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4:22-33
첫째로 오병이어 사건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은 마태복음 14:22-33은 우리가 세상에 살아 가면서 만날 수 있는 인생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재촉해서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가게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들을 재촉해서 배태워 보냈는 줄 아십니까? 조금 전에 있었던 사건 때문입니다. 그 사건이란 예수님께서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장정들만 오천명이라 했으니 남녀노소 다 계산하면 장장 2만명이나 될 것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음식을 먹었습니다. ‘배불리’란 말이 성경에 어디있느냐고요? 성경에 있습니다. 이들이 음식을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배불리 먹지 않았다면 열두 광주리가 남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나서 생각해 보니까, 예수님을 임금님으로 삼으면 세상에 부족할 것이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몇 만명을 먹이시니 먹을 것 걱정하지 않게 될 것이요, 그 당시에 난치병 중에 난치병인 문둥병, 중풍병, 소경, 앉은뱅이등 못고치는 병이 없으신 분이요, 심지어 죽은 사람도 벌떡벌떡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그렇기에 죽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기적의 주인공은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떼준 떡과 물고기를 직접 무리들에게 떼어준 사람들입니다. 떡을 받아 먹는 사람들이 그 제자들을 얼마나 경외하는 눈으로 바라봤겠습니까? 떡을 떼어 줬는데 또 생기고 또 생기고…..
모든 무리들이 몰려와서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겠다는 상황 속에서 그 제자들은 얼마나 달콤하고 행복했겠습니까? 자신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특권을 가진 자들이요 예수님이 임금이 되면 자신들은 무엇인 될 것인가하고 미래의 꿈으로 잔뜩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이기에 그 현장을 빨리 벗어나라고 재촉해 보내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이 허황된 꿈을 철저히 깨뜨려야 되겠다고 생각하신 주님은 바다 가운데 폭풍을 보내사 죽을 지경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세상을 향한 헛된 욕망을 버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갖 이 세상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하늘나라 보좌를 버리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이들을 하늘나라로 대려 가기 위한 것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그 뜻을 철저히 깨달아야 했었습니다.
둘째로 물위로 걸어 오시는 예수님
그런데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배를 탓습니다. 그런데 여기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에 풍랑이 일고 파도가 처서 배가 뒤집힐 위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는데도 이런 위기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 성도들에게도 신앙생활하면서도 이런 위기를 당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생 풍랑, 인생폭풍, 질병과 고난과 고통과 실패와 좌절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가운데 있을 지라도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23절에,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려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했습니다. 제자들이 풍랑으로 인해 고통 당하는 것을 아시고 물위로 걸어 제자들에게 가고 있습니다. 한편 제자들은 풍랑으로 인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물위로 걸어오는 한 물체를 보게 됩니다. 얼마나 놀랬는지 제자들이 유령이라고 부르짖습니다. 제자들이 왜 예수님을 향해 유령이라고 했을까요? 사람은 물위로 걸을 수 없습니다. 물위로 걷는 것은 초자연적인 일입니다. 그러므로 물 위로 걸어오는 물체를 보고 유령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물위로 걸어오시는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입니다. 하나님은 중력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중력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향해 또 한번 유령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4:37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두려워 문을 잠그고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문을 통과하여 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득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유령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풍랑으로 죽을 지경에 유령까지 나타났다고 생각했을 때에 그들이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이런 때는 정상적인 모든 사고의 흐름이 멈춤니다.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위기가 닥쳤는데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뇌의 작동이 멈춤니다. 사람이 너무나 갑짜기 혹은 엄청난 문제가 생기면 힘이 싹빠지고 오줌을 싸고 털썩 주저 앉아 버립니다. 저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일로 갑짜기 두렵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에 몸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발이 뛰어지질 않습디다. 그런데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그랬습니다. 옛날 고향집에 큰 헛간이 있었습니다. 땔깜 용으로 왕겨를 많이 쌓아 놓았는데 새들이 와서 모이를 쫓습니다. 새들이 모이니까 새들을 노리는 능구렁이 뱀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한 능구렁이가 한 마리 새를 쏘아보니까 그 새가 꼼짝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뱀이 그 새를 집어 삼켰습니다. 공중에 매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날아 가던 참새 3 마리가 더 이상 날아가지 못하고 매 주위를 맴도는 것입니다.
풍랑과 유령을 만난 제자들의 상태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물위로 걸어오는 그 물체가 말하기를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자 마자 베드로가 주여 당신이시거든 나로 하여금 물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했습니다. 주님이 오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와 유령의 공포로 인해 사고작용이 마비되어 있을 때에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풍랑이나 유령에 대해 전혀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물위로 걸어오시는 분이 주님이신 것을 확신하자 말자 자신이 물위로 걷고 싶은 생각을 가졌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람은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을 베드로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인 베드로가 물위로 걷겠다는 생각을 가집니까? 예수님은 베드로에 대한 이런 점을 귀하게 여기시고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베드로의 이런 점이 두드러지게 많이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17:18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변화산에 올라 가셔서 변형되시는데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예수님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예수님이 원하시면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을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짓겠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그 천국같은 광경을 오랫동안 자기 가까이 잡아두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또 한번은 마태복음 16:13-16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로 보더냐 했습니다. 어떤 이는 엘이야라 어떤 이는 모세라 어떤 이는 예례미야라 어떤 이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 합디다 했더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기를 너희는 나를 누구로 보느냐고 했을 때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했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예수님은 베드로를 극히 칭찬했습니다. 요한복음 18:9, 10에 예수님이 군인들에게 포위되어 체포되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칼로 대제사장의 하인인 말고의 귀를 베어 버립니다. 이 때에 베드로는 군인들에게 포위되어 있던 상태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칼을 빼어 든 것은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감히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행위입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예수님만 생각했습니다. 이런 점을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랑하신 것 같습니다.
셋째로 위기는 기회이다.
우리에게 오는 위기는 기회입니다. 무슨 기회냐 하면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할 기회입니다. 베드로가 배 안에 있었다면 물위를 걷는 기적을 맛볼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물 위로 뛰어내렸기에 사람으로서 감히 물위를 걷는 기적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물위로 풍덩 뛰어내릴 때에 다른 열 한 제자들은 배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 안에 있었다고 해서 안전했습니까? 아닙니다. 조금 전 만해도 모두 배가 뒤집히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배안에 남아 있었던 제자들이나 물위로 뛰어내린 베드로나 위험하기는 마찬가집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이 있던 배 안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배 밖에, 풍랑이는 바다 위에 예수님이 서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배 안이 더 안전합니까 아니면 풍랑일고 파도치는 바다 위가 더 안전합니까? 아무리 배안이 안전하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면 아무 곳도 안전할 수 없습니다. 어디에 있던지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 안전한 곳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은 어디에 있어도 안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이 세상의 주인이요 왕이요 신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오라고 해서 대뜸 물위로 뛰어내릴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기도할 때에 자신이 무슨 기도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비를 내려 주십사고 산에 올라가 기도하려 한 무리의 교인들이 나섰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우산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도는 건성으로 하지만 응답 받을 줄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기도한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응답에 대한 반응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는데 그 응답에 대해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오게 해달라고 말해놓고 예수님이 오라 했을 때에 주저하지 않고 물 위로 뛰어내린 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넷째로 끝까지 주님만 바라보라.
본문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생각해야 할 것은 물위로 걷던 베드로가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왜냐하면 몰려오는 파도를 보고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파도는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자체가 문제입니다. 세상에 사는 것 자체가 위기입니다. 여기 한 사람도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공동묘지에 묻혀 있는 사람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와 위기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와 같이 위기 위를 걷고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의 삶은 주님만 똑 바로 보고 걸어가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파도는 사방에 있습니다. 그 파도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믿고 주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물위를 걷는 다는 것은 굉장한 믿음입니다. 아무나 물위로 걷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만하고 뽐낼 만합니다. 뽐내고 자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요 자신을 바라보는 행동입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만 바라봐야할 시선을 딴곳으로 돌리자 마자 사탄은 두려움을 뿌리고 걱정 근심의 안개를 뿌립니다. 물위로 걷는 것만큼 굉장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인생이 잘나가고 일이 잘 풀리고 출세하고 승승장구할 때일 수록 조심하고 주님을 더욱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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