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1-16
우리는 이제까지 공관복음을 중심으로 빌라도의 예수님 심문을 알아 보았습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을 중심으로 빌라도에게 받는 2차 심문을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공관복음의 예수님 심문은 사건 중심이지만 요한복음19장에는 빌라도의 심문과정에서 예수님과 빌라도 사이에 오고 간 대화와 예 수님에 대한 빌라도의 심리 상태를 알아 보겠습니다. 그가 요한복음 18, 19장에서 세 번이나 예수 님의 무죄를 선언했는데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유대인들에게 내어 주어야만 했 던 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채찍질 형벌(요19:1-4)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명도 찾지 못한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월절 특사로 석방시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시도는 무리들이 오히려 바라바의 석방을 원함으로 인해 실패하고 맙니다. 이 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기 위해 2차적으로 시도를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능욕 함으로써 유대인들에게 만족감을 주어 그들의 감정을 무마시킨 후 예수님을 놓아 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 마저 실패하고 맙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채찍질에 대해 헬라어 용어 프 라게로사스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공식적인 형벌을 표현할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십자 가 형에 대한 공식적인 선고가 있은 후에 있는 채찍질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19: 1에서의 채찍질은 헬라어 에마스키고센을 사용하여 십자가 사형선고 후 공식적인 채찍질 외에 당한 채찍질 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에게 두 번이나 채찍질을 당한 것입니다. 바로 그 채찍질이 이 채찍질 것입니다.
로마의 채찍질 형벌은 죄인을 기둥에 묶어 놓고 납 덩어리나 뾰족한 동물의 뼈가 여러 갈래로 달린 채찍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만 맞아도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가끔은 이 형벌의 집 행 중에 죄수가 죽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한 번만 당했어야만 한 채찍질을 두번이나 당했으 니 얼마나 곤비했겠습니까? 빌라도는 예수님을 위한다고 해서 채찍질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큰 형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실 때에 쓰러지고 자빠지게 됨으 로 로마군인들은 죄수가 십자가를 메고 가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므로 구레네 시몬을 잡아 십자 가를 대신 지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 채찍질 형벌은 B.C. 7 00년 전 이사야 53:5의 말 씀을 성취한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2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 고 자색 옷을 입히고’ 했는데 이 가시는 예루살렘 근처의 야생가시인데 잘 휘어져 엮어 머리에 씌 우기 쉬우며 가시는 흉측한 못과 같이 생겼는데 잎사귀는 실제로 왕이나 장군들의 면류관에 사용하 는 모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조롱하며 고통을 가하기에 좋았을 것입니다. 한편 아담과 하와의 타 락으로 인해 이 땅에 뒤덮힌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아담으로서 인류에게 내린 모든 저주를 짊어지신 것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이 옷은 당시 에 왕이나 귀족들만이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입혀진 자색옷은 아마도 헤롯이나 빌라도가 입다가 버린 것이었을 것입니다. 잔악한 로마 군인들은 가시로 된 면류관을 씌우고 낡아 빠진 홍포를 입혔으며 갈대로 왕의 홀을 흉내 내어 손에 쥐게 함으로써 예수님을 능멸했습니다.
그리고 앞에 와서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많은 병사들이 반복해서 가짜 경례 를 하며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했습니다. 마태복음 27:30에 의하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갈대로 머리를 치고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생전에 사람들에게 두번이나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한번은 마태복음 2:1에서 동방박사들에 의해 유대인의 왕이라 경배를 받으셨고 두 번째는 지금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갖은 모욕을 당하시며 조롱 섞인 경배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온 세상 사람들이 진정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할 때가 있을 것이라 예 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선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64에. ‘예수께서 이르 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 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했습니다.
‘4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5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빌라도는 예수님이 가시 관으로 인해 머리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고 자색 옷을 입은 모습으로 관정 밖으로 데려 나오면서 다 시 한번 예수님은 죄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빌라도는 이런 예수님의 참혹한 모습을 통해 무리들의 동정심을 얻어보려 했습니다.
둘째로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굴복됨
‘6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 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농담 섞인 사면 제안을 받아들일 분위기가 아닙니다. 그들은 예 수님의 피, 그것만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에게 있었어도 채찍질이나 조롱만으로 만인의 죄를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가장 비참하게 죽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주님은 점점 그런 죽음에 가까워 가고 있습니다.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 대한 빌라도의 세번째 무 죄 선언입니다(4절, 18:38, 19:6).
빌라도는 자신의 명령이 없으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전부터 정치적인 이유로 유대인들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재미 있는 것은 유대인들도 자신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가이사에게 대한 그의 불충성을 고자질 할까 봐 빌라 도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12절에서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이 두려움을 교묘히 정치적으로 이용합니다. 본래 십자가 형벌은 유대인에 대한 처형법이 아니었습 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러한 이방적인 처형 방법이 유대 땅에서 시행된다는 점에 대해 불괘 하게 생각했으나 로마인들은 골고다 언덕에서 끊임 없이 그렇게 처형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반대로 로마인인 빌라도가 십자가 형 시행을 꺼리는 반면, 유대인들은 오히려 십자 가 형을 요구하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것은 이사야 53:6에서 ‘여호와께서 우리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고, 그는 산자의 땅에서 끊어져 야 했으며(이사야 53:8), 또 그는 구약적 저주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나무에 달려야 했기 때문입니 다(신 21:23, 갈 3:13).
‘7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유대인들은 처음에 정치적인 죄, 즉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유 대인의 왕 그리스도라고 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 의 무죄를 선언하는 것을 본 후 이제는 더 이상 정치적 혐의를 씌운다는 것은 소용이 없음을 알고 그를 율법의 죄목을 씌워 정죄하려는 것입니다. 즉 신성모독죄는 사형에 처한 다는 율법의 죄목을 씌워 정죄하려 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여러 번 자신이 완전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6:64, 요3:16, 5:18, 8:54, 10:30, 33, 36).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 고소 를 심문이 시작될 처음부터 빌라도 앞에 제시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처음에는 이런 종교적인 문제가 이방인 정치가인 빌라도에게 강한 인상을 주어 사형을 유도하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로마 정부가 광활한 영토와 여러 민족들을 통치하는 방법은, 종교문제 등 민족 내부의 문제는 되도록 자체 해결하도록 하고, 백성의 폭동이나 반역의 소지가 있는 중대한 국가적 문제에만 엄격 했던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고소를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 안에 들어갑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의 주장이었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주장이 사형 에 해당된다는 율법의 규정으로 예수님을 합법적으로 사형에 처하려 했던 유대인들의 예상은 빗나 갔습니다. 관정 안으로 들어간 빌라도가 두려워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는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인들의 보편적 사고였던 신이 인간의 몸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 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그가 재판 중에 아내로부터의 전날 밤에 꾼 꿈을 생각나게 했을 것이고 또한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예수님에게서 신적 권능을 느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데도 불구하고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한 선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 빌라도의 우유부단함 과 소심함을 다시 한번 보여 주는 것입니다.
‘8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9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 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에서 군중들에게 굴복한 것이나 마찬 가지인 빌라도는 더 예수님과 대화하기 위해 다시 관정 안으로 들어갑니다. ‘너는 어디로서냐 ’ 하고 묻습 니다. 물론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을 아는 빌라도가 이렇게 묻는 것은 육신적 출처가 아니 라 영적인 기원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인가를 물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빌라도가 하나님과 그 아들에 관한 지식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를 진정으로 받아 들일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초자연적 이적을 소문과 보고로 이미 듣고 있었을 것 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사람이 아니고 신이라면 십자가로도 죽일 수 없을 것이고, 만약 피치 못 해 자신이 십자가 형을 결정하게 되었을 때에 그 화가 자신에게 돌아 오지나 않을 까봐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질문은 영적인 깨달음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육신 적인 안위를 생각해서였습니다.
이런 빌라도이기에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빌 라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대답을 받을 자격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빌라도가 조금만 주의 깊은 사람이었다면 이미 지금까지 나누었던 예수님과의 대화로도 충분히 복음의 본질을 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두 번이나 요한복음에서의 빌라도의 일차심문과 이차 심문에 포커스를 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과 빌라도와의 대화를 상세히 다룬 것은 빌라도에게 안타까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하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건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이 무 죄하다고 사람들 앞에서 선언했건만 예수님을 죽이도록 선고한 것은 그가 주님과의 대면에서 복음 을 영접하는 것을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십자가에 달린 한편 강도는 즉석에서 구원받고 낙 원에 갔는가 하면 마태복음 27:54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일어나는 몇 가지 자연 현 상을 보고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믿음 고백하는 백부장과 그 부하들도 있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침묵은 복음서 기자들에게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예수님은 대제사장 앞에서도 침묵하셨고 헤롯 앞에서도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고 마가복음 15:4에 의하면 일차 빌라도 심문 때도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그 많은 고소에 대해서도 전혀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빌라도가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그 자리에서 자신이 하나 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했을 지라도 그 당시 로마인들이 만신전에서의 경배를 권유하던 분위기에서 이 로마 고관에게 영적 각성을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10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 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 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본문에 나타난 말 가운데서도 다시 한 번 빌라도의 예수 석방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기 전에 먼저 석방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빌라도의 말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음 을 보여 줍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당시 대제사장이나 군중들의 강압적인 요구에 의해 시행 되어 졌으나 궁극적으로는 빌라도가 예수를 살릴 수도 있는 권한을 쥐고 있었음에도 유대인들을 두려워 하고 그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에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가야바나 산헤드린 공회 를 두고 한 말입니다. 유대인 혹은 가야바가 행한 예수님에 대한 죄는 빌라도의 죄보다 더 큽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참 메시야라는 것을 받아들이기에 더욱 좋은 환경에 있었고 모든 지식에도 밝 았는데, 악독한 결심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하고 넘겨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죄에 비해 예 수님의 무죄성을 인정하며 판결을 주저하고 마지 못해 십자가 형을 허용하는 빌리도의 죄는 더 작 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야바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범죄의 동기 제공자이고 빌라도가 수행자라면 빌라도의 죄 역시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습니다.
셋째 예수님에 대한 빌라도의 사형선고
‘12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 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했 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처형을 소리높혀 외쳤을 것이고 빌라도는 지금까지 보다 더 큰 노력으로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군병들에게 군중들이 볼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 덜 고통을 받게 해 주었습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란 이 말은 예수님을 석방하려는 빌라도의 결정적 인 태도에 당황한 유대인들은 평소 로마에 대해 가졌던 증오심을 숨기고 로마 황제에게 가장 충성 스러운 백성들임을 가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군중들은 빌라도를 직접 협박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가이사에게 대한 반역자로 규정하고 이런 반역자를 석방하면 빌라도 자신도 반역에 가담하는 것이 라고 협박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지방행정관에게 있어서 모반의 혐의는 극약과도 같이 위험한 것이 었습니다. 따라서 의지가 약한 빌라도에게 있어서 이러한 백성들의 외침은 치명적인 것입니다.
본래 유대인들이 가이사에게 충성스러운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빌라도였지만 자신에 게 덮어 씌워질 반역의 혐의와 더불어 계속될 유대인들의 폭동과 같은 비협조로 인해 몰락할 자신 의 입지를 생각해 보면 아찔했을 것입니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 니이다.’ 라는 이 말은 빌라도의 의지를 꺾는 결정적인 말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했는 데 이 말은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협박을 이해하고 수납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빌라도의 마음이 이 렇게 변한 것은 디베료 황제에 대한 공포가 예수님에 대한 경외심보다 더 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13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에서 이제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한 최종 사형 판결을 하기 위해 관정 안에 있었던 예 수님을 관정 밖으로 데리고 나와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이 날은 유월절 예비일이라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공식 선언되는 이 때의 중요성 때문에 날짜와 시간을 정확 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날은 유월절 양을 잡는 날로서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과 무교절을 준비하는 유월절 예비일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자마자 가야바의 집에서 심문 을 하고 새벽 이른 시간에 빌라도에게 넘긴 것은 사형이 집행되기에 적절치 못한 유월절 절기가 이르기 전에 예수님을 빨리 처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4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때는 제 육시라 했습니다. 이 시간은 한 밤중으로부터 정오까지를 측정하는 로마식 시간법으로 오 전 6시가 됩니다. 예수님은 오전 6시에 빌라도에게 판결을 받으시고 골고다까지 끌려 가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셨으므로 오전 9시가 되어서야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예수님은 채찍질로 인 해 지칠 대로 지쳐 십자가를 지기도 힘들었습니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에 대한 조롱보다는 유대인들에 대한 빌라도의 멸시가 드러난 말입니다. 또한 그렇게도 예수님을 석방하려는 시도가 수포로 돌아 간데 대한 빌라도의 분노가 포함된 말입니다. ‘이렇게 피투성이의 인간이 바로 너희가 고발하는 가이사의 대적자 유대인의 왕이라니 우습구나’ 라는 표현인 것입니다.
‘15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했습니다. 이것은 빌라도의 조롱에 마음이 상한 유대인들이 말 그대로 폭도가 되어 예수님의 십자가 형을 이루기 위해 이성을 상실한 채 큰 소리를 외치고 있음을 보여 줍 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에서 빌라도는 이제 예수님을 풀어 주려 는 마지막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즉 악을 행하여 처형당할 사람이 왕이라고 불린다면 유대인들 자 신에게 말 할 수 없는 굴욕과 모멸감을 줄 것이라는 점을 착안하여 이제 그런 유대인의 수치감에 호소합니다.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에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과 유대인의 군신 관계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있어 상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보통 백성도 아닌 대제사 장들의 입에서 로마 황제 외에는 왕권을 가진 자가 없다는 이 같은 말이 나온 것은 충격적입니다. 이렇게 저들은 자신들의 교권주의적 독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왕되심 마저 부인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처형하기를 원하는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왕이심에 대한 이 해도 전혀 없는 비열한 인간들임에 틀림없습니다.
‘16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왕이신 하 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반역을 저질렀다면 빌라도는 이제 자신의 공직에 대한 반역을 범한 것입 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로마 사람의 손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본절 은 빌라도가 예수를 유대인에게 넘겨 주었다고 기록합니다. 사도요한은 유대인들을 예수님을 십자 가에 못박은 주체로 묘사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십자가 형벌 과정에서 로마 군병들의 역할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박은 후 옷들을 나누어 가지던 자들이 군병들이었음을 말하고, 십자가형의 집 행 과정에서도 충분한 수효의 군병들이 존재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유대인 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듯이 묘사하는 것은 초대 교회 시대에 행해졌던 설교 때문이었습니 다.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날 모인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교했습니다. 사도행전 2:23에서, ‘그 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라고 했으며, 사도행전 3:14, 15에서는,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 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 님이 왜 죽어야 했으며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유 대인들이 예수님을 못박았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라디오와 텔레비전과 인터넷과 신문이 있어 지구 상의 한 모퉁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뉴 스를 통해서 상세히 알 수 있지만 1세기 때에는 이런 미디어가 전혀 없었으므로 그 당시 예루살렘 에 있었던 사람들도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고 왜 예수님이 24시간도 아닌 시간 안에 갑자기 십자가에 메 달려야만 했는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목요일 밤에 체포 되어 안나스에게 그리고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고 빌라도에게로 끌려가 아침 6시경에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이 금요일 아침 9시경이었습니다. 이렇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에 못박히기 까지 시간을 따지면 15시간쯤 됩니다.
예수님은 주일날에 나귀새끼를 타고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당당하게 예루살렘에 입성 하셔서 월요일과 화요일까지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때는 유월절이라 예루살렘에 수 백만의 사람 들이 운집해 있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금요일 아침 6시에 갑자기 사람들 앞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여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른 법이 어디 있습니까? 사형선고를 하고 즉시로 사형집행을 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 광경을 본 예 루살렘 모든 사람들이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아직도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화요일에 성전에서 들었던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생생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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