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신화의 실체

 

[문명의 창세기]의 저자 데이비드 롤이 그의 책 서장에서 전설(설화)과 신화에 대해서 말하기를, “전설(Legend)이라는 낱말은 중세 라틴어 ‘레겐다(legenda)에서 유래했다. 원래는 ‘읽을 거리’ 를 뜻하지만 영어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옛날부터 민간에 내려오는 사실 여부가 확 인되지 않은 이야기’인데 이것을 달리 말하면 전설은 상상력이 꾸며낸 허구가 아니라, ‘아직 은’ 과학적 실증이나 역사학적 논거나 고고학적 증거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옛날부터 말이나 글 을 통해 전승되는 역사인 것이다. 이것을 이야기 하는 사람은 그 전설에 묘사되어 있는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는다. 전설의 바탕에는 이런 기본적인 믿음이 깔려 있다. 중요한 점은 바로 그것이다. 이야기는 다채롭게 꾸며져 허황되고 비현실적인 성질을 갖는 경우가 많지만 그 뼈대 는 먼 옛날에 실재했던 사실의 유물로 여겨진다.

전설과 자매관계에 있는 낱말인 ‘신화(myth)’는 그렇지 않다. ‘우화’를 뜻하는 그리스어 ‘무토스 (muthos)’에서 유래한 ‘신화’를 옥스포드 영어사전은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대체로 초자연적인 인물이나 행위나 사건들을 포함하며, 자연적 또는 역사적 현상에 관한 일반 대중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순전히 허구적인 이야기’라 했다. 따라서 전설과 신화 의 개념은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 민족의 유명한 전설인 단군전설이 결코 신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합니다. 전설 은 전승되는 과정에서 꾸며지게 마련이지만 그 바탕에는 이제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휠씬 실제적 인 역사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신화에서 역사로

우리 한민족에게는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오고 있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건국전설이 있습니다. 그 것은 곰과 호랑이가 등장하는 아래의 이야기는 그 설화의 절정을 이루는 부분으로서, 한국인의 ‘단군설화’는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 전설입니다. 천상적 존재인 환웅이 지상으로 내려와 정치와 제사를 주관하고, 곰을 인간으로 변화시켜 정혼한 뒤 단군을 낳았는데, 그 단군이 평양에 고조선을 세웠다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단군전설’은 국가의 건국이라는 집단적 관심사를 다루고 있으며, 건국이 천상적 존재에 의 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건국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단군전설’은 우리 민족이 천손이라는 민족적 긍지를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설화의 원형으로서 우리 민족 에게 민족적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천손은 제정일치 사회의 제사장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거기에 나타난 주제의식은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이념이어서 그 설화적 보편성과 가치가 높습니다.

고기 (古記)에 이렇게 전합니다.
옛날에 이름이 제석(帝釋)이신 환인(桓因)(하늘. 하느님)이 그의 서자(庶子-맏아들을 제외한 둘째 이하의 아들) 환웅(桓雄)이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바랐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三危太白)을 내려다 보니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했다(우리 나라의 건국 이념인 홍익 인간). 이에 천부인(天符印-신권(神權)을 상징하는 부적과 도장)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 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그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지금의 묘향산) 꼭대기의 신 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서 이곳을 신시(神市)라 불렀다. 이 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 (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설화의 배경이 농경 사회임을 알 수 있음) 곡식, 수 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고, 인간의 360 가지나 되는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려 교 화시켰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신웅(神雄- 환웅)에게 사람 되기를 빌었 다. 때마침 신(神-환웅)이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 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  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서 먹었다. 곰은 몸을 삼간지 21일(삼칠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능히 삼가지 못했으므로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항상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 배기를 축원 했 다. 환웅은 이에 임시로 변하여 그와 결혼해 주었더니(천상과 지상의 결합), 그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단군 왕검이라 하였다.’

이렇게 해서 여자가 된 곰이 ‘환인(桓因)(하나님)의 아들 환웅(桓雄)과 혼인해서 낳은 아들이 조 선을 건국한 단군 왕검(王儉)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환인(桓因)의 환(桓)은 광명(光明)을 말하 며, 인(因)은 본원(本源)을 뜻하여 ‘광명의 본원’또는 ‘환한 근원’ ‘밝은 근원’이란 뜻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득한 옛날부터 빛의 근원이신 분으로 알고 있었습 니다. 환인이란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동이문자로 의역한 것입니다. 단군의 고조선 개국 전 설에 신화적인 요소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사료적 가치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신화적 내용은 단순히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인의 역사적 체험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군전설은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그 시대의 역사성이란 근거 위에 그 시대상이 반영된 이야기 입니다. 그것은 우리 겨레의 영아기 때의 이야기로서 한국인의 역사적 체험을 담고 있는 귀중한 사료입니다. 그렇다면 곰과 범이 한 굴에서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하나의 웅족(곰무리)과 하나의 호족(범무리)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의 곰무리 (웅족) 와 하나의 범무리(호족)란 어떤 종족을 말합니까? 어떤 역사학자는 이 문구가 당시 사회에 있었 던 토템 신앙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서, 웅족은 곰을 숭배했던 부족이고 호족은 호랑이를 숭배했 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고대 한국인이 곰을 숭배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한국인은 오히려 호 랑이를 더 선호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주변 종족들 가운데서 호랑이를 토템으로 숭 배하면서 살았던 종족이 있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의 곰무리, 하나의 범무리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단군 개국 설화는 한민족의 거 대한 서사시인 동시에 역사입니다. 욕단은 홍수 후 스발(시베리아-만주)로 가기 위해 동양의 산 악지대로 이동했었습니다. 그 산악지대의 하나가 우랄산맥 동쪽인 천산산맥이었습니다. 천산 산 맥은 파미르 고지에서 동북쪽으로 갈라진 산맥으로, 욕단족속이 한 동안 무리 지어 있었던 곳입 니다. 단군설화에서 굴은 산을 뜻합니다. 그때에 우랄산맥의 서쪽인 현재의 코카사스 지역으로 야벳족속 중 한 부족이 이동해 왔던 것입니다. 성경 연구가들은 바벨 분산시 야벳족속은 북쪽으 로 가서 흑해와 가스피해에 정착하여 지금 유럽과 아시아에 거주하는 코카사스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그 때에 하나의 곰과 하나의 호랑이가 같은 굴에 있었다.’라는 문군의 현실 적 의미는 아득한 옛날 한 때에 ‘곰 무리와 범 무리 즉 몽골리안과 코카시안이 똑같이 유라시아 대륙 고산지대에 무리 지어 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특히 중앙아시아의 파미르 고원은 세계의 용마름이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 파미르 고지에서 보면 손가락을 편 것처럼 산맥이 사방 으로 찢겨 나갔습니다. 한국인의 조상인 욕단은 이 파미르 고지에서 동북쪽으로 갈라진 가지인 천산산맥을 넘어 알타이 산맥을 지나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극동의 이 땅까지 이동해 왔던 것입 니다.

한편 약쑥과 마늘의 의미는 곰이 ‘약쑥’과 ‘마늘’을 먹으며 햇빛을 보지 않는 것은 지상적 존재가 그 세속성(世俗性)을 탈피하고 신성한 존재와 만나기 위해 필요한 금기를 나타냅니다. 즉, 쑥과 마늘을 먹으며 100일을 버틴 곰은 용맹을 대표하는 호랑이를 제치고 인간으로 환생했다는 것은 투쟁보다 인내를 선택한 한민족의 특성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의 일생은 끊임없이 여 러 단계나 과정(상태)을 통과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데 중요한 단계를 통과할 때에는 반드시 시 련과 고통이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이 의식으로 채택된 것임을 보여 줍니다.  단군설화의 쑥, 마 늘, 어둠 등은 이러한 통과의 과정을 통해 새 생명을 얻는다는 보편적 인식을 상징화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인의 시조 욕단은 동양의 산악지대들 즉 파미르고원 –천산산맥-알타이 산맥을 넘어 바이칼 호수,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이곳 극동의 새 땅으로 이동해 올 때에 엄청난 고난과 고통과 추위와 배고픔과 위험과 어둠을 견디어 내야 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욕단의 13아들들 중에 이런 고통 과 고난을 끝까지 참고 견딘 아들들과 그 족속들이 있었을 것이요, 그렇지 못하고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여 도중에 정착한 아들들과 그 족속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쑥과 마늘과 어둠은 고 통, 고난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이겨낸 것은 곰이지만 호랑이는 견디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했다 는 것은 우리 민족의 특성은 호랑이와 같이 용맹보다는 곰과 같이 인내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우 리 민족은 항상 평화로운 민족입니다. 5천년 역사 가운데 한번도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았습 니다. 이것은 천손민족으로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성품입니다.

인류역사를 볼 때에 호랑이 같이 용맹하여 이웃나라를 정복하던 앗시리아도 망했고, 바벨론도 멸망해서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핍박당하고 포로되었던 이스 라엘은 아직도 현실세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한족을 정복하여 청나라를 세워 3백년 동안 통 치 하던 여진족, 즉 만주족은 중국 합중국에 동화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한민족 역사의 고려와 조선이 사대주의를 채택하여 강한 나라를 섬겼던 것도 그 당시로서 강대국이었던 원나라와 명 나라와 청나라에 대해 생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로 마 나라에 강하게 뻗티었던 유다민족이 AD70년에 멸망하여 나라와 민족조차 흔적도 없이 사 라졌던 결과가 났을 것입니다. 유다민족은 하나님의 섭리로 다시 나라를 얻을 수 있었지만 말입 니다.

욕단 족속들이 천산산맥을 넘을 때쯤 발견했던 식물이 바로 쑥과 마늘입니다. 그들이 중앙 아시 아와 시베리아에서 이 쑥과 마늘을 섭취하면서 동쪽으로 이동했던 것입니다. 단군 신화에 쑥과 마늘 이야기가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식물학자들의 연구 기록을 보 면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그 당시의 사람들이 발견했을 만한 식물 중에서 먹을 수 있 는 것으로 쑥과 마늘 두 가지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김성일의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

‘마늘은(Allii bublus)은 서부 아시아 및 중국이 원산이며 특히 그 동류인 총백(Allii fistulos bulbus, 파)는 시베리아가 원산지이며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 재배되고 있다.’했습니다.

‘파미르’고원을 한자로 총령(蔥嶺)이라고 합니다, ‘총’은 우리가 먹는 파를 말하며, ‘령’은 마루를 말합니다. 한국 말로 파마루(파미르)입니다 지리학에서도 역시 파미 르고원은 파가 많이 자생한다고 합니다. 파미르고원은 파마루로서 파가 많이 자생 하는 산마루이기에 파마루 (파미르)고원인 것입니다, 파미르는 한국말 파마루에서 전음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늘 안에 이 파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알이랑 고개를 넘을 때에 쑥과 마늘 그리고 파를 먹으면서 넘었다는 것은 고고학적 증거가 됩니다.

‘쑥은(Artemisia vulgaris folium)은 서부 아시아와 시베리아가 원산지이고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 채취되고 있다.(한대석 [생의학]p344)

‘쑥은 약 300여종이 있으며, 그 중에서 특히 비단쑥, 구와쑥, 흰쑥, 금쑥, 털산쑥, 물쑥, 그늘쑥 등은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및 중국, 한국, 일본 등에 분포되어 있 다'(학술 계간지[동서의학] 1985, 제10권 2호)

한국인의 선조 욕단족속은 아시아 서쪽에서 중앙아시아를 지나 시베리아를 거쳐서 만주 지역에 이를 때까지 바로 이 쑥과 마늘을 삶아 먹거나 생식하면서 고달픈 행진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이 쑥과 마늘은 먹기에 쓰고 독합니다. 먹기가 쉽지 않습니다.  단군설화의 내용 중에 ‘곰과 호랑이 가 이것을 받아서 먹고 기(忌)하였는데 삼칠일(三七日 : 21일)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기하지 않아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전해지고’있는 내용에서 기(忌)는 사전적 의미로 ‘꺼리 다’, ‘싫어하다’의 뜻입니다.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을 먹으며, 싫지만 참는다는 뜻으로 곰은 인 내하였지만 호랑이는 인내하지 못한 것을 말해 줍니다.  이와 같이 한국인의 선조 욕단 족속은 아시아 서쪽에서 중앙아시아를 지나 시베리아를 거쳐서 만주 지역에 이를 때까지 이 쑥과 마늘 을삶아 먹거나 생식하면서 고달픈 행진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고조선 건국 설화에 등장하고 있는 쑥과 마늘은 이와 같은 한국인의 역사적 체험을 반영하고 있 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쑥과 마늘’의 분포지역이 한국인의 조상 욕 단의 이동 경로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실로 이것은 한국인이 욕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힘있 게 받쳐주는 또 하나의 고고학적 증거입니다. 곰은 쑥과 마늘로 연명해 가며 추운 시베리아를 지나 끝까지 대이동의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우리 ‘알이랑 민족’ 배달 동이 겨레 는 근본적으로 매서운 추이를 견디며 커왔던 전통적인 기마 민족이었습니다.

단군개국설화는 시간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에 그 서술 내용을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확대시켜 놓고 이해해야만 그 참 모습이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단군 개국설화의 배경을 시간적으로는 인류 문명 여명기에서부터 공간적으로는 동북아 일대가 아니라 중앙아시아 일대의 파미르고원, 우랄산맥과 천산산맥 부근에 옮겨다 놓고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무대를 확장시켜 놓 아야만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선조들의 역사적 체험을 바로 깨닫고, 이 전설이 반영하고 있는 역사적 실체를 놓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단군신화는 날조되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단군전설을 단순한 신화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제 역 시 단군을 신화 속의 가상인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단군을 신화 속의 인물로 오해하게 만든 것이 일제의 식민사관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제 식민지 지배 시기에 일본 인 학자들은 단군설화가 우리 겨레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설화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온갖 학설로 조작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군은 원래 묘향산의 산신 또는 평양지방의 토지 신이었는데 이것이 책에 기록되었다가 뒷날 몽고의 침입 때에 고려인의 일치단결을 위해 건국 신화로 고쳐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단군 신화는 일연이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일본 학자들은 그토록 단군설화를 삭제하려 했습니까? 그것은 일제의 가장 큰 고민은 조선이 그들보다 긴 역사를 가진 문화 민족이라는데 있었습니다. 일제는 1919년 삼일운동 후에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었습니다.  총칼로 잠시 지배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식민지로 만 들기에는 조선의 문화적 저력이 너무 컸던 것입니다. 이에 일본은 조선 민족을 완전히 일본에 동 화시키고자 가장 먼저 조선 상고사 말살 작전을 펼쳤습니다. 구한말 조선 강점 당시 자기들의 역사는 기원 후 1700년인데 비해 조선의 역사는 기원전 단군 조선(고조선)이래로 4200년이 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역사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어린 역사를 가진 섬나라 일본이 조선을 강 탈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제는 우선 그들의 역사보다 2천년 이상 앞서 있는 조선 상고사를 말 살하는 것이 시급했습니다. 그 방법은 단군을 부정하고 단군 조선을 역사에서 말살하는 것이었 습니다.

교활한 일제는 단군을 말살하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민족의 시조 가 없어지는 것이니 한국인은 단군을 하나의 조상으로 하는 단일민족으로서의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잃게 되어 그 기(氣)가 꺾일 수 밖에 없으며, 또 민족이 분열되어 서로 싸우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일제 침략자들은 단군과 조선 고대사 말살 작업을 저들의 대 조 선 식민지 정책에 중요한 하나의 고리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일제는 1920년대부터 우리의 역사를 날조, 축소, 왜곡, 부정하는 작업을 조선 총독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시작하였 습니다. 그 일을 위해 먼저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서 단군관계 역사책들에 대한 전면적인 약탈과 소각활동을 단행했습니다.

일제의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1910년11월부터 약 14개월 동안 조선의 관습과 제도를 조사한 다는 미명 하에 헌병들과 헌병보조원을 내세워 우리나라 전국 각지의 책방들과 향교, 서원, 개인 집들을 샅샅이 뒤져 조선을 영구히 지배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보이는 단군관계 역사책들 을 비롯한 우리 민족의 귀중한 역사, 문화, 지리책 등 총 51종,  20여 만권이나 압수하여 불태 우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역사서 수거는 [조선사]편찬이 마무리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루 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일제는 유구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저들의 역사보다 뒤늦은 것으로 만들 기 위해 조직적인 조선사 위조 작업을 감행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 일제는 조선사편수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일제는 조선사 편수회에 총독과 맞먹는 권력을 가진 정무총감이 위원장을 겸임하고 실무자의 관 직을 높이고 매국노 이완용, 권중현, 박영효, 이윤용 등을 고문으로 앉히고 일본인 거물들과 학 자들을 위촉했습니다. 조선사 편수회는 단순히 역사서를 편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으로 조직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활한 일제는 [조선사]를 편찬함에 있어 자료가 부족하다는 구실을 걸어 단군조선의 역사를 빼버렸으며 이마니시 류와 같은 역사 위조의 명수들을 내세워 단군은 후세에 꾸며낸 신적 존재이며 실재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애써 논증하게 하고 단군이 신화적 인물이기 때문에 [조선사]에 서술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일제는 한국 고대사를 말살 하여 4천여 년 조선의 장구한 역사를 2000년으로 깎아 내렸고, 자기 나라의 역사는 5백년을 소급하여 2200년이라고 했습니다.

일제는 조선을 영구 지배하고자 그들이 만든 새로운 조작된 역사 설계도에 두 나라의 국민을 맞 춰 일본을 형으로 조선을 아우로 하는 이른바 동조동근(同祖同根)의 한 나라를 만드는 망상을 실 현하고자 조작된 역사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단군은 역사적 인물이 아닌 신화적 인물이라고 애 써 주장했던 것입니다.  단군을 말살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인 일본인 어용 식민 사가인 이마니시 류는 조선사 편수회의 수괴였던 자로서 단군을 부정하기 위해서 [삼국사기] 이외의 사서(史書) 는 모두 사서가 아니라 史設, 僞史라고 단정했습니다. 삼국유사의 고조선 조에 나오는 단군 기 사는 신화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는 단군고라는 학위 논문을 발표한지 2년 뒤인 1932년에 불과 나이 57세에 급사했습니다.

이마니시(금서룡)는 또 주장하기를 삼국 이전의 우리 역사가 간혹 지나 사서에 기록되어 나오는 데 이들 기록의 많은 부분은 한 반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만주땅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한 국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사에 속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북삼한 의 역사까지도 모두 한국사가 아니라 만주사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악명 높은 만선사관(滿鮮史觀)이었습니다. 일본은 환국, 배달, 고조선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의 삼국시대 역사도 축소하였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BC 57년, 고구려는 BC37년, 백제는 BC18년에 건국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삼국사기의 고조선의 역사를 인정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 백세, 신라의 초기 왕들 까지도 부정했습니다.

금서룡의 단군 말살론은 일제 말기에 대륙침략을 위한 만선 사관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8.15 광 복 후의 한국사학에 악영향을 끼쳐 단군신화론의 뿌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일제의 단군 말살론 과 한국사 왜곡으로 인해 우리 민족사는 5천년 사에서 2천년 사로 단축되고 민족의 역사적 강 역 마저 좁은 한반도(한반도사관론)로 축소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광복 후의 국토분단과 6.25전쟁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상고사와 만주 땅에 대한 역사적 관심을 잃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지난 역사를 우리가 쓴 것이 아니라 침략자 일본이 마음대로 썼을 뿐만 아니라 조선역사 편찬회에서 쓴 [조선사]가 한국어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일본어로 기록된 한국역사서입니다.

일제는 이 책을 편찬할 때에 일제 식민통치에 유리한 사료는 많이 넣고 불리한 것을 의도적으로 넣지 않았으며 일제가 조선사를 편찬할 때에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바로 단군에 관련된 기록을 삭제했습니다. 일제는 조선사 간행 목적은 민족 정체성을 뿌리 뽑아 한민족을 일본 왕의 충실한 신민으로 전락시키려는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눈뜨고 코 베이는 사실 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도난 당하고도 도난 당한 사실도 모르는 꼴이 되고 말 았습니다. 광복 70여년이 넘은 오늘날에 이르도록 우리는 역사의 도난 사실을 모르고 지내왔고 이제 겨우 정신을 차려 도난당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왜곡된 역사관에 맞서 이미 우리 선배들은 저들의 음모를 간파하고 상고사를 되찾아 반도사관을 극복하려는 투쟁을 시작했 었습니다.

이런 일제의 만행 시대에 일제와 맞서서 우리 민족사를 바르게 세우려는 민족사학자들 중에 백 암 박은식, 무원 김교헌,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 육당 최남선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상 고사를 되찾기 위한 역사 연구에 몰두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조선사 편수회에 관여한 일부 어용 친일 사학파들의 묵비권 행사로 인하여 금서룡의 사이비 주장이 광복 후에도 죽지 않고 살아 남 고야 말았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역사 광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일제 36년의 국난을 통해 남겨진 가장 불행할 일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단군이 말살 당했다는 사실보다도 일 제 식민지 사학의 잔재가  8.15광복 이후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직도 우리 많은 한국인들이 민족 시조인 단군을 신화적 인물로 믿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교인들도 그 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1910년 이전인 구한말의 학부가 검인정한 역사 교과서인 고유상의 [오천년 조선역사]의 제1 편 상고사 제1부에, ‘제 1장 단군 조선- 檀君의 名은 王儉이니 桓因의 孫이요 神市시 桓雄의 子라. 太白山(今 白頭山) 檀木 下에 降生하사 神聖한 德이 有하심으로 國人이 推戴 爲 君하여 國號를 朝鮮이라 하고 平壤에 都하니 즉 李朝開國 紀元前 3724년 戊辰이라.’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어린 학동들이 서당에서 이미 단군이 우리의 시조란 사실을 배워서 익히 알고 있었으며 그 때에는 단군을 신화 속의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그의 조선사 연구에서 ‘조선의 시조는 단군이시니 단군은 신이 아니요 인간이시라.’ 했습니다.

결론입니다.

고조선 건국 전설은 결코 단순한 신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한민족의 역사적 체험을 담고 있 기 때문입니다. 다만 고조선을 한국사에서 삭제시키려 했던 일제 식민지 사가들의 단군 말살 음 모가 그것을 한낱 사료적 가치가 없는 신화로만 규정했던 것입니다. 이제 단군은 신화에 등장 하 는 곰의 자식이며 역사적 인물이 아닌 가상의 존재라는 그릇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한국 교회 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적으로 거부해야 하는 것은 단군이 아닌 단군을 신격화하는 것을 막아 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단군의 신격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상고사에 대한 학문 적 검토는 없이 단군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군설화가 지니 고 있는 민족사적 의미에 대한 이해를 거부하며 무조건 단군을 부정할 때에 한국교회가 자칫하 면 비애국적, 반민족적이라는 오해를 받아 반 기독교 정서를 확산시켜 민족 복음화를 위한 한국 교회의 선교사역을 방해 받는 요인이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단군전설을 민족의 중요한 자산으로 인식하고 존중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상고사 를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하여 깊이 탐구해 그 결과로 얻은 역사적 진실을 민족적 에너지로 삼아 야 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이 욕단의 후손으로서 또 다른 히브리 천손민족으로서의 재 림하실 주님을 맞이할 마지막 선교 사명을 다하도록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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