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22

요한복음 15:1-27

요한복음 15장은 제 13장에서 17장까지 이어지는 고난주간 제 5일째인 목요일 날 밤에 최후 의 만찬을 하시면서 고별설교와 기도로써 제자들에게 주신 여러 말씀들을 보도하는 연속부분 입 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가롯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예수 부인 등을 미리 아시고 예언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14장에서는 예수 님이 이 세상을 떠나시지만 하나님 나라에 가셔서 우리가 거할 처소를 예비할 것이요 처소를 예 비하면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 리를 떠나 있는 동안에 성령님을 보내시사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지키 시고 보호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 했 습니다.

제 15장과 16장은 다락방 강화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최후 기도를 하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는 도중에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인 15장은 ‘내가 참 포도나무다’라는 예수님의 자기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우리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 다. 첫째 부분은 1-11절까지의 예수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말씀하시고, 둘째 부분은 12-17절까 지에서 성도와 성도들 간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고, 셋째 부분은 성도들과 세상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강조하시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야말로 풍성한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될 뿐만 아니라 세상의 그 어떤 핍박에서도 믿 음을 굳게 지켜 승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요15:1-1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 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 게 하시느니라. 3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 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 구절들은 예수님과 성도들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포도나무의 비유로 이루어 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참 포도나무와 성도들은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에 비유하고 성부 하나님은 포도원농부에 비유하십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을 농부로 그리고 이스라엘백성들을 포 도나무로 비유하는 표현들을 많이 봅니다. 시편 80:8-13, 이사야 5:1-7, 예레미야 2:21, 에스겔 15:1-8, 호세아 10:1에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의 기대와는 달리 좋은 포도 나무를 맺지 못한 불량한 들 포도나무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참 포도나 무로 비유하심으로써, 불순종과 타락의 모습을 보인 구약의 이스라엘과는 달리 온전한 순종과 헌 신을 하나님께 바칠 새 이스라엘의 모범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포도나무의 가지로 비유되는 성도들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생명적 연합을 이루 게 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풍성한 영적 열매들을 삶 속에서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영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 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안에 거할 때만 영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그분과 교통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하겠습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 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했습니다. 포도원 농부 는 죽은 가지, 열매 맺지 않는 가지를 칩니다.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그 자체로서 쓸모 없 을 뿐 아니라 뿌리에서 빨아 올리는 영양분을 쓸데 없이 소모함으로 열매를 맺는 가지에 있어서 도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따라서 좋은 열매를 더욱 풍성케 하기 위해서 열매 맺지 않는 가 지나 죽어서 나무를 병들게 하는 가지는 잘라버려야 합니다. 영적인 열매를 맺지 않는 육적 이스 라엘은 영적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가차 없이 그 모두를 제거해 버리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 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 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안 에 계시듯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주권과 섭리 아래 거해야 하고 하나님이 예수 안에 계시듯이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모셔야 합니다. 이러한 신비한 연합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그의 자녀들인 우리가 하나되는 영광으로까지 확대됩니다.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 루리라’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말씀이 제자들 속에 거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의 말씀이 상호 교차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예수님의 이름도 마 찬가지로 상호적으로 언급됩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도 그의 성도들 속에 인격적으로 말씀으로 현존해 계십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 루리라 입니다. 이 말씀과 유사한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7, 8에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과 마가복음 11:24에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 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 외에도 마태복음 18:19, 누가복음 11:5-13, 요한복음 14:13, 16: 23, 24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들이 문자적으로만 이해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본 절에서 가르치신 대로 구했으나 응답되지 않는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 한 해답으로 야고보서 4:3에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구함이니라 했기 때문 입니다. 야고보서 4:3은 예수님이 교훈하신 기도에 대한 하나의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교 훈은 과장법적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과장법적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어 떤 사실을 절대적으로 표현하고 그것에 내포된 조건은 청중들의 것으로 남겨 두는 셈족어 고유의 어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이 이미 아는 것을 전제하고 ‘잘못된 기 도 방법’이나 기도해서는 안될 목록은 생략하신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이런 생략에도 불구하 고 예수님의 과장법적 표현 양식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9아버 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했습니다. 이 구 절에서는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보여 줍니다. 성도의 열매 맺는 삶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과 성도들의 모든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 돌림에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열매를 많이 맺는 것과 제자가 되는 것은 같은 행동입니다.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 이미 자신이 제자가 되었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예수님이 그 제자들을 사랑하는 근거를 제공합 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신적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 에 거하리라. 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라 설명하십 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가를 설명하십니다. 사랑 안에 거한다 는 것은 좀 추상적인 개념인데 이것을 구체적인 개념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계 명을 지키는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을 잘 지켰다고 하십니다. ‘내가 아 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했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 을 완전히 순종하신 것을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8:29, 10:17,18, 12:49,50, 14: 31, 17:4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최후의 순종인 십자가에로 자발적으로 나가시는 일을 남겨 놓으신 상태에서 자신의 과거를 요약하여 보여 주심으로써 제자들이 앞으로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을 제시하신 것 입니다. 즉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계명인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그의 계명인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 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의 기쁨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랑하라는 계명을 좇아 행하여 주님 사 랑 안에 거하면 그런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열매를 맺으라 고 하시는데 그 열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여기 ‘내 기쁨’ 즉 예수님의 기쁨이란 예수님의 고유 하고 절대적인 신적 기쁨을 말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새 계명(요 15:12-17) 이것은 성도와 성도와의 관계를 말합니다.

‘12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사람이 친 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11절에서 포도나무비유에서 예수님과 성도들의 연합관계에 대해 언급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본문에서는 성도들 상호 간의 관계와 책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도들의 상 호 관계는 예수님의 새 계명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무조건적 이고 희생적인 예수님의 사랑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사랑은 서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극단적이고 초월적인 사랑을 말합니다(13절). 그러나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목 숨을 버리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로부터 기원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무한하신 사랑으로 인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근거해서만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자기 희생적 사랑이 진정한 가치를 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친구의 영혼을 구원하는 차원 에서 이루어지는 희생적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도들이 서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마땅함을 교훈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런 자 들이 누리게 될 축복까지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런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친구가 되어 하 나님의 신령한 비밀들을  깨달을 수 있는 축복을 가리킵니다. 진실된 사랑은 이렇게 위대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심지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친구의 신분으로 연합시키는 일조차 가능하 게 만듭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던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예수 그리 스도와 더불어 천국의 상속자들이 될 수 있도록 만든 것도 실상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 으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했는데 여기서 친구라는 헬라어 단어는 필로스입니다. 야고보서 2: 23에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고 했을 때도 필로스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는 예수님의 친구라고 할 때도 필로스입니다. 요한복음 11;3에서는 필로스와 아가페를 혼용했는데 본절에서의 친구란 말은 우정(필로스)을 나누는 사이 뿐만 아니라 신적 사랑 (아가페)을 베푸는 대상이란 의미도 지닙니다.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 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에서 예수님께서 종과 친구와 비교하십니다. 종이 친구와 다른 점은 주인이 시키는 일에 대해 두려운 마음으로 무조건 열심히 이를 행할 뿐이지 주인의 자세한 계획을 알 수 없습니다. 반면에 친구는 주인의 좋은 의 논 상대임과 동시에 맡겨진 일에 대해 친구를 도운다는 심정으로 기쁨을 가지고 행합니다. 그런 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친구보다 자녀가 하나님께 더 가깝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라고 하시는 것은 자녀라 할지라도 부모의 속 마음과 생각을 나눌 수 없습니다. 나눌 수 있는 자녀가 있고 그렇지 못한 자녀가 있습니다.

그리고 친구라고 하면 자신의 속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말합니다. 친구 같은 아들, 친구 같은 딸, 친구 같은 엄마, 친구 같은 아빠라고 합니다. 창세기 19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계획을 그에게 미리 알려 주심으로 아브라함이 멸망될 소돔성에서 조카 롯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 중에 예수님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에게 친구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 이 하나님 아버지의 비밀과 계획을 들은 것을 친구에게 알려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그분과 생명적 연합을 이룬 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본 받 아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만약 스스로를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라고 여기면서도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모본을 보이신 사랑을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않는 다면 그 사람은 진정 예수님 안에 거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6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 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에서 우리를 택하신 예수님의 주 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신적 선택이 중요함을 가르쳐 줍니다. 인간 사 회에서의 친구는 일반적으로 서로 선택하는 것이 특징이지만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 택의 일방성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근거가 인간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께 만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택한 것은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그 열매가 항상 있게 함이라 했습니다. 이 열 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이런 성도들에게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교훈에서 강조점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 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함으로 성도들이 거하는 곳곳마다  많은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바른 길입니다.

셋째로 세상의 핍박 예고(요 15:18-27)

‘18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12-17절에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 상호간의 관계와 책임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 고 이제는 예수님과 성도들의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예수 님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을 미워할 것을 예언하십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핍박 받는 것은 이미 예 언된 것이고 이를 죽음의 권세까지 극복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이겨야 함을 암시하는 것입 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 대한 악한 세력의 증오는 사도 요한 시대 뿐만 아니라 역사가 지속되 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특히 악의 세력이 득세할 종말의 때에는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속에 참여하도록 선택된 그의 자녀들은 비록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 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이유는 제자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어두운 세상에서 그들을 택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미워하는 이유는 기 독교인들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은혜가 불신자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보다 훨씬 높은 삶의 표준을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20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 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21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 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했는데 주인의 고난 받는 운명에 종이 동참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에 대한 세상의 핍박은 동 일하게 그의 제자들에게도 행해질 것을 말합니다. 세상이 성도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은 그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아니라면 결코 세상은 성도들을 미워하거나 박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는다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예고를 하시는 것은 성도들이 때때로 무고한 핍박을 세상으로부터 당하게 될지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도록 미리 일러 주 기 위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당할 때에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당하셨던 핍박과 제자들이 당할 핍박이 근본적으로 같다 는 것입니다.

9:4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사울 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했을 때에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박해가 예수님 이 당한 박해의 패턴과 같다는 것을 말해 주는 동시에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그 박해가 곧 예수님 자신에 대한 박해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친히 증거하신 것입니다. 또한 성도 들이 당하는 고통에 현재적으로 동참하신다는 은혜로운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21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 지 못함이라’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해’라는 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이 말 은 하나님의 이름에서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선과 능력과 신실성 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렇듯이 신약의 예수님의 신적 이름에 적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적 지위를 암시합니다. 요한일 서 2:12에서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했으며 계시록 2:3에서는 ‘네 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할 것’ 등에서 주님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을 믿는 성도들에게 미워하고 박해할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따라 이 땅 에 오셨는데 사람들은 이런 구원 섭리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그리스도는 물론 그리스도가 구원자임을 선포하는 자들까지 박해하는 것입니다.

‘22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 느니라. 23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24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 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25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했는데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믿지 않으며, 그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근본적인 죄는 예수님께서 구원의 진리를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것을 거절한 것입니다. 이 거절은 그리스도에 대한 미움에서 기인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그리스 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24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에서 22 절에서는 예수님이 성육신하셔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 죄요, 두 번째 죄는 24절에서 예수님이 오셔서 메시야로서의 엄청난 일들을 행하셨는데 이것을 통해서 하 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시겠다고 언약하신 그 메시야이신 것을 믿어야 하는데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고 왕의 신하의 병을 고쳐 주시고, 38년된 병자를 고치시고, 5천명을 먹이시고, 물 위로 걸어 가시고, 소경을 고치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런 엄청난 표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아버지를 보고도 믿지 않은 것과 같은 심각한 죄 인 것입니다. 아무도 못한 일들이요 이스라엘에서 처음 보는 일을 보고도 오히려 예수님을 미워 하였고 그런 표적들을 통해 충분히 예수가 그 메시야이심을 알 수 있었는데도 이를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이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을 때에 보혜사 성령님으로 하여금 성도들 을 도우며 보호하게 만드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비록 온 세상이 성도들을 에워싸고 대적할지 라도 장차 보혜사 성령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계시면서 도와 주실 터이니 아무 것도 염려할 필요 가 없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에 뿔뿔이 흩 어져 도망쳐 버렸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완전히 변화되어 그 어떤 위협과 박해 앞 에 서도 담대한 자세를 잃지 않았던 것으로써 분명히 입증되었습니다.

‘26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하셨 는데 성령님이 하시는 중요한 역할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보면 첫째로 교회와의 관계 속의 사역입 니다. 성도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시고 성도들 속에 거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성도들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둘째로는 세상과의 관계에서는 제자들을 돕고, 세상에서 예수에 관해 증거하시는 사역입니다.

결론으로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증인으로서 언제나 담대한 삶을 영위하느 냐 아니면 세상의 박해를 두려워하여 그저 형식적이고 무기력한 생활을 이어 가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성령의 능력을 힘입느냐 아니냐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음으로써 죽음을 정복하고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담대하라 내가 세상 을 이기었노라고 선언하신 것처럼 세상의 어떤 핍박, 박해와 조롱에도 굴하지 않고 십자가의 파 수꾼으로 더 높이 주의 이름을 세상에 외치는 증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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