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11

누가복음 20:20-47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 육 개월 전에 누가복음 9:51에서 예루살렘을 향 하여 가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길에 각 성과 각 촌을 다니시면서 말씀도 전하시고 병자도 고치시면서 주로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교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으로 가시지만 제자들은 이 땅에 남아서 교회를 이루어 가야 할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셔서 고난 주간의 첫 날인 일요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예수님은 고난주간의 둘째 날인 월요일 아침에 베다니에서 야숙하신 후에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는 길에 시장하여 잎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찾았지만 열매가 없으므로 저주하였습니다. 마가 복음에 의하면 그 이튿 날 성전으로 가는 길에 어제 저주한 무화과 나무가 완전히 죽어 있는 것을 제자들이 발견했습 니다.

고난 주간의 셋째 날인 화요일에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시고 행하신 일들을 누가복음 20: 1-18 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성전에 가셔서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에 바리새인과 대제 사장이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메시야직을 숨겨 왔었습니다. 그러 나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부터는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고자 주저 없이 구속주로서의 본성 과 사역과 제 2위 하나님이시며  온 세상의 구주이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기점으로 구약이 성취되고 최종 천국 구원을 이룰 신약시대가 시작됨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일 로 인해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갈등이 일촉 적발의 기세로 고조되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며칠 후에 예수님은 십자가 수난을 받게 됩니다. 누가복음 20장은 이런 상황 하에 서 예수님과 유대 종교지도자들 사이의 각종 논쟁이 있게 됩니다. 누가복음20:1-19까지는 바 리새인들이 예수님의 권세의 출처가 어딘가에 대한 논쟁과 예수님의 악한 농부에 대한 비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납세에 관한 논쟁 (누가복음20:20-26)

‘20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 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21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 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22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23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24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25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6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이 단락은 앞 단락의 ‘악한 농부’비유를 통해 책망을 받은  종교지도자들이 더욱 분노하여 다시 세금 납세에 대한 정치적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 논쟁을 벌이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저희가 엿보다가’했는데 이것은 짐승을 잡기 위해 올무를 놓고 엿보는 자세를 가리킵니 다.  백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반박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유대교권자들이 예수님 을 죽이기 위해 아주 은밀하고 교활한 악의를 갖고 예수님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 다. 예수님을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 당시 유대나 라는 로마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는 로마 총독의 직접적인 정죄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기회를 잡기 위해 정탐들을 보내어 기회를 노렸는데 이 정탐들은 예수님 을 교활한 방법으로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헤롯당원들과 바리새인들이 공동협력을 하고 있었습 니다.

그들은 기만적이고 아첨하는 태도로 예수님께 접근해서 질문을 합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 는 것이 가하나이까 불가하나이까’했습니다. 당시 로마정부는 유대인들에게 세 가지 세금을 내 게 했습니다. 첫째는 토지세인데 곡식의 십분의 일과 기름과 술의 오분지 일을 징수했고, 소득세 로 수입의 백분의 일을 징수했으며, 인두세로 남자는 14세에서 65세까지, 여자는 12세에서 65세까지 한 데나리온 씩을 징수했습니다. 그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며 이것은 납세를 목적으로 만들었는데 앞에는 황제의 상이 새겨져 있고 ‘존엄한 신의 아들 티베리 우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라 적혀 있고 뒷면에는 ‘최고의 제사장’이라 적혀 있었습니다.

이 한 데라리온은 인두세를 내는 화폐였습니다. 본절의 질문은 선민 이스라엘백성들이 로마 황 제에게 인두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 것이냐 입니다. 사실 이것은 대답하기가 불가능한 질문입니 다. 아니다 해도 걸리고 그렇다고 해도 걸리는 함정질문입니다. 인간의 지혜를 총동원해 짜낸 질문입니다. 당시 로마 황제에게 납세하는 문제는 이스라엘백성들과 로마정부간에 심각한 마찰 을 빗었습니다. 열심당원들은 일체의 납세를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적도 있고, 헤롯당원들은 적극 찬성한 부류였습니다. 하여튼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선민인 자신들이 이방의 군주에게 납세 를 한다는 것에 껄끄럽게 생각했습니다.

납세를 하는 것은 가이사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과 가이사를 동일한 위치에 두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잡한 기류가 형성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런 질문은 사람 들로 긴장감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주위에 둘러선 이스라엘백성들도 예수님의 입장을 알고 싶 어했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이렇게도 대답할 수 없고 저렇게도 대답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예상했던 상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을 메시야로 떠받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실망시킬 수 없어 납세를 거부해야 한 다고 대답할 경우 예수님은 임시적으로 주위의 백성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겠지만 곧바로 황제 에 대한 반란죄에 해당되어 사형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간절히 원하는 쪽의 대답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이들의 의도를 알고 납세를 허용했을 경우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의 입장에서 최선의 결과는 아니지만 대체로 만족할 만한 상황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했지만 예수님을 선지자로 생각하는 유대백성들의 시 선 때문에 잡지 못했지만 납세를 허용한다면 백성들이 더 이상 예수님을 선지자로 생각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간계를 아시고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라고 하시면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납세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납세를 바치라 바치지 말라가 아니고 제 삼의 대답이었습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이 바리 새인들의 공세에서 벗어나기 위한 임기응변적인 대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대답은 탁월한 신적 지혜와 오묘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국가에 대한 의무와 하나 님께 대한 의무가 결코 모순된 것이 아님을 강조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납세문제를 제기한 것이 이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권력이 하나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국가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거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 한 의무의 하나를 이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국가를 제정한 때의 본래의 목적인 세상의 질서를 세워 나감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나갈 때를 말 하는 것 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올무에 걸리지 않고 도리어 그 난제를 명쾌히 해결하심 으로 그들의 수치를 드러냈습니다. 결국 그들은 분통이 터지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둘째로 부활에 관한 논쟁(누가복음 20:27-40)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 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 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 고 32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34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 는 일이 없으며 36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39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이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40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  이 더라.’

앞 단락에서는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합심해서 납세에 관한 정치적인 논쟁을 통해 예수님 을 궁지에 몰아 넣으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나서서 부활문제를 통해 예수님을 공격하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사두개인들은 당시 로마정부와 친화적이 관계를 맺은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경향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귀족들이나 대제사장 무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주의적 전통을 벗어버리고 모세 오경만 인정하며 교리적으로는 내세나 부활이나 천사와 사단과 같은 영적 존재를 믿지 않으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습 니다. 풍요로운 세속적 생활에 만족하여 사후 세계와 같은 영적 일들에 대해 무관심했습니다.

한편 사두개인들은 교리적인 문제로 바리새인들과 자주 충돌했습니다. 예수님을 모함하려던 바 리새인들과 헤롯당의 계획이 실패하자 이제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나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이 보낸 정탐꾼들은 세금납부에 관한 사회적인 문제를 예수님께 물었던 반면, 비영적인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관한 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육체의 부활을 가르치는 예수님을 비방하여 그의 권위를 실추시킴과 동시에 이 기 회를 통해 자신들과 경쟁관계에 있는 바리새인들을 제압하여 자신들의 우월성을 입증하고자 하 는 의도를 가졌습니다. 이 질문은 계대결혼과 부활을 관련시킨 신학적인 문제입니다.

계대결혼은 신명기 25:5-10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결혼한 형제가 후손을 보지 못하고 죽을 경 우 다른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를 취하여 형제의 대를 잇고 여자를 돌보는 제도입니다. 이 모 세의 규례를 제시하면서 만약 부활이 있다면 부활 후의 계대결혼을 한 사람들의 혈통 관계는 어 떻게 되는가에 대하여 질문한 것입니다. 모세 오경에 언급된 계대결혼 제도를 근거로 예수님께 서 가르치는 부활교리가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음을 밝힘으로써 예수님의 교훈의 가치를 떨어뜨 리려고 했습니다. 이 질문은 부활을 믿지도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단지 꾸며낸 이야기 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계대결혼을 제시하고 있는 모세의 율법의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육체의 부활이 얼마나 허구적인 가를 밝힘으로써 자신들이 논쟁의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탈무드의 전승에 의하면 바리새파의 위대한 랍비들에게 사두개인이 예수님께 행한 똑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이 때마다 랍비들의 통상적인 답변은 첫번째 남편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대답은 그 당시 사두개인들에게 많은 비방과 조롱을 받 았는데 아마도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에게서도 같은 대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의 이 질문에 두 가지 오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성경을 편협하게 인용했고, 현세와 내세를 동일한 상태라고 전제했으며, 이미 부활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후에 질문하였기 때문에 이 질문은 모순입니다.

둘째로 질문 자체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기에 성경의 원래 의도를 무시하고 자 신들의 논리에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신명기 25:5-10의 계대결혼에 대한 규정은 부활에 대해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인권이 무시되는 사회에서 과부의 신분과 그의 남편이 속 한 지파와 가문의 재산을 보호해서 경제적, 신분적 불평등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의 저작의도 면에서 볼 때에 이 질문은 부활과 연결시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계대결혼과 부활에 대한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현세와 내세를 분명히 구별함으로써 사두개인 들의 질문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 도 가되’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진리에 무식하면서도 부활의 문제를 묻고 있는 그들의 행위 가 얼마나 어리석은 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35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했는데. 이 구절은 예수님을 믿어 구 원 받아 하늘나라의 복된 삶을 누리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원받은 자들만 부활하는 줄로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구원받은 자들이나 구원받 지 못한 자들이나 모두 부활한다고 요한복음 5:29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을 제외한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가졌던 부활관은 부활을 현세의 무한한 연장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 서 사두개인들은 그 당시의 유대인들의 부활에 관한 일반적인 견해의 약점을 이용하여 예수님께 부할 후의 상태를 가지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이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육체 적이고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므로써 그들의 잘못된 부활관을 비판한 것입니다.

36에서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했습니다. 결국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이 세상의 고통과 환난에서 벗어나 해방될 것입니다. 아울러 영화롭게 부활한 육체는 이제 더 이상 가시적 인 것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한 의인이 거주하는 처소는 영원하고 영화로운 거주지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한 성도들은 더 이상 결혼과 같은 이 세상의 제도에 얽매이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결혼제도는 인류를 보존하고 번성시키기 위한 창조의 법칙이었습니다. 창 세기 1;28에,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 여 땅에 충만하라….’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 때는 이미 창조의 법칙이 완성된 때요, 죽음이 사람을 지배할 수 없는 때입니다. 그 러므로 그 때에는 인류보존 목적에서 제정된 결혼제도가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물론 결혼을 통 한 쾌락이나 만족은 더 새롭고 영원한 즐거움과 기쁨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천사와 동등이요’란 말씀은 우리가 천사와 똑같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말은 우리가 사망과 질병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며 결혼과 출생이 필요한 제한된 존재의 상태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 는 면에서 천사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에는 천사가 갖고 있는 속성을 부활한 성도 들도 갖게 될 것이지만 지위에 있어서는 천사보디 높은 위치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부리는 종으로 창조되었지만 부활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되었기 때문 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한 성도들을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부활한 자녀라는 것은 성도의 특권을 말하며 하나님의 자녀란 성도의 신분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활의 생명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이 말을 통해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37절과 38절 말씀에, ‘37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 니’했습니다.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모세의 율법에서 계대결혼문제를 꺼내어 부활을 부인 하는 질문을 예수님께 했기에 예수님도 사두개인들이 절대적인 가치를 두고 신뢰하는 모세 오경 가운데 출애굽기 3:6 말씀을 통해 율법에서도 육체의 부활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심으 로 사두개인들의 잘못된 사상을 날카롭게 지적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32에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나는 산 자의 하나님이다.’에서 원문 상으로 현재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현재 사실로서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결국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지금도 살아 있어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도 또한 영광스러운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인정치 않는 사두개인들에게 율법이야말로 인간의 영원성과 부활의 사실을 강 력히 뒷바침해 주는 신앙의 열쇠로서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그들의 잘못된 율법 이해를 비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그들의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부활의 참된 의미를 가지고 사두개인들의 꾸며낸 가설의 허구성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나 이삭, 야곱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다가 죽어 장사 지낸 바 된 성도들이 비록 우리 눈에는 죽은 자로 보일지는 몰라도 성도들의 영혼은 하나님 면전에서 살아 있어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의 영원한 관계는 결코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39, 40절 말씀에, ‘39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40그들은 아 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이 말씀에서 서기관 중 어떤이들’이란 성도의 육체의 부활 을 믿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항상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에서 적대관계에 있던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기록된 말씀으로 그들이 이전에 감히 깨달을 수 없었던 명쾌한 부활의 진리를 설명하여 사두개인들의 주장을 여지 없이 물리치자 비록 예수님에 대해 적의를 갖고 있던 그들이지만 이 순간 만큼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존경을 표시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은 부활을 믿기는 했지만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물었던 계대결혼문제를 가지고 부활을 부인하 는 사두개인들에게 명쾌한 대답을 주지 못함으로 항상 사두개인들에게 조롱을 받아왔는데 예수 님의 부활진리에 감복했던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오늘날 교인들 중에도 부활을 의심하고 부인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활을 부 인하는 그 당시의 사두개인들은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최고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요즘으 로 말할 것 같으면 신신학자요 자유신학자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부활신앙은 기독교의 근본 신 앙입니다. 부활이 믿어지는 것이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로마서 10:9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어질 때에 구원을 받은 것이라 했습니다.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14 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 했으며, 고린도전서 15:19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했습니다. 우리의 몸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 진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비참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이 믿어지지 않은 교인 들이 있다면 부활이 믿어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진지하게 기도하시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마음에 부활이 믿어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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