇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어떤 수단을 사용하여서라도 모든 국민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아주 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어거스틴과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이 개념은 ‘교회의 몸’인 ‘국가’가 선택한 종교를 믿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는 ‘도나디스트’들의 생명을 위협하였습니다. 어거스틴도 콘스탄틴 황제와 마찬가지로 그런 개념을 받아들인 것은 그 둘 모두가 이방 종교였던 마니교 ‘Manichaeism)의 가르침들과 개념들, -종교와 국가를 하나로 보는 개념 등- 속에서 자라났고 물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천주교 역사에 있어서 어거스틴 만큼 그 교회의 사상과 철학에 영향을 미친 교부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나오는 교회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갖지 못한 어거스틴은 시편 72:11에 나오는 ‘만왕이 그 앞에서 부복하며 열방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는 성경 절을 잘못 사용하여 말하기를 –이제 교회는 지배하고 통제하는 힘이 더 막대 해졌음으로 모든 왕이 그 앞에 부복해야 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국가가 제정한 종교에 굴복하게 하여야 하며, 강요하고 강권하여서라도 이 좋은 종교를 가지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Compell them to come in’ Theory’ 강요하여 들어오게 함’의 이론입니다.

또 누가복음 14:23에서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성경구절을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믿도록 강권하라고 하셨다’고 하며, 종교를 억지로라도 믿게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신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핍박하였습니다. 초기 핍박 당시에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화형시키는 일이 많지 않았으나 후기로 갈수록 불에 태워 죽이는 일이 널리 퍼져서 성경의 진리를 그대로 믿은 셀 수 없이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귀중한 목숨이 화형대에서 불살라졌습니다. 그런데 박해자들은 성경, 요한복음 15:6절의 말씀,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는 구절 중에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을 ‘만일 사람이 로마 천주교회를 거절하면’으로 해석하여 천주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불에 태우는 일을 합리화하였습니다.

한번 그리스도교회에 이교의 정신이 들어오자, 교회는 자기의 이론과 신조를 강요하려고 사용하는 ‘무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약과 신약성경에서 구실이 될 만한 성경구절들을 자꾸 찾아 내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사용했던 창과 검,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께 얘기한 누가복음 22:38에 있는 ‘두 검’에 대한 이야기 – 베드로가 예수님께 두 검이 있다고 하자, 예수께서 ‘족하다’고 하신 장면의 이야기 – 를 부적당하게 인용하여 말하기를, 한 검은 천주교회의 성직자들이고 또 다른 한 검은 국가의 군인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며 그들이 하는 핍박을 정당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개념은 12세기에 와서 더욱 강하게 강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강권하는 이론’은 이렇게 핍박하는 행위를 정당화 시키는 일에 단단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그렇게도 위대하다고 숭배받는 한 성인의 잘못된 개념과 잘못된 성경해석이 그렇게도 수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피를 흘리게 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초창기 그리스도교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함으로 힘을 얻어, 이교가 정치의 힘을 빌어 압박해 오는 모든 박해와 반대를 이겨내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와 연합하여 정부의 도움과 힘을 요청하고, 하나님을 부인한 채, 교회의 참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렸을 때에 이 지구 땅에 천 년이 넘는 그 긴 종교의 암흑 시대가 도래하도록 이끌어 갔던 것입니다.

 

  1. 가톨릭의 로마 교황권 1,260년 동안의 순교자들

로마 교황권은 과거 수백년 동안 유럽을 정치적으로 위압했습니다. 로마 가톨릭이 정치적으로 교황권을 획득한 유래를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AD330년에 로마를 떠나 동쪽 흑해와 터키 쪽으로 가서 자기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블이라는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서로마와 동로마의 분리의 시작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로마의 수도를 아주 콘스탄티노블로 이주했고, 그러면서 로마가 있는 서부 지역에 권력의 진공상태가 생기게 되자 AD 538년도에 당시 동로마의 저스티니안 황제가 로마교회의 감독인 유세비우스를 온 세계의 교회의 머리로 임명하면서 서로마 제국에 있는 군대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게 되었고, 이것이 교황이 정치적 권세를 획득한 계기가 됩니다. 그 해에 로마의 교회 감독 즉 교황이 세계의 교회의 머리로서 군림하게 됩니다. 그 때에 이 일을 반대하는 세 민족이 있었는데 그들은 헤룰라이, 반달, 동고트족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며 이를 반대하자 로마의 교황은 군대를 풀어서 이 세 민족을 치기 시작했고, AD538년도에는 로마 시내까지 들어와 있던 동고트족을 완전히 쳐서 섬멸시켜 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속권력을 잡은 교황은 종교적 정치적 권력을 행사했는데 이 시기를 중세 암흑시대라고 부릅니다. 교황이 권력을 행사하던 시기는 AD538년에서 AD 1798년까지 1,260년에 이릅니다. 이러한 정치적 독재는 종교 개혁자들의 개혁이  시작되기까지 계속되다가 종교개혁 운동과 산업혁명 및 민족주의가 태동되면서 근대 국가가 형성되고 국왕들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교황권이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 그 이전에도 여러 차례 종교개혁이 시도되었지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산업혁명, 근대국가 형성과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 영국의 청교도 운동, 미국의 독립과 개신교주의 운동으로 인하여 로마교황권의 세력은 더욱 약화되었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결정적으로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1798년 프랑스의 버티어 장군이 나폴레옹의 지휘 아래 교황청으로 처들어가 교황 피우스 6세를 잡아 로마에서 프랑스로 끌고가 옥에 감금하였는데 교황은 3개월 후에 병으로 옥사하고 교황권의 모든 재산은 압류됨으로 1,260년 간의 세도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그러다가 교황령의 영토 대부분은 1860년 근대 통일 이탈리아 국가를 세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국왕(1861 ~ 1878)의 군대에 의해 강탈당하였으며, 1870년에는 로마를 포함한 나머지 영토도 모두 강탈당하였습니다. 이후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는 줄곧 대립 상태를 유지하였습니다. 교황들은 이탈리아의 교황령 점령을 인정하지 않고 바티칸에서 칩거하며 항의를 하였으며, 이탈리아 정부는 항상 반 교권주의적인 정책으로 맞대응하였습니다. 이때 비오 11세는 타협만이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베니토 무솔리니 역시 자신의 새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라도 교황청과 협상을 벌리는 것이 이득이 있으리라고 보고 적극적으로 임하였습니다. 2년 반 동안 협상을 벌인 끝에 1929년 2월 11일 교황은 이탈리아 정부와 라테란 조약을 체결하는데 동의하였습니다. 라테란 조약 제1항에서 교황청은 과거 교황령 시절의 영토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이탈리아로부터 자주 독립국으로서의 바티칸 시의 지위를 보장받게 됩니다. 비오 11세는 19세기에 이탈리아 반도가 통일됨으로써 교황령이 몰락한 이후 (비록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영토(180에이커)의 국가이기는 해도) 주권국가의 국가원수 자리에 오른 첫 번째 교황이 되었습니다. 제2항은 이탈리아와의 정교 협정입니다.

이탈리아 정부는 가톨릭교회를 이탈리아의 국교로 공식적으로 인정하였으며, 이혼을 불법화하고 가톨릭교회에 혼인 사항에 대한 법적 권한을 부여하였으며, 모든 학교에서 종교교육을 다시 실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대신에 성직자는 정치에 대해 일절 관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라테란 조약의 세 번째 조항은 이탈리아가 바티칸이 교황령을 상실한 데 대한 금전적인 보상을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이 일 이후 교황권은 다시 살아났고 지금은 다시 온 세상에 종교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AD 538년에서 AD 1798년 사이 1,260년 동안에 가톨릭은 성경대로 바로 믿고자 하는 성도들을 7,000만을 죽였습니다. 가톨릭 내의 한 분파인 예수회는 중세 유럽 교황권의 부정과 죄악상을 고발하여 일어난 종교개혁을 박해하기 위해서 스페인의 바스코 지방의 성주 아들로 태어난 익나티우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 수도사가 종교재판소를 최초로 고안한 자인데 이 사람이 창설한 악명 높은 수도회로 유명합니다. 로욜라가 1542년에 설립한 종교재판소는 이른바 세계사 속에서 ‘종교암흑기’라 불리는 16세기부터 18세기 말 교황권이 몰락하기까지 약 수천만 명을 온갖 잔인한 고문과 화형으로 학살했습니다. 단지 가톨릭으로 개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개신교 크리스찬들이 죽었습니다.

 

  • 프랑스 왈도파 사람들이 당한 초기의 박해

교황은 왈도파(왈덴스인)들의 신앙이 계속 퍼져나가는 것을 보자, 로마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증오스러운 종파를 영원히 지상에서 종식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왈도파를 그들의 골짜기에서 끌어내려고 크레모나의 대집사 알베르트 카피타나이스를 프랑스로 보냈고 대규모의 군대를 일으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군인들이 왈도파 사람들을 잡으려고 알프스의 어느 골짜기에 도착했을 때 집들은 비어 있었고 아무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벌써 군인들이 오는 것을 알고 동굴이나 바위에 숨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온갖 수단을 다하여 그들을 찾아내고 추적하여 많은 사람들을 잡아 낭떠러지에서 거꾸로 떨어뜨려 죽게 했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비밀 통로를 이용하여 동굴에 피해 있었습니다. 군인들이 그들을 붙잡을 수가 없게 되자, 동굴을 찾아내어 어귀에 나무를 쌓아 놓고 큰 불을 질렀습니다. 동굴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연기와 열로 질식되어 죽었습니다. 불이 다 탄 후 동굴을 뒤지자 1,000여명이나 되는 시체가 발견되었고, 그 가운데 대부분은 여자들과 어린이들이었습니다. 이 공격에서 죽은 사람들은 3,000명에 달했습니다.

그 외에도 알프스 산의 북쪽인 이태리 북방으로 가서 산 사람들, 알프스의 또 다른 산맥에 사는 사람들도 이와 유사한 핍박들과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긴 세월 동안 많은 어린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 아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주 골짜기를 습격하는 십자군 (무서운 죄를 지은 죄수들로 구성된 군대로서, 만일 그들이 이단을 믿는 크리스챤들을 많이 죽이면 용서해 준다는 조건으로 만들어진 군대) 에 의해 무섭고도 매우 잔인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타는 신앙은 칼로도 화형으로도 창으로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1. 알비젠스파 사람들

알비젠스파 사람들은 남프랑스 알비라고 불리는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역사상에 언급된 것은 주후 약 1100년부터입니다. 100년 후에는 그 수가 대단히 많아졌는데, 그들도 왈도파와 같이 예배 형태를 로마교회와 달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성직자들이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서 있다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으므로 그들의 신앙은 후대의 프로테스탄트의 의견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천주교 교황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는 면죄부를 돈을 받고 팔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교황 인노쎈트 3세는 알비젠스파 사람들을 완전히 격파시키기에 충분한 대규모의 병력을 일으키기 위하여 전 유럽에 통신문을 내었습니다. 왜냐하면 몇 세력 있는 귀족들도 알비젠스를 지원하였는데, 그 중에는 세력 있는 백작들도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1. 알비젠스 사람들의 순교

알비젠스파 사람들 중에 특별히 툴루스의 백작 레이몽 같은 사람은 브지에르 시와 신실한 알비젠스파들을 보호하려고 교황의 그 많은 군대와 끝까지 저지하고 싸우다가 힘의 부족으로 지게 되어 브지에르 시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일이 역사에 나옵니다. 교황의 군대들은 그들에게 로마 교회의 예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자비가 섞이지 않은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말했으나 사람들이 이에 굴하지 않자 군인들은 그 성과 마을들을 맹공격 하였고, 그 마을은 피를 물처럼 쏟고 누워 있는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자기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자기들의 눈 앞에서 칼로 난도질 받는 것을 보고 있던 어머니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큰 시가지를 휩쓸고 있는 불타는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놓은 불길은 불쌍한 주민들을 거리로 몰아냈고 자기 집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불을 피해 밖으로 나오다 모두 칼에 맞아 죽임을 당하여 거리는 피로 물들여졌습니다. 잔인한 교황의 대사는 이 무서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그 대량학살의 작업을 즐기었고 그 일을 하고 있는 군대를 격려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군인들이 살해를 당했을 때, 30,000명 이상이나 되는 송장들이 아름다웠던 브지에르 시의 폐허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수의 참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들의 신앙을 위해 장렬한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1. 왈도파가 당한 마지막 박해

왈도파 사람들 중 일부는 이태리 북부로 갔습니다. 거기서도 그들은 로마 교황이 보낸 군대에 의해 많이 죽었으나, 산으로 도망하여 가서 산 사람들 중, 후에 그들의 후예들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그들은 땅을 파고 가는 근면한 사람들이어서 번창하였고 얼마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의 주시를 하던 로마 투린의 대감독은 결국 그들의 피난처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군대들을 보내어 많은 난폭한 짓을 했고 수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수가 많아 때때로 파견된 군대가 그들의 저항을 받아 포기하고 돌아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수백 년을 그칠 줄 모르는 박해가 계속되었지만 그들의 신앙과 수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1650년 로마 의회는 희년을 맞아 “신앙을 전파하고 이단들을 파괴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법을 통과시키는 중, 왈도파 사람들을 상하게하고 괴롭게 하려는 법과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유난히 심하게 추운 겨울에 왈도파 모든 주민과 이미 공개된 지역 사람들은 삼일 안에 그들이 로마교회로 개종하지 않으려면 그들의 집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가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지만,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주저하지 않고 그 조건들을 수락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 한 분 만을 믿는다. 그리고 성경을 따라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대로 구원을 얻는다. 우리는 인간이 만든 어떤 교리와도 타협할 수 없으며, 어떠한 세력도 우리를 우리의 신앙에서 떠나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며 그들의 거처와 집들을 포기하였고, 눈 속에서 강을 건너며 어렵게 급류를 통과하여 동굴이나 불쑥불쑥 내민 바위 아래 안식처를 마련하였습니다.

15,000명의 군대가 즉시 그 골짜기로 파견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거기를 떠나려는 것을 허락 받지 못하고 야만스럽게 살해되었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그들의 고향 땅을 강제로 빼앗기게 되었고 피드몬트의 다른 도성에 있는 감옥에 감금되었습니다. 12,000이나 넘는 남녀 성인이 어두컴컴한 토굴에 갇혀서 가장 잔인한 취급과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아주 형편없는 빵을 먹었으며 썩은 물을 마셨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침대는 맨 돌이나 썩은 짚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사람들을 매우 빽빽하게 차게 했기 대문에 열병과 다른 질병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을 죽게 했습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교회로 개종하려는 의사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신앙을 계속해서 고수하였습니다. 그러한 취급을 받는 가운데 몇 개월 안에 그들의 수가 12,000명에서 3,000명으로 감소되었습니다. 그러나 동굴 안을 늘 채웠던 찬송 소리는 그들의 기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핍박하는 일에도 막대한 경비와 인원이 요구되자 싫증이 난 박해자들은 왈도파의 나머지 남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정배를 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에 강제로 행군하여 가게 되었고 또 매우 빨리 재촉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길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스위스에 가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수난 속에서도 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이러한 고난과 시련, 또 죽음을 불사한 신앙 열, 수 없이 흘려진 귀한 순교의 피 때문에 후대에 저 위대한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귀중한 성경을 우리가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또한 그 성경에서 비쳐 나오는 진리를 믿고 깨달아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정말 고맙고 놀라운 순교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 순교자들은 지상에서 이런 모질고 극한 박해와 고통을 당한 후에 천국에 입성했습니다. 이젠 그들에게는 굶주림, 목마름, 추위, 눈물도 없이 기쁘고 즐거운 천국 삶을 누리지만 그들이 당한 고통이 너무나 극심했음으로 아직도 지상에서 박해당하는 믿음의 후예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계시록 6:10에서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제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했습니다. 이들은 믿음 때문에 지상에서 이런 극한 고통을 당했기에 지상의 삶은 주리고 목마르고 슬픔과 고통과 박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지상의 삶과 영원세계 사이에 천년왕국이란 과도기 시대를 두신 것은 이들에게 보상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지상 재림하실 때에 천년왕국에서 주님과 함께 왕노릇할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신앙 때문에 순교한 자들만 왕노릇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0:4에, ‘또 내가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하니’에서 7년 환난 전에 핍박을 받아 순교한 자들과 7년 환난 동안에 박해가 얼마나 극심할 것인가를 보여 주는데 이들이 살아서 천년 왕국에서 주님과 함께 왕노릇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옛날 천주교회의 박해를 이렇게 길게 상세하게 소개하는 목적은 앞으로 7년 환난 때에는 이보다 더 극심한 박해가 있을 것임으로 이런 박해를 감당할 수 있도록 미리 강한 믿음, 끝까지 이기는 믿음을 준비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2) 프랑스 가톨릭과 개신교 박해

저는 프랑스에는 왜 개신교가 없는가에 대해 항상 궁금해 왔습니다. 이번 기회에 그 방면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 봤더니 좋은 자료를 발견하여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로마 천주교의 주도 면밀한 박해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를 환히 볼 수 있습니다. 박해의 결과가 개신교의 씨를 말렸습니다.

 

  • 프랑스의 종교개혁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들을 위그노(Huguenots)라 하는데 이들은 교리적으로는 칼빈주의자들이며 교회정치에서는 장로주의를 채택하였습니다. 프랑스의 위그노교회를 만든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은 멀리 1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6세기가 시작될 무렵, 프랑스는 가장 강력한 국가였습니다. 정부 체계는 이미 왕권 절대주의(royal absolutism)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고, 귀족들은 왕의 권한이 점차 강화되어 가는 것에 분개했습니다. 프랑스 왕실은 루이 12세(1498-1515) 이래 ‘한 하나님, 한 신앙, 한 법, 한 왕’이라는 구호 아래 강력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왕권의 강화를 추구하는 프랑스 왕의 입장에서는 교회가 왕의 지배 하에 있어야 했습니다. 교회를 자기의 지배 하에 넣기 위한 구실로써 프랑스 왕은 프랑스의 가톨릭교회가 프랑스적 가톨릭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루이 12세의 아들 프랑소아 1세(1515-1547 재위)에 이르러 ‘갈리아주의'(Gallicanism)로 나타났습니다. 갈리아란 프랑스에 대한 로마시대의 명칭입니다. 따라서 갈리아라는 말을 쓸 때는 프랑스의 고유한 전통을 강조하고자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갈리아주의의 핵심 내용은 프랑스의 교회가 프랑스적 가톨릭교회이기 위해서는 로마 교황보다 프랑스 왕의 지배를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516년 프랑소아 1세는 교황 레오 10세(1513-1521)와 볼로냐 조약(Concordat of Bologna)을 맺었습니다. 이 조약(협약)은 종교 협약이었습니다. 이 협약에 의해서 국왕이 주교와 수도원장을 임명하는 권리가 인정되었습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 때까지 프랑스 왕과 교황과의 관계를 규정지은 것이었습니다.

어느 초기 역사가는, 그 협정에 의해 영적 권력이 세속적 이익(temporal advantage)을 얻었고, 세속적 권력은 영적 지배(spiritual sway)를 찬탈했다고 말했습니다. 교회 회의의 권위는 더 이상 인정되지 않았으며 교회 법에 따른 주교들의 선출은 폐지되고 왕이 주교를 지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소아(프란시스) 1세는 방대한 교회 이권들을 자기 손에서 주무르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승진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공부하기 보다는 왕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더 열심히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절대 왕조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프랑소아는 자기의 통치에 위협이 될 어떠한 변화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르네상스의 새로운 학문을 순수하게 높이 평가하고 있었으며, 그는 인문주의 학자들을 격려했으며, 그들의 다른 학문들뿐 아니라 성경 연구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는 불어 성경 읽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둔감했습니다. 그러한 왕이 총애하고 승진시킨 성직자들이 목회 사역에 필수적인 자질들을 결여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의 많은 프랑스 고위 성직자들은 사실상 세속적이고 탐욕적이었으며 방탕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부유하게 살면서 자기들의 본래 활동 영역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프랑소아 1세는 국가의 재원을 낭비했고, 매관매직으로 그것을 충당했으며 자기 곁에 있는 간신배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그러한 낭비를 유지하기 위해 점점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습니다. 1517년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프랑소아 1세는 내심 종교개혁이 옳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환영할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독일의 경우처럼 프랑스가 종교적인 문제로 인하여 정치적 분열까지 맞게 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520년대 초 프랑스에는 모(Meaus) 그룹이라는 인문주의적 종교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인문주의적 종교개혁이란 고전 연구와 원어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성직자들의 지적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장기적으로는 교회 내의 비리를 척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되 독일의 종교개혁과는 달리 로마교회와의 단절은 추구하지 않는 교회개혁운동을 말합니다. 이 모(Meaus) 그룹에 속하는 사람 가운데는 르페브르(Lefevre d’Etaples, 1450-1536)와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이 유명합니다. 르페브르는 프랑스의 종교개혁자요 인문주의자 있었습니다. 그는 1523년에 신약성경을 번역하였고 후에 구약성경과 외경을 번역하였습니다(1528년). 이것은 1530년에 함께 출간되었습니다 (Antwerp Bible). 이 번역이 비록 라틴어역(벌게이트)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 후의 번역을 위한 기초가 되 있었습니다. 1521년 르페브르는 소르본느 대학 박사들로부터 이단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르페브르의 작품들을 정죄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 주석]에서 르페브르는 루터의 칭의 교리를 기대하면서 개혁을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르페브르가 번역한 신약성경은 날개 돋힌듯이 팔렸습니다.

프랑스의 프랑소아 1세는 집권 초기에 이 모 그룹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1525년 2월 파비아(Pavia)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스페인군에 패배하고, 프랑소아 1세가 포로가 되는 굴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프랑소아 1세는 국력 신장을 위해 국민적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를 위해서 종교적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종교의 통합은 전통적 종교인 가톨릭을 중심으로 해야 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개신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개시하게 되고, 모 그룹도 프로테스탄트로 취급하여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결과 수많은 개신교도들이 순교하였고 혹은 국외로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1525년 이후 프랑스 내에서는 상당한 기간 동안 종교개혁운동은 침체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 프랑스의 종교 개혁과 칼빈

프랑스의 종교개혁은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출판하던 해인 1536년부터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갔습니다. 칼빈은 프랑스 종교개혁의 사실상 지도자였습니다. 그가 [기독교강요] 초판을 저작하게 된 것도 프랑스에서의 개신교도 박해 때문이었습니다. 칼빈은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 자매들이 잔인한 박해를 받는 것을 차마 그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을 변호하기 위해 그는 조용한 바젤 시에서 붓을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사상 가장 유명한 [기독교강요]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기독교 문헌 중 가장 귀중하고 영원히 남아야 할 책으로 지적이며 영적인 깊이와 능력을 소유한 조숙한 천재의 걸작입니다. 복음주의자들은 [기독교강요]의 출현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며, 사도 시대 이후 가장 명석하고 가장 논리적이며 가장 확신에 넘치는 기독교 교리의 변호라고 예찬하였습니다.

[기독교강요]가 유럽의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이야말로 지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책이 출판된 지 몇 주 후에 부처(Bucer)는 칼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귀하를 그의 종으로 택하셔서, 가장 부요한 은혜를 교회에게 전달하도록 하셨습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출판하기 전에, 프랑스에서는 소위 <벽보 사건>이 있었습니다. 즉, 1534년 10월 17일 밤에 미사를 반대하는 내용의 벽보가 파리 시내 여러 곳에 붙여졌습니다.다음 날 아침, 파리 시민들은 자기들의 집과 공공건물과 교회에 벽보가 붙어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대담한 전단을 뿌린 자들은 왕의 침실까지 들어가서 왕의 식탁용 냅킨이 놓여있는 그릇에다 그 전단을 한 장 놓고 갔습니다. 화가 난 프랑소아는 뚜르농(Tournon)의 추기경 및 다른 성직자들과 상의한 후 가혹한 조처를 취했습니다. 박해는 무차별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화형을 당했습니다. 교묘하고 야만적인 고문들이 개발되었고, 그 중에는 사람을 간헐적으로 불에 굽는 기계인 에스트라파데(the estrapade)도 있었습니다. 희생자 중에는 칼빈의 친구도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박해를 배경으로 하여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출판된 것입니다. 그 책이 나왔을 때 개신교도들은 자기들의 신앙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프랑스 개혁교회에 대해 칼빈은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까? 칼빈의 마음 속에는 항상 동족 프랑스인들이 떠나지 않고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제네바의 칼빈은 복음적 신앙에 동정적이거나 이미 지지를 하거나 참여한 시민과 귀족 그리고 신자들에게 많은 서신을 보냈습니다. 칼빈은 조국 프랑스에서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또한 칼빈은 말하기를, “우리가 어느 곳에 가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따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칼빈은 복음적 신앙 때문에 옥에 갇힌 리용(Lyons)의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격려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두신 능력을 아무 것도 동요시킬 수 없을 것을 확신합니다. 분명히 오랫동안 여러분은 마지막 싸움(the last conflict)에 대해 묵상하여 왔습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주님이 성령으로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다스릴 것이고, 이로써 주님의 은혜가 모든 시험들을 이길 것임을 확신하십시오. 따라서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분이 세상보다 더 강하다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기 있는 우리는 기도 가운데 우리의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리용의 신자들은 5월 16일, “용기를 내십시오.  나의 형제여, 용기를!” 이라고 서로 격려하면서 순교하였습니다.

 

프랑스 개신교의 초기에는 루터파 복음주의와 명백한 차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1550년대에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제네바에 머물고 있던 이들이 고국에 돌아와 자기들의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하고, 칼빈주의 서적들이 점차 널리 유포됨에 따라, 프랑스의 개신교는 제네바를 닮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신자들은 그룹을 지어 개인 주택이나 헛간, 숲 속이나 들, 동굴이나 그 밖의 은신처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회중이 형성되자 그들은 칼빈에게 목회자를 파송해 주도록 요청했습니다. 칼빈은 그의 능력 안에서 가능한 한 많은 일꾼을 파송하였습니다. 그들은 제네바에서 사용하는 시편 찬송, 칼빈의 논문 그리고 프랑스어 성경 등을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1559년에는 프랑스에 2천 개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생겼고 이 교회는 정치적으로 장로주의를 교리는 칼빈주의를 채용하였던 것입니다.

1559년 5월에 프랑스의 전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오늘날의 총회와 같은 “대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칼빈주의적 신조와 장로주의 정치 제도를 채용하였습니다.

지방교회는 지방단위 회의를 구성하였으며, 많은 상류층 남녀가 가입하였으며 귀족들도 들어 이었습니다. 프랑스 왕정의 박해와 탄압은 거세고 일관성 있고 효과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1559년부터 전국적 교회를 조직화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3) 위그노의 시련

1546년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모(Meaux)에 세워졌으나 곧 폐쇄당해 버렸습니다. 지도자 14명은 고문을 당하고 화형당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다양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앙리 2세(1547-1559)도 역시 박멸 정책을 썼습니다. 그는 파리 의회에 ‘불붙는 방'(the burning chamber)이라 불리던 종교재판소를 설치했습니다. 감옥은 차고 넘치고 화형이 흔해졌습니다. 성경에 관한 책들과 제네바에서 온 모든 책이 금서가 되었습니다. 화형수들은 혀를 잘라 불 속에서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커다란 위험 가운데 1555년 9월에 파리에서 교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이제 프로테스탄트들 중에는 저명한 귀족들도 있었습니다. 파리의 목사 앙뚜완느 드 샹디외(Antoine de Chandieu)는 뿌와띠에(Poictiers)의 교회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목사들은 전국적 교회의 조직을 위한 ‘교회 정치의 조항들'(Articles of Polity, 1557)을 작성했습니다. 파리에 돌아온 그들은 신앙과 조직의 표준을 채택하기 위한 총회(General meeting)를 계획했습니다. 1559년 5월 파리에는 약 50개 교회의 대표들이 모였습니다. 신속히 완전한 합의를 거쳐 그들은 권징의 형식과 신앙고백을 채택했습니다. 교회 정치에 관해서 그들은 제네바의 영향 하에 있었습니다. 이때쯤 해서 프로테스탄트들은 보통 위그노(Huguenots)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위그노들의 사상은 철저한 칼빈주의였습니다.

국민적 규모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설립은 프랑스 카톨릭 교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그들은 군대를 동원해 신교 교회를 탄압하려 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도 대제독 코린(Admiral Coliny), 나바르공 앙리(Henry of Navarre)왕자, 꽁드(Conde)와 같은 유명한 군인들이 있어서 그들은 신교도들을 지키는 조직을 만들었으나 칼빈 등은 이를 반대 만류했습니다.  이로 인해 엄청난 피의 강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약 1세기에 이르는 신교도와 가톨릭 교회간의 분쟁으로 엄청난 신교도들이 희생되었습니다.

1572년 8월 24일 기독교 사상 최대라고 할 대학살이 있었습니다. 다수의 신교도들이 신교도인 나바르 공 앙리와 가톨릭 교도인 마그리트의 결혼식을 구실로 파리에 유인되어졌습니다.  정부에서는 이 결혼식을 통하여 신구교도가 화해할 것을 바랐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파리의 모든 신교도들을 학살하고자 하는 사상 최고의 음흉한 계획이 굳혀져 있었습니다. 8월 24일 미명 성 제르만 사원의 큰 종소리와 함께 신교도들에 대한 무참한 학살이 개시되었습니다. 신교도는 발견되는 대로 용서 없이 학살되었습니다. 파리와 프랑스 전국에서 학살된 신교도는 한 주간에 7만~10만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끊임없는 박해로 인해서 프랑스 개신교회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신교도인 왕자 나바르공 앙리가 국왕이 되어 그를 앙리 4세라 불렀는데 왕위 획득 후 그는 프랑스의 평화를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1598년 “난트의 칙령”을 발표하여 프랑스의 신교도 신앙에 자유를 부여하였습니다. 1598년 <낭트 칙령>이 발표되자, 위그노들에게 어느 정도 종교적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개혁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자유가 약 200개의 동네들과 약 3,000명의 귀족들의 성에 허용되었습니다. 개혁교회의 대회들이 간섭 없이 허용되었습니다.

 

그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① 프로테스탄트에게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다.

② 200개의 도시와 300개의 성채에서 프로테스탄트의 공공연한 신앙을 인정한다.

③ 프로테스탄트의 학교에 국가의 재정적 원조를 준다.

④ 프로테스탄티즘의 서적의 출판을 허가한다.

⑤ 프로테스탄트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준다.

⑥ 프로테스탄트에게 집회의 자유를 주며, 스스로 재판할 수 있게 한다.

⑦ 8년간 약 200개의 성채에서의 완전한 자치를 인정한다.

 

이 칙령으로 위그노 전쟁은 정치적으로 해결되었으나, 종교적 대립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특히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시대에 프로테스탄트는 끊임없이 탄압 당했습니다. 루이 14세는 1685년 10월에 이 칙령을 폐지하였고, 그 결과 신교도 약 40만 명이 다른 나라로 망명하였습니다.

오늘날 프랑스 안에 있는 장로교회 교세는 미미합니다. 프랑스에서는 로마 카톨릭이 유력하며, 장로교회는 약 백만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황은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를 멸살했지만 하나님은 이일에 대한 결과를 카톨릭의 1260년 간의 엄청난 권세를 완전히 끝장내는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 프랑스 혁명이라는 도구를 사용했습니다. 그 당시 카톨릭은 프랑스 전체의 6%의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고, 학교와 병원, 대수도원, 수도원 영지 등 많은 부분을 관장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세금과 별도로 농산물의 10%를 십일조로 거두었습니다. 카톨릭교회의 부정축재는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경제적 위기가 증폭될수록 가난한 사람들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결국 한 덩이의 빵이 한달치 월급에 육박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분노한 파리 시민들은 공분한 군인들과 함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합니다. 바스티유는 왕의 정책에 반대하는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곳이요 무기를 저장하는 저장소였습니다. 혁명이 전 국토로 번지고 봉건영주제도는 폐지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정점은 1793년 11월 10이었습니다. 이것은 부정한 통치자에 대한 봉기이기도 하고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한 혁명이기도 했습니다. 카톨릭 사제와 수녀들은 혁명자들의 표적이 되었고 거리를 떠돌던 매춘부는 이 성의 여신으로 떠받들어 카톨릭 교회를 조롱하고 모욕했습니다. 교회 예배도 중단해야만 했습니다.

1798년 프랑스 혁명군은 로마로 진군했고 교황의 방위선을 뚫고 교황 피우스 6세를 향해 진군했습니다. 1798년 2월 10일에 나폴레옹 군대의 소속 젊은 버티어 장군이 이탈리아 곳곳에서 승리를 거뒀고 피우스 6세 교황을 생포했습니다. 천여년이 넘는 기간동안 모든 세속의 엄청난 권세를 휘두르던 위세가 끝장났습니다. 교황 피우스 6세는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게 되었고 곧 병이 나게 되었으며 1년을 버틴 그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 발랑스로 끌려가  도착 후 6개월 만인 1799년 8월 29일 한 때 양의 우리로 쓰였던 버려진 건물에서 숨을 거둡니다. 그의 시체 처리는 1800년도 봄까지 알코올에 방부처리를 하여 보관되었다가 1802년에 이르러서야 로마로 이장되었습니다.

이어서 교황에 선출된 피우스 7세는 나폴레옹의 초청을 받아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지만 축복기로를 했을 뿐 황제에게 관을 씌울 수는 없었습니다. 나폴레옹 자신이 직접 황제의 관을 쓰고 황후에게도 자신이 관을 씌워주었습니다. 1860년에 이탈리아가 통일이 될 때에 교황령(756-1870년)의 대부분이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황은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말할 수 없이 박해하여 셀 수 없는성도들을 죽여 프랑스 프로테스탄트의 씨를 말렸으나 그 결과로 로마 카톨릭 교회는프랑스로 인해 1260년의 세속 권세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형편 없이 쫄딱 망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을 한 번 더 써먹기 위해 사단을 무저갱에 가두듯이 죽은 카톨릭을 다시 살립니다. 그것은 7년 환난 기간 동안 적그리스도로 써먹기 위해서입니다.

 

 

  1. 현대 교회들이 받는 핍박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은 세계 도처에서 정부에 의해, 타 종교에 의해 지금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데 그 실상을 한번 알아보고자 합니다. 아시아의 불교권과 이슬람권, 힌두교권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북부 이슬람권과 중남미 천주교권입니다.

오늘날 중남미 주요 국가의 박해 실상을 알아 보겠습니다.

한국 오픈 도어선교회(이사장:홍선기 목사)는 ‘오픈도어 2004 선교대회’를 6월 5일부터 14일까지 열고, 남미교회가 박해 받는 상황에 대해 집중적으로 소개했습니다. 아래 기사는 기독신문이 선교대회 강연 내용을 중심으로 남미 기독교 박해상황을 정리 보도한 내용입니다.

남미의 기독교박해는 가톨릭과 정부가 긴밀한 관계를 맺고 행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특징입니다. 천주교가 그 나라의 국교냐 아니냐가 종교 핍박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미는 가톨릭이 형식적인 국교는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영향력을 막강하게 행사하고 있습니다.  남미의 가톨릭은 말하기를 “당신이 라틴 아메리카인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가톨릭교도로 태어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개신교 부흥은 남미 가톨릭인으로서는 당연히 자신에게 속해 있던 사람들을 빼앗기는 것으로 여깁니다.

 

<아르헨티나>

남미 가톨릭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들은 부지기수입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최근까지도 가톨릭인 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헌법의 제약이 있었습니다. 또한 가톨릭은 “하늘이 부여한 법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법조항도 있습니다. 가톨릭 이외의 다른 종교활동은 스포츠 동호회나 상점, 무도회 모임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유사한 상황은 칠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는 목사와 지도자, 예배 시간, 참석 인원 등에 대한 정보를 요구합니다. 볼리비아 헌법 역시 국가는 로마의 사도적 가톨릭 교회를 승인 지지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1994년 교육개혁법은 공립학교에서의 가톨릭 교육을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코스타리카>

코스타리카에서도 가톨릭이 국교이며 비 가톨릭인은 교사가 될 수 없다는 내부 방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엔은 이 방침의 시정을 요청했지만 묵살당했습니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는 개신교인이 군목이나 경목으로 일할 수 없습니다. 결혼식 주례도 설 수 없습니다. 법적 효력이 따르는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톨릭으로부터의 박해는 남미에 전반적이며 다소 비폭력적이며 간접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핍박인지도 모르고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핍박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예배 드리는 동안 교회 지붕에 돌이 던져지고, 창문이 깨지는 일, 그리고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 사람들이 조소하는 것 등이 그런 형태입니다. 남미 국가들 중에서 특별히 폭력적, 가시적, 직접적인 핍박이 자행되는 지역들이 있습니다. 정부 또는 지방정부에 의한 핍박이 있는 곳, 그리고 반군 단체와 정부군과의 교전 속에서 피해를 당하는 성도들이 있는 지역입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멕시코와 쿠바입니다.

 

<멕시코>

멕시코에서는 나라 안의 많은 지역에서 개신교인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폭력을 당하고 있습니다. 1994년 9월 11일 중부 오악사카 주 산 파블로 야기니카의 복음주의 언약교회가 주일예배 도중 습격을 받았습니다. 교인들이 밖으로 끌려 나가 구타를 당했으며 이 지역 개신교 목사들은 전원 살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교인들의 집에는 상하수도를 단절하고 농장의 동물들을 약탈했습니다.  1995년 11월 18일 칸쿤의 살롬 장로교회는 결혼식 도중에 20여명의 사람들로부터 공격당했습니다. 하객 중 15명이 부상을 당했지만 경찰은 공격을 중지시키기 위한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최악의 공격은 치아파스에서 발생했습니다. 치아파스 주의 원주민 부족들 특히 초칠, 첼탈, 촐, 토호라발 족 중에는 11만명 정도의 개신교인이 있습니다. 치아파스 인구의 20%에 해당합니다. 1967년 이후로 50만명이 집과 땅을 빼앗기고 쫓겨났습니다. 죄목은 ‘의식’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의식은 가톨릭과 무속신앙이 섞인 것인데 참여하려면 반드시 촛불, 꽃, 담배, 술, 음식을 지정한 사람들에게서 비싼 값으로 사야 합니다. 카사퀘스로 통하는 지역 마피아가 이 지역을 장악하며 핍박을 주도합니다. 1994년 “개신교도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추방하겠다”는 선언이 선포됐고 개신교인들을 도와준 사람들도 추방되었습니다.

 

<쿠바>

신앙 때문에 난민이 되어 난민촌에 살고 있는 가운데 핍박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수 만명의 개신교 신도들이 아직도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외부에서 잊혀진 채 땅과 집을 빼앗기고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쿠바의 경우, 1만에서 10만개의 가정교회가 있습니다. 쿠바 정부는 나라 안의 가정교회를 모두 폐쇄하라는 공문을 보냈지만 가정교회 성도들은 신뢰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보 요원들이 교인들 속으로 침투해서 감시하고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전도는 공식적으로 금지됐고, 성서공회는 폐쇄됐습니다. 종교 문서의 반입 및 배포는 엄격한 국가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교회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공산화 되기 이전보다 10배 이상의 성장을 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100만 명 이상의 회심한 개신교인들이 있으며 그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성경과 신앙 서적을 외부의 공급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페루>

남미의 전반적인 정치 상황도 기독교인의 인권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사람들은 부녀자와 어린이들, 그리고 사회적 소수자들입니다. 예를 들면 페루에서는 ‘빛의 길 게릴라단’이 기독교지도자들을 암살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이것은 안데스 고지의 케추아 부족에 무자비한 희생을 안겨 주었습니다.  폭력에 의해 기독교인들이 희생되고 납치되는 사건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또 한 나라는 콜롬비아입니다. 마약 마피아와 정부군, 반군의 전투 속에서 교회 파괴, 납치 사건이 발생하는데 1998년부터 지금까지 파괴된 교회의 숫자가 300여 곳이며 52명의 순교자가 발생했습니다. 3000명 이상이 납치됐고, 내전 희생자는 지난 10년간 10만명에 달합니다. 지금도 매년 3만명 이상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1. 5. 세계교회, 세계인구 70%가 종교 박해 체제 아래 거주 (2010.04.08 인터냇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세계인구의 1/3 가량은 극심한 종교적 통제가 존재하는 사회에 살고 있으며, 전체 인구의 70%는 일정한 수준 이상의 신앙의 자유를 제약 받는 지역에 거주하고 있습 니다’라는 연구 결과가 공개되었다. 종교 및 공공 생활에 관한 퓨(Pew) 포럼은 지난 12월 16일에 발표한 연구 보고서를 공개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미 국무성에서 발 표한 각종 자료와 각국의 헌법, 각종 보도 내용 등을 분석하여 작성된 것입니다.

이 연구보고서는 전세계의 인구의 1/3은 극심한 종교적 통제와 제약을 받고 있는 데, 그 원인은 정부의 정책, 헌법, 주류 종교계의 소수종교에 대한 비정상적인 적대 행위 등 다양하게 분석되었습니다. 이런 지역에 거주하는 소수종교 신자들은 사회, 정치, 경제 등의 분야에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박해의 양상은 심각합 니다.

이 보고서에서는 가장 극심한 종교적 억압이 이루어지는 국가로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이란, 북한 등을 꼽았습니다. 이들 나라는 정부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소수종교의 존재와 성장 자체를 억압하는 나라라고 본 보고서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 중국이나 베트남 등도 정부에 의한 종교 통제가 매우 심한 나라로 꼽았습니다. 그러나 이들 나라는 사회적 적대감은 그리 크지 않은 나라로 분류되었습니다. 반면 인도와 방글라데시, 나이지리아 등은 사회적 차별이 강한 대신 정부의 차별은 그리 크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각국 정부의 헌법을 분석한 결과 국가 수의 기준으로 약 75%에 해당하는 국가는 헌법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또 나머지 20%의 국가도 헌법 사항까지는 아니더라도 법률로 종교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종교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는 나라는 전체의 25%에 불과하다는 판단입니다. 이번 연구는 세계 198개국의 독립국과 준독립국 지역에 대해 2006년부터 2008년까지 3년에 걸쳐 진행습니다.

 

 

  1. 미래의 단일 정부를 위한 종교통합운동과 박해당하는 기독교

  • 세계 주의자의 평화를 위하여 불법화되는 기독교

현재 예수회 소속 신부들은 빌더버그의 싱크탱크로 가톨릭 중심의 종교 통합을 연구,추진하고 있으며, 특히 세계정부를 만들며 기독교를 합법적으로 탄압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영국은 [인종적, 종교적 증오에 관한 법]을 2006년에 법률의 개정을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혐오범죄 방지법안]을 2009년 7윌23일에 의회에서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일명 ‘종교 모독법’이라고 합니다. 또한 UN은 81년에 세계 인권선언 2조 2항에서 [종교 또는 신념에 근거한 모든 형태의 불 관용을 철폐하는데 관한 선언]을 했습니다. 이 법안들이 효력을 발생할 때에는 성경의 다음 3가지 구절의 말씀을 전할 수 없게 됩니다. 로마서 1:27의,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하는 말씀과 레위기 8:22절의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는 말씀과 또한 타 종교에 대한 차별금지 구절로 간주하는 사도행전 4:12의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는 구절들입니다. 이런 법안들이 효력을 발휘할 때가 멀지 않았으며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 세계 종교를 통합하는 신세계질서

신세계질서 정책 중에서 종교통합은 정치와 금융, 지적통제(생체 칩을 통해 인류의 정보를 통제하는 기술)와 함께 신세계질서 구축의 4대 핵심정책에 속합니다.  세계단일 종교 협회(United Religion Organization, URO)는 1994년 인도 델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모임에는 세계 52개국의 기독교, 정교회, 가톨릭, 모슬렘, 불교, 힌두교, 유대교 등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해 10만여 명의 종교지도자들이 제 7회 세계종교회의라는 이름 아래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1200명의 정치 지도자들도 모였습니다. 모토는 하나님 아래 한 가족이라는 것에 모두가 서명하고 선포했습니다.

또한 URO는 1999년에 남 아프리카 케이프 타운에서 세계종교총회를 가졌는데 이 회의에서 종교문제를 UN에 넘겼습니다. UN이 단일정부를 만들기 위한 신세계질서에 신종교(New Mystic)로 기독교 교회를 활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1992년 12월 1일에 조지 H. 부시 대통령은 UN에서 ‘앞으로 지구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UN은 신세계질서를 전담해야 한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신에게 맹세하는 원리처럼 앞으로는 신세계질서에 충성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성직자들은 UN 산하 조직인 URO, UPF의 프로그램에 따라 UN의 공증을 받은 종교지도자만이 종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통합된 종교를 세계종교(Inter-Religion) 또는 하나의 세계신앙(Inter-Faith)으로 부르며 이것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그리스도인들은 탄압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빌더버그 그룹의 가톨릭 예수회 소속 신부들은 21세기 새로운 종교재판을 하기 위한 준비를 치밀하게 하고 있습니다. 세계종교는 UN과 함께 예수회에 의해 변질된 가톨릭으로 통합되어 통합종교는 세계 평화와 세계통합의 핵심 도구인 베리칩을 사람들에게 주입하게 하는 일을 하는 집단이 됩니다. 신세계질서를 만들어 가는 세계의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개발하여 시행하는 생체칩이 인류를 통제하는데 있어 핵심적으로 중요한 요소인데 유독 기독교인들 중 일부만이 이것이 요한계시록 13장에서 말하는 ‘짐승의 표’라는 점을 들어 이 칩을 거부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들 엘리트들은 초기에는 각종 편리함과 광고 등으로 유도하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강제적으로 시행하여 이 칩을 받지 않은 경우에는 그 사람을 무정부주의자, 종교과격주의자, 세계 평화를 방해하는 자들로 사회가 인식하도록 여론을 형성하게 해서 세계 사람들로 그리스도인들을 혐오하게 만들고 앞에서 보았던 가톨릭 교회로부터 박해 받았던 프랑스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박해와 살륙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1989년 탈냉전 이후의 세계 문명권의 활성화로 인한 각 문명권으로부터 박해도 심화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었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18-20)’하신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여 첫째 인을 떼실 때에 백마가 뛰는 시기로부터 온 세상의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 지금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는 전 세계에 널리 전파되어 천주교권, 이슬람권, 러시아 정교권, 불교권과 유교권으로 퍼져 들어갔습니다.

따라서 타 종교권 안에서 소수집단으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냉전 시대가 끝나고 1989년의 탈냉전 시대가 시작되면서 그 동안 무신론자들인 공산주의에 억눌렀던 러시아 정교회와 이슬람권이 다시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타 문화권 안에서도 종교부흥이 일어났는데 그것으로 인해 종교활성화가 되면서 이들 신자들이 자기가 믿는 신들에 대한 열심으로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천주교 안에서의 기독교인들, 불교권 안에서의 기독교인들, 힌두교 안에서의 기독교인들, 특히 이슬람 안에서의 기독교인들이 받고 있는 박해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구촌 순교자 현황

(Oh My God의 선교현황에서 발췌)

지난 20세기 동안 10만명 이상이 순교했던 대규모의 박해는 76차례 있었 다. 최근의 사례들로는 1971년 우간다의 아민 통치하에서, 1963-1999년 수단의 대학살, 1994년 소말리아의 인종학살 등이었다. 이러한 대학살의 위 기상황 등이 다수 있었으나 국제적인 비난과 경고로 인해 저지되었던 경우 들이 많았었다.

 

 

AD33-2000년

AD33년 이후에 태어난 전체 인구: 3백6십8억3천1백만명

AD33년 이후에 전도된 전체 인구: 1백3십3억6천6백만명(전 인류의 36%)

AD33년 이후 전체 기독교인: 88억1천6백만명

AD33년 이후 전체 순교자: 69,420,000명

전체 기독교인 중 순교자: 0.8%

전체 기독교 지도자 중 순교자: 0.2%

 

역사개관(AD33-2000)

지난 20세기 동안 600차례의 주요 박해 상황이 있었다.
*10만명 이상이 순교한 경우는 76차례
*50만명 이상이 순교한 경우는 27차례
*1백만명 이상이 순교한 경우는 15차례
박해상황에서 평균 순교자수: 115,000명
박해상황이 발생한 국가: 220개국

AD2000년 박해상황

           각 세기 순교자 수
20세기 순교자(1900-2000년)  45,500,000명
1950년 이후의 순교자 13,300,000명
1950년 이후 년간 순교자 평균 278,000명
최근의 년간 순교자 평균 171,000명
현재 년간 순교자 평균 160,000명
AD2000년 박해국가: 50개국

 

AD2000년 순교자 종파 별 분류

종파 별 순교자 수
로마 카톨릭교인  100,000명
개신교인 30,000명
정교인 14,000명
-백인계 현지기독교인 10,000명
유사기독교인 5,000명
성공회 및 구카톨릭교인 1,000명
총 계  160,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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