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2:24-38요한보금 13:1-20
우리는 누가복음 9:51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셔서 일요일, 월요일, 화 요일, 그리고 목요일의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 주로 누가복음을 주축으로 하여 마태복음과 마가 복음을 곁들어 주님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누가복음 22:1-23에서 예수님께서 목요일 저녁에 유월절 만찬을 성만찬으로 제정하신 후에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는 시비가 있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내용은 공관복음에는 없고 요한복음에만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부터는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까지의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에 대해서 알아 보기로 하겠 습니다. 이 부분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없고 오직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내용들입니다. 요한복음의 특징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이 출판 된 후에 기록된 책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세 복음서를 읽고 세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을 기록해서 예수님의 살 아 생전의 행적과 교훈을 더욱 밝혀 주는 책입니다. 이제부터 몇 주간 동안 요한복음 13-17장 까지의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와 대제사장으로서 자신과 제자들과 백성들을 위한 기도에 대해 알 아 본 후에 우리는 다시 누가복음 22;39로 돌아 올 것입니다.
첫째로 제자들의 자리 다툼(누가복음 22:24-30)
‘24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너희는 그렇지 않을 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너희는 나의 모든 시 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 리게 하려 하노라.’
성만찬 도중에 예수님이 자신이 제자들에 의해 배반당할 것을 말씀하시자 마자 제자들 사이에서 또 다시 누가 크냐 라는 논쟁이 발생했습니다. 이 논쟁의 발단은 아마도 제자들이 예수님께 자신 들의 충성심을 과시함으로써 자신은 결코 배신자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 것 같습니다. 이 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서열은 세상 나라와 같지 않음을 강조하십니다. 즉 예수 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을 위해 죽으시기까지 낮아지시며 겸손히 섬김의 도를 보이 셨듯이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자신을 낮추는 자가 하나님 나라의 큰 자이고, 하나님 나라에서 대접 받는 자는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자임을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의 충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에서 ‘이방인의 임금’ 은 세상 권력을 잡은 자들을 가리키는데 예수님께서는 세상권력자들이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 어 백성들을 종처럼 만들어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 당 시 유대민족은 로마의 식민지 통치 속에서 심한 억압을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스스로 자신이 신이라 해서 백성들로 자신을 신으로 믿도록 강요했습니다. 세상 권력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겸손하게 백성들을 다스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백성들을 억압, 착취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고 교만히 행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자리 다툼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에서 은인이란 원어의 뜻은 좋은 일을 하는 자, 공로자라는 뜻입니다. 이 은인이란 용어는 세상 권력자들이 스스로에 대해 즐겨 사용하던 칭호로써 심지어 폭군까지도 이런 칭호로 불리어지기를 원했습니다. 세상 권력자들이 악행을 저지르고도 자신의 권력을 이용 해 억지로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선한 일을 행한 자로 칭송 받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 상 권력자들의 거짓된 행위들을 예로 들어 제자들에게 권력의 헛됨과 거짓됨을 깨닫게 하시려고 했습니다.
‘26너희는 그렇지 않을 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 니라. 27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 로 너희 중에 있노라.’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세상 권력자들이 군림하는 것같이 큰 자가 작은 자에게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원리가 적용된다고 하셨습니다. 마태 복음 20:26, 27에서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철저히 자기 겸손과 봉사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에서는 선생이 제자보다 높고 섬김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제 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내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낮아지셨 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 속물로 주려 오셨다고 하셨습니다(마20:28).
누가복음 22:28에서, ‘28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내 아버지께 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이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하나님 나라가 이르렀음을 선포하셨는데 이 일에 제자들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하나님나라의 건설을 위임받아 구 속 사역을 성취하심 같이 이제 제자들에게 이 사명을 위임하여 복음 전파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확장케 하는 사업을 맡기십니다. 30절에서, ‘30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 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섬김의 권세를 맡기시고 그 보상으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 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주님의 권세에 동참케 해 주실 것이라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성만찬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대야에 물을 받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했 습니다. 이제 요한복음 13장으로 가겠습니다.
둘째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다(요13:3-11)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 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 까 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 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 도 씻어 주옵소서. 10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유대지역은 건조하고 먼지가 많으며 주로 샌들 같은 신발을 신고 다녔기에 외출 후 돌아 왔을 때 는 발을 씻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유대인 풍습에 따르면 손님의 발을 씻어 주는 일은 그 집안의 가장 비천한 종에게 맡겨진 책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히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 들의 발 아래 무릎을 꿇은 채 일일이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오로지 출세욕과 교만심에 사로 잡힌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겸손과 봉사의 모습을 친히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이제 곧 십자가에서 흘리게 될 예수님 자신의 피로 온 인류의 죄악을 깨끗이 씻겨 주실 것을 상징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고 종의 형체를 가 져 성육신하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의 자기 비하에 대한 가장 대표적 사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죄씻음의 은총을 거절하는 자는 결코 주님과 더불어 생명적 관계 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발 씻기를 거절하는 베드로에게 단호히 경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렀을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 까,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하면서 베드로가 깜짝 놀랍니다. 감히 주님께서 내 발을 씻을 수 없다고 강력히 반대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은 틀림 없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러한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였던 것은 그가 예수님에 대한 남 다른 애착을 가졌다는 것과 그의 열정적인 성격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 시기를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 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지금은 알 수 없겠지만 오순절에 성령님 강림 이후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구속사역에 대한 보다 확실한 이해의 가능성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완강한 거부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일의 근본적인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세족사건은 예수와 제자들 간의 영적인 관계로 ‘죄씻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맺어지는 성도들의 연합을 교훈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 ‘상관이 없느니라’의 상관의 원어적 뜻은 ‘유산을 상속하거나 약속된 땅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왕국 에 참여하는 것에 적용됩니다. 이처럼 죄씻음을 통해서 구원받은 자는 천국의 기업을 얻게 되는 것인데, 예수님과 함께 천국의 기업을 누리게 될 것이며, 죄씻음 받는 그 순간부터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자신의 발을 씻을 수 없다는 주장을 철회할 뿐 아니라 온몸 을 씻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잘 못 이해했든지 아니면 많이 씻으면 씻을수록 더 큰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 합니다.
9-11절 말씀에,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예수 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 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 하다 하시니라.’했습니다. 여기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말은 상징적으로 구원의 반열에 속한 우리가 일상 생활 가운데서 범한 죄악을 회개하는 것을 가리키고 온 몸이 깨 끗하니라 한 말씀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중생함을 가리킵니다. 한번 중생을 경험한 자는 근본적 인 변화를 이미 겪었으므로 또 다시 거듭남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매일의 삶 속에서 범 한 죄를 회개하는 것이 필요함을 보여 줍니다.
유대인들은 당시 잔치에 참석할 때는 이미 집에서 출발하기 이전에 목욕을 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잔칫집에 도착하여 신발을 벗을 때 발만 씻으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상의 관습 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베드로의 말에 대한 대답과 아울러 제자들 중 한 사람 배신자의 존재에 대해서도 언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의 배신에 대해 밝히신 것은 유다로 하여금 회개케 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이며 동시에 후에 예수님께서 지적 능력이 부족하여 제자로부터 배반 당한 것이 아닌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성만찬 중간에 일어나셔서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에 다시 식탁에 앉으셔서 예수님 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의도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 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했습니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제자들의 발을 씻으면서 특히 베드로와 대화한 내용 속에 영적 씻음과 구속적 의미가 강조되었지만 이제부터 말씀하시는 교훈 속에는 ‘진정한 섬김의 도’에 관해 집중적으로 설명하시면서 행함을 강조하십니다.
발씻음의 사건이 영적 씻음으로 인한 구원의 의미와 더불어 봉사의 삶을 나타내는 이중적인 의미 를 가집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했습니다. 세족식은 교회사를 통해 후대에 시행된 적이 있습니다. 어거스틴 시대에 이미 고난주간 가운데 목요일에 행해진 세족식을 기념하는 ‘세족 목요일’이란 의식이 행해졌습니다. 현재까지도 로마 교황에 의 해 실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동안 영국교회와 모라비안 교도들도 시행했고 일부 침례교회 를 비롯한 개신교의 일부에서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의 예수님의 강조점은 세족식의 반복적인 성례전으로 행하는 것에 있지 않고 예수님의 이 세족식 사건의 두 가지 의미를 나타내려고 한 것입니다. 첫째는 죄씻음의 상징이요 둘째는 섬김의 실천적 행동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죄씻음은 예수님 만이 할 수 있는 것이요 섬김 은 발을 씻는 섬김만이 아니라 모든 방면에서 섬김의 행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 여 주신 섬김의 본의 실천은 세족식 의식의 반복이 아니라 신자들 서로 간의 모든 관계에 계속적 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 경쟁하는 제자들에게 겸 손하여 낮아지며, 서로 섬기고 봉사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죽으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신 유언이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요 13:31-38)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6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 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 숨을 버리겠나이다. 38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본 절에서부터 요한복음 14:31까지에서는 ‘다락방강화’라 하는 예수님의 고별 설교입니다. 이것 은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감람산 강화(마 24:1-25:46, 막13:1-37, 눅 21:5-36)와 마찬가지로 일반 회중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오직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본문은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해 최후의 만찬 자리를 떠난 상황에서 예수께서 나머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또 제자들이 지켜할 사랑의 새 계명을 가르치는 장면입니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 새 계명은 구약의 율법에 나타난 이웃 사랑의 계명과 전혀 별개의 것은 아니 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근거로 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질적으로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있습 니다.
구약의 율법에 나타난 옛 계명인 이웃 사랑의 기준은 인간의 자기 사랑 즉 네 이웃을 네 몸과 같 이 사랑하라에 두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이웃 사랑의 기준을 넘어 주님 자신의 희생적 사랑인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에 기초하고 있습니다.구약의 계명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분석하면 이웃을 위해 죽기 까지는 하지 않습니 다. 우리가 우리 몸을 귀하게 여김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새 계명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주님은 자신의 몸을 죽이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3:31에, ‘31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 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했습니다. 가롯 유다가 나감으로 다락방에 는 예수님과 11제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배신자가 없어진 순수한 제자들 앞에서 더 깊은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이 얻을 영광은 앞으로 있을 예수님의 죽음 과 부활, 승천 등의 일련의 행위들을 통해 나타납니다.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받으셨 도다’라는 하나님도 예수님의 순종하심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 승천 등 영광의 현시로 나타날 일들이 이제 매우 임박했음을 알려 주시고 계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십니다. 34, 35절 말씀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 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했습니다. 요한복음 13:34, 35부터시작해서 요14-16장까지 예수님 의 긴 강화가 시작됩니다. 이 새 계명에 관한 말씀이 14장에서 16장까지의 강화의 근본 사상이 며 이 새 계명 사상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14:15, 21, 15: 10, 12입니다. 사도요 한은 예수님의 이 새 계명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후에 쓰여진 요한 일서2:7-11에서 예수님이 주신 이 사랑의 계명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2:7-11말씀에,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 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 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9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예수님의 이 새 계명은 과거로부터 들은 바 말씀인 옛 계명보다 더 고차원적인 계명입니다. 즉 구약의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고 규정하고 있지만 새 계명은 그 사랑 의 정도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또한 구약의 사랑 계명은 사랑의 범위에 있어서도 구약의 이웃은 동일한 여호와 신앙을 가진 동족인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 계명은 그 범위를 모든 인류에게로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35절에서,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전파할 책무를 지닌 제자가 일차적으로 해야할 일은 스승이신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셨던 사랑을 실천하는 일임을 밝히십니다. 한편 ‘너희가 사랑하면’을 헬 라 원어적으로 직역하면 ‘만약 너희가 사랑을 가지면’입니다. 이 ‘가지면’은 현재형으로서 계속적 인 사랑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한번 해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 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시대의 변증가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기독교의 우월성을 증거한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초에 활약했던 터툴리안은 그의 저서인 ‘변증’에서 사 랑이 제자가 되는 증거라고 주장했습니다. 서기 1세기 중반의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3:13 에 서 사랑이 기독교의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습니다.
넷째로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 예고
요한복음 13:36-38말씀에,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 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예수께서 대 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누가복음 22:31-38에,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 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 이다. 34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 인하리라 하시니라. 35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 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36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 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37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 니라. 38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13장과 누가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실패를 예고하십니다. 베드로가 자신 의 의지와는 달리 사탄이 베드로를 채에 밀 까부르듯하여 베드로가 정신 없이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실수하는 것은 사탄의 강한 역사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 심으로써 베드로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시며 회개할 것을 미리 예고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사탄에게 져서 베드로가 믿음에 실족치 않기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연약함을 측은히 여기시고 주님의 마음과 베드로를 용서하시는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을 부인한 실수를 돌이켜 회개한 후에 앞으로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될 형제들의 믿음을 굳게 하도록 요구 하십니다. 또한 이 말씀은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의 지도자로서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될 형제 들의 믿음을 굳게 하도록 특별한 사명을 받은 자임을 암시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호의적이어서 빈손으로 복음을 전하려 다녀도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사람들 이 제자들에게 냉대와 핍박을 가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36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에서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한 것은 검을 사는 것이 매우 시급한 상황임을 나타낸 말입니다.
이 검은 예수님이 문자적으로 검을 말한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와는 다른 악조건 속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환경에 대한 준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겉옷 을 팔아 검을 사라 말씀하신데 대해 어리석은 반응을 보입니다.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이에 주님이 대답하시기를 족하다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동문서답에 실망스런 대답입니다. 전혀 깨닫 지 못하는 제자들의 반응에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그만 되었다라는 말씀으로 대화를 마친 것입 니다.
결론으로 예수님의 오늘 말씀 중에 제자들이 누가 크냐 다툴 때에 예수님께서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어주셨는데 이 발씻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죄용서와 구원을 의미하며 지속적이 회개를 의미했습니다. 또한 겸손과 섬김의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을 보일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셨는데 이것은 구약의 계명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 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셨듯이 네 이웃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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