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2:39-62
우리는 누가복음22:1-38절에서 다락방에서 성만찬을 재정하시고 누가복음 22:38절에서 요한 복음 13 장으로 넘어갔습니다. 요한복음 13-17장은 공관복음서에는 없고 요한복음서에만 기록 된 내용입니다. 이 부분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새 계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앞 으로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는 성도들에게 큰 핍박이 있을 것인데 이 핍박을 이기도록 성령님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락방을 떠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는 길에 요한복 음 17장에서 대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로 주님 자신과 제자들과 앞으로 올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 도하십니다. 성도들이 하나로 연합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러 기도하기 시작하십니다. 이제 다시 누가복음 22:39로 옮겨 왔습니다.
첫째로 겟세마네 동산의 최후기도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 하여’
예수님이 감람산에 가서 기도하시는 것이 일상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만큼은 일상적인 것 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에서 체포될 것을 아시고도 자기 몸을 죄인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감람산에 나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감람산 기도는 인간적인 고뇌와 번민에 가득찬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 고난이 인류의 죄악을 구속하기 위한 고난으로 너무 도 심한 인간적인 고통이 따를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고뇌 와 번민 속에서도 결코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고 성부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의탁하심으로써 절대적 순종과 희생의 자세를 보여 주십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가장 모범된 기도의 자세를 보여 주는데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간구하는 점에서 성도들의 기도가 어떤 내용을 가져야 하는 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 당부는 우리 성도들에게 아주 중요한 기도 요소입니다.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가를 보여 줍니다. 주기도에서도 가르쳐 주시기를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구하여 주시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마귀가 신이요 왕입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루 하루 무사히 사 는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하루를 사는 동안 유혹, 미혹 받지 않고 악에서 구원받도록 기도해 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도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말 씀에 따라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다른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가시고 또 세 명의 제자들을 떠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는 예수님이 혼자 떨어져서 세번 기도하셨다고 했고, 첫번째 기도와 세번째 기도의 내용을 기록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세 차례에 걸친 기도 장면을 요약하여 단지 예수님께서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에 강조점을 두어 기록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긴박 한 상황 속에서 아버지와 일대일의 대화를 나누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을 떠 나 돌던 질 만한 가까운 거리에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30-40미터 정도의 거리라고 추정할 수 있으며 적막한 밤공기를 타고 들려 오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 소리를 충분히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기도내용을 기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14;34절에서 이때의 예수님의 고뇌를 가장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33베드로와 야고 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 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 의 죽음의 잔을 함께 마시겠다고 한 자들이었고, 베드로는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큰 소리친 자입니다. 이들은 변화산에서의 영광된 모습과 죽음을 앞두고 고민과 슬픔에 빠진 예수님 의 양면을 보게 되는 특별한 경험을 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있어 특별한 제자들로서 중 요한 사건마다 증인이 되어 후세에 전하게 되는 막중한 책임을 진 자들입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다 했습니다. ‘심히 놀라다’의 원문상 의미는 ‘정신 을 잃고 말문이 막힐 정도로 놀라운 상태’를 말합니다. 또 ‘슬퍼하다’는 마음이 무겁다 .괴로워하 다를 뜻합니다. 바로 죽음을 눈 앞에 두고서 격렬한 정신적 압박 가운데 마음이 짓눌려 있는 극한 고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의 모든 죄의 무게와 고통을 겪어야 하는 처절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했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은 영혼의 고통 이며 지정의의 모든 부분을 망라한 아픔이었습니다.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는 말은 우리 말로 표현하면 고민의 고통으로 죽고 싶을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고통은 육체적 죽음을 앞둔 고민으로 죽을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 예수님의 인성적 고통 이요, 또한 자신의 죽음에 수반될 유대인의 범죄와 제자들의 배반을 예견한 데서 오는 슬픔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한 버리심을 당하는 데서 비롯 된 영적 고독감들이 이런 슬픔의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42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 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 하더라.44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님의 기도는 실로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고난을 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모범적 기도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도 완전한 인간이었기에 겪어야 했던 십자가의 고난을 앞둔 인간적 인 고뇌와 슬픔은 극치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고난의 쓴잔을 옮겨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야 함을 아셨기에 스스로 고난을 자원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 히 맡기시는 겸손과 순종의 모습을 보이십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에서 ‘잔’은 예수님이 담당하실 십자가의 고난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결국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게 해 달라는 호소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인 성이 뚜렷이 나타납니다. 육체적 고통과 죽음을 앞두고 이를 피하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를 도피라는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적극적인 복종이라는 방법 으로 극복하심으로 온 인류에게 구원의 소망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이렇게 열중해서 기도할 때에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님께 나타나 힘을 더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 사역의 완성인 십자가의 고난을 잘 감당하시도록 도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이 그에게 매우 큰 심중의 고민이 되어 온 힘을 기울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에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둔 예수님의 사탄과의 영적 전투는 이미 이 기도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육신의 피곤함과 예수님에 대한 염려와 슬픔으로 인해 잠이 들었습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에서는 잠든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책망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슬픔과 고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 어 드리고자 하는 믿음이었다면 제자들의 슬픔은 인간적인 두려움과 절망감에서 나온 세상의 근 심이었습니다. 믿음은 근심을 하나님께 기도하게 만들지만 세상적 근심은 지치고 피곤하게 할 뿐입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세번이나 똑 같은 기도를 반복하시고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 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면서 마지막 한 시 동안도 자신과 깨어 기도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시면서 한편 동정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렇게 연약했던 제자들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충만을 받았을 때에 주님과 함께 고난에 동참 하고 순교의 자리까지 나아간 역사적 사실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오직 하나님의 능력 을 힘입어야 가능한 것을 깨닫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체포되심(눅 22:47-53)
’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 냐 하시니 49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이제까지 예수님은 감람산에서의 기도를 통해 구속 사역의 완성을 준비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 다. 이제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손에 체포 당하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 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잡으려 온 자들에게 항거하는 제자들을 말리시고 심지어 베드로가 대제 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 쪽 귀를 칼로 쳐서 떨어뜨리자 그것까지 치료하시는 무저항의 희생을 보 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잡으려 온 자들을 성자 하나님의 능력으로 쉽게 물리칠 수 있었지 만 대속의 죽음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잡히십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잡으려 온 자들은 강력한 어 둠의 세력의 손에 잡힌 도구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한 것으로 여러 차례 예언하신 수난이 온전히 성취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왕권이 정치적 권력이나 무력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가르 쳐 줍니다. 예수님의 체포되심은 결코 연약해서가 아니라 오직 인류를 대속하시기 위해 사랑의 발로에서 나온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도 권력이나 무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48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했습니다. 어두운 밤에 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예수님을 쉽게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롯 유다가 입맞춤을 군호로 삼아 병사들에게 예수가 누구인가를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52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예수님은 평소 사람들이 모인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셨고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 과 함께 성전에서 날마다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할 합당한 죄목을 찾지 못했고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의 저항이 두려워 사람들이 없는 밤에 기회를 틈타 예 수님을 잡기로 방책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권세 아래 있던 유대 지도자들이 그 동안 예수님을 체포하지 못하다가 이제 체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속에 예수님께서 십 자가의 고난을 당할 때가 되었기 때문임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사탄의 권세가 하나 님의 섭리와 예정 속에 허용하심에 따라서만 역사할 수 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체포 장면을 좀더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요한복음 18:3-9로 가겠습 니다.
‘3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 냐 5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6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 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9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 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 때에 예수님은 체포하려 온 자들에게 당당하게 나아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묻습니다. 이 것은 예수님이 그들이 찾는 대상이 누구인지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이후 전개되는 체포 사건 이 군인들의 무력이나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한 것 임을 명백하게 하기 위한 의도적 질문인 것입니다. 이에 그들이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 늘 했습니다. 여기 ‘대답하되’에 해당되는 ‘아페크리데산’은 복수형으로서 한 사람의 대답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얼떨결에 대답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내로라’하셨습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즉 ‘에고 에이미’입니다.
이 ‘에고 에이미’는 주님의 메시야성을 선포하시는 때에 하신 답변입니다(요4:26, 8:24,28,58, 9:9). 예수님이 체포될 때에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인류의 구속을 위한 예수님의 단호한 결심을 증거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그들이 엎드려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도덕적 우월성과 신적인 권위가 체포자들을 압도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들은 ‘내노라’ 하는 권위 있는 말씀에 신적 공포감을 느끼고 두려워서 뒤로 넘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다시 똑 같은 질문을 하고 체포자들은 똑 같은 대답을 합니다. ‘누구를 찾느냐,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동일한 질문과 동일한 대답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예 수님은 당신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시며 당당히 죽음에 임하심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 동일한 질 문을 하셨고 당시 체포자들은 예기치 못한 질문에 상당히 놀랐으며 그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으나 두려움에 질려 기계적으로 같은 대답을 반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 이 이를 의도적으로 기록한 것은 예수님의 신적 권위와 당시에 체포된 자가 분명히 예수님이었 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 라 하시니’에서 두번씩이나 반복하여 누구를 찾느냐라고 질문하여 확인하신 주님의 또 다른 의 도는 나사렛 예수라는 체포의 대상을 확인하게 하신 후 그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만임을 강조하 심으로써 열 한 제자들이 함께 체포되는 것을 면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마련해 주신 도피의 기회를 비겁한 것으로 생각한 베드로는 이전에 장담했던 대로 목숨을 건 모험을 감 행합니다. 많은 무장한 군인들을 대항한 용기는 가롯 유다와 비교할 때에 목숨을 걸고 드러낸 행 동이었으며, 베드로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에는 베드로의 이름을 숨겼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 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당시 신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요 한복음이 공관복음에 나타나지 않는 사건들의 목격자적 증언을 제공한다는 기록목적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요한복음서를 기록할 때에는AD90년 이후이므로 베드로가 죽었기에 처벌하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 귀를 베었습니다. 이때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시면서 아버 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 지께서 주신 잔을 마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발적인 것임이 확실히 드러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 든 죄를 사하시기 위한 구속적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당연한 일입니다. 이 때에 행한 예수님의 무저항은 항복이 아니라 실제로는 승리인 것입니다. 원래 범 죄한 인간들에게 돌아가야 할 진노의 잔, 죽음의 잔을 예수님께서 대신에 기꺼이 받으셨기에 우 리는 구원의 잔을 들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8:8,10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 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10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과 누가복음 22: 48-50’예수께 입을 맞추려 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그 중의 한 사람 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무조건 예수님을 버리 고 도망쳤다고 말하는데 고려할 여지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8:8에 의하면 군병들에게 제자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실 그 때에 누가복 음 22:49에 의하면 제자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라고 말합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칼을 빼어 말고의 귀를 칩니다. 이 사실들을 볼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위험한 상황에서 빨리 빠져 나가기를 원하셨는데 제자들과 베드로는 자신들의 신변에 위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칼을 빼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 기는 하나 이들의 말과 행동은 아주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그 현장에 로마 군인 천부 장(요18:12)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군인들이 얼마나 많이 동원되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뜻을 어기는 행동이었습니다. 이 때에 제자들은 빨리 도망을 쳤어야 했습니다. 요한복음 18:26 에 의하면 이일로 베드로의 신분이 노출되었던 것입니다. 그 일로 대제사장 사람들에게 문초를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6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하지만 베드로의 행위는 칭찬받을 만 합니다. 이 상황에서 베드로는 도망을 치던지 자신을 숨겼 으야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말고의 귀를 쳤다는 것은 앞뒤에 일어날 일들을 생각지 않 은 행동입니다. 다른 제자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분이 위태롭게 노출되는 행위입니다. 그런 상 황인데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자신의 신분을 보호 할 수 있는데도 불구 하고 체포되어 가는 예수님의 뒤를 좇아와 대제사장의 집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이 어떻게 되는가 하고서 대제사장 집의 사람들 사이에 어울리다가 결국 그 사람들에게 발각되고 그 일로 인해 예 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서 생각해 볼 때에 베드로는 진정 예수님을 사랑했 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실수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요한복음 16:32-33,에서’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 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 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한 것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을 섭섭하게 생각한 것으로 생각하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 친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의 마음은 제자들이 제 빨리 예수님 곁을 떠나 군병들에게 체포 당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시고 난 후에 제자들이 복음사역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8: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 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에서 이 상황에서의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33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에서도 예수님이 미리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는 것으로 죄 의식을 갖지 않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이 체포당하여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 갈 때에 따라 들어 갔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멀리 도망쳤다면 예수님을 배반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 복음 16:14과 요한복음 20:19에 의하면 열한 제자들이 예루살렘 한 방에 모여 있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이들이 예수님이 죽으시자 뿔뿔이 헤어지지 않고 자기들도 잡힐까봐 두려워하면서 문 을 잠그고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한 주일날 저녁 무렵입니다. 제자들은 비겁하게 도망친 것이 아 니라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예수님의 뜻에 따라 잠시 흩어져 있다가 다시 모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이 믿어지기 전에도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일단 후퇴했다가 다시 즉시로 모였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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