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로 비아 돌로로사 (Via Dolorosa) 누가복음 23:26-32
‘26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우리는 6개월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오시는 길에 동참하였 습니다. 주님은 이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가시고 계십니다. 주 님은 이 길을 걷기 위해 하늘 보좌를 내 버리시고 이 땅에 하나님 아버지의 온 인류를 구원하시 려는 뜻에 순종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지상 사역의 크라이막스를 이루기 위해 골고다를 향해 걸어 가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인 사복음서가 이 순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복음서 중에 가장 긴 장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복음서 중에서 누가복음 만이 로마 법정에서 골고다까지 가는 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복음서를 통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의 장면을 순서대로 살펴 보게 될 것입 니다. 이 길을 비아 돌로로사라고 합니다. 당시 관습에 의하면 십자가 형을 언도 받은 죄수는 자기 가 못 박혀 죽을 십자가를 그 처형 장소까지 지고 가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도 십자 가를 지고 가야 했는데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 전에 로마 군인들에게 두번이나 채찍질 당했기에 기 진한 상태에서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성밖으로 끌고 가는 것은 성전이 있어 거룩하게 여겨지는 예루살렘 성안에서는 사형을 집행할 수 없도록 규정한 율법이나 로마의 관례 때문 이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이사야의 메시야 예언에 수록된 ‘도수장으로 끌려 가 는 어린양(이사야 53:7)이라고 하는 예언을 성취시킨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이 이 길을 걸어가실 때에 14번 멈추셨는데 5번째 멈춘 곳에서 시몬이 십 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불가능해 지자 로마군인들이 구 레네 시몬을 억지로 대신 지게 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점령군들이 인력이나 말 등을 징발, 차출 했는데 시몬이 걸려들었습니다.
구레네는 아프리카 동북쪽의 지중해 연안의 도시인데 오늘날의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입니다. 이 곳은 그 당시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시몬은 이들 중 한 사람으로서 유월절 을 지키기 위해 왔던지 아니면 완전이 예루살렘에 이주해 살고 있었을런지도 모릅니다. 마가복음 15:21에서는 시몬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시몬이라 했습니다.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를 지명한 것은 마가복음이 쓰여질 당시 이 둘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던 것 같 습니다.
이것을 미루어 볼 때에 시몬이 예수님을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난 후에 그와 그의 가족들은 예수 님을 믿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는 공짜가 없습니다. 한편 바울이 로마서 16:13에 서 루 포와 그 어머니의 이름을 높였는데 이 루포가 그 루포라면 로마에서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와 루 포 사이에는 면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27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우리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매수된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친 소수의 무리 외에 대부분 의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수님을 존중히 여겼습니다. 화요일에 성전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을 들 었는데 금요일 아침 갑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길 을 같이 걷고 있었으며 또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큰 무리의 여자들이 따라 오고 있었습니다.
‘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예루살렘의 딸’들이란 예루살롐에 거주하는 거민 전체를 말합니다. 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예언 하십니다. 그들은 장차 예루살렘과 자신들에게 임할 환난을 예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날은 바로 멸망의 날이요 심판의 날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완전 히 멸절시킬 것이기 때문에 그 중에서 수태치 못했던 여인들은 자기들에게 오히려 자녀가 없다는 것을 그래도 다행으로 여길 것이라 했습니다.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한 말씀은 인간이 당하게 될 절망과 고통의 비참 한 상태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31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32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푸른 나무’는 ‘물이 오른 나무’ 또는 ‘생명력 있는 나무’를 의미하는데 이는 흔히 ‘의인’을 가리킵 니다. 마른 나무는 쉽게 불이 붙는 나무라는 뜻으로서 일반적으로 죄인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푸는 나무는 예수님을 가리키고 마른 나무는 패역한 유대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음에도 멸시 조롱하며 또한 이렇게 십자가 처형까지 이행하고 있는데 하물며 공의로우신 하나 님께서 패역하고 방탕한 유대인들을 심판하실 때 그것이 매우 무섭고 비참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는 교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십자가에 못박을 준비 (마태복음 27:33-37)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 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거기 앉아 지키더라. 37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제 예수님이 골고다에 도착하셨습니다. 골고다는 아람어 ‘길갈타’를 헬라 말로 음역한 것으로 ‘해 골’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없는 말이지만 ‘갈보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해골을 의미하는 라틴어 ‘갈바리아’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골고다의 지리적 배경에 대해서는 이곳의 지형 이 해골모양의 언덕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골고다의 언덕은 예루살렘에서 가깝고 길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북쪽 성밖의 지역인 다메섹 문의 북동쪽에 있는 해골처럼 전면에 두 개의 움푹한 동굴을 가진 동산(고든 장군이 발견했기에 고든의 갈보리)이라고 불리 우는 곳입니다.
골고다에 도착하자마자 로마군인들이 십자가에 못박기 전에 예수님께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합 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맛만 보시고 그 포도주를 거절하십니다. 한편 몰약을 십자가 형을 당하는 자에게 주는 것은 하나의 관례화 된 일로 죄수들의 고통을 감소시키려 주는 일종의 마취제로 제공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쓴 포도주를 맛보시고 그것을 거절한 것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음으로 써 만찬 석상에서 하신 말씀, 곧 아버지의 나라에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 겠다고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요,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내리신 ‘잔’을 회피하지 않고 한 방울도 남김 없이 다 마시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에 굴복하여 포 도주를 마시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고통을 받아들여 담대하게 맞서신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쓸 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 하신 시편 69:21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 해서였습니다.
이 십자가 형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황제가 주님의 죽음을 기리는 뜻에서 폐지하기 까지 로 마가 지배하는 여러 지역에서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죄패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았습니 다. 이 죄패는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에 달릴 죄수들의 죄명과 그 사람의 이름을 적어 목에 걸고 십자가를 메고 형장까지 가서 십자가에 붙였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9:19-22에 의하면‘나사렛 예 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로마어, 헬라어, 히브리어로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빌라도가 붙인 죄패 인데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빌라도가 쓴 죄패가 몹시 못마땅했으므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야 신앙과 예수와는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 였습 니다.
수 많은 순례자들이 읽게 될 그 죄목이 자칫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으리라고 그들은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자신들에게 모독으로 느껴졌을 뿐만 아니라 예수와 자신들을 철저히 분리 시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칭’이라는 단어의 삽입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빌라 도는 나의 쓸 것을 썼다고 하여 그가 선고한 예수의 죄패에 성명(예수) 출신지(나사렛), 사형죄목 (유대인의 왕)을 모두 적었다고 판단했으므로 유대인들의 요구를 무시했습니다. 여기에서 빌라도 의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적개심과 완고함이 잘 드러나 보이는 대목입니다.
셋쩨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누가복음 23:32-34)
‘32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 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이제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두 행악자도 예수님의 좌우편에 매달았습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에서는 이 사람들을 강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당시 최고의 형벌을 받 고 있는 것을 볼 때에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반란음모죄나 정치범을 말합니다. 또한 이런 강도 사 이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은 이들이 예수님을 강도와 똑같은 부류로 취급하여 그의 처형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유도하려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계략이 숨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실은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가 범죄자 중의 하나로 여김을 받으리라는 이사야 53:12의 성 취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주님이 달리신 이 죄인들 사이의 자리는 죄인을 구하기 위 해 이 땅에 오신 주님께 합당한 자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덕분에 살아난 바라바가 이 두 강도들과 함께 못박힐 계획이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바라바는 살고 대신에 바라바 자리에 예수님이 못 박히신 것입니다.
‘34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 이니이 다 하시더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마디의 말씀 중에서 첫째 말입니다. 그 리고 이 말씀은 이사야 53:12의 궁극적인 성취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무리들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죄를 짓는 모든 인간들에 대한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보여 주는 말 씀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죽이면서도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자 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못박은 후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있습니다. 그 당시 십자가 형은 죄수의 옷을 벗긴 후에 집행했었는데 그 죄수의 옷을 사형집행자들이 나누어 갖는 것은 일반적인 관습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요한복음 19:23, 24말씀을 잘 못 이해해서 예수님의 옷을 네 등분하여 네 깃씩 찢어 나눈 줄로 생각했습니다. ‘23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 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군인 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이 요한복음 19:23, 24에서 ‘옷’은 주로 외투를 가리키지만 두건이나 신발, 요대 등 그 사람이 입 고 있는 옷 전체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서 네 깃씩 나눈다는 것은 네 명의 군인들이 각각 신발(샌들)이나 두건이나 요대나 겉옷을 나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속옷은 하나요 호지 않았 고 위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네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차지 하기 위해 제비 뽑은 것입니다. 그리 고 당시 군병들이 네 사람씩 한 무리로 있었음을 나타내며 그 네명의 무리 중에 책임장교가 백부장 이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이 백부장은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에 일어나는 자연 현상들 즉 낮이 어 두워지고 지진이 일어나고 무덤이 터지는 현상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넷째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모욕하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희롱하면서 즐기고 있습니다. 하나의 축제를 즐기고 있는 기분입니다. 로마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콜로세움광장에 세우고 사자 들이 그들을 뜯어먹는 광경을 즐겼던 그런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하기야 예수님이 십 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모든 인류의 죄값을 치루기 위함이었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됨으로 기쁘고 즐겁고 환호해야 할 일이지만 지금은 아닌 것입니다. 이들에게 닥칠 엄청난 재앙이 그들을 삼키기 위해 입을 벌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날뛰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3:35-38에서, ’ 35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첫째 그룹은 백성은 서서 구경한다고 했습니다. ‘서서 구경한다’는 말은 헬라문법에서 미완료형으 로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현혹된 백성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흥미를 가지고 계속하 여 처다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5:29에서는 이들이 비웃기를,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하고,’했습니다. 이말은 산헤드린공회에서 예수님을 고소하던 내용입니다. 이들이 십자가 형장에까지 따라와서 비웃으며 즐거워합니다. 그들의 뜻대 로 예수님을 처형하게 됨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둘째 그룹은 지나가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마태복음 27: 39-40,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했는데 예수님이 못박히신 골고다는 예루살렘성과 가 까운 장소였습니다(요19:20). 그 근처는 많은 행인들이 지나가는 대로변이 있었습입니다. 그러므 로 지나가는 자들이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조롱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머리를 흔들며’라는 표현은 매우 강한 조롱과 멸시의 행위입니다 .이것은 시편 22:6-8의 예언의 성취입 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 지나가는 자들이 사형장에서 사람들이 말하 기를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하고 비웃는 소리를 듣고 자신들도 그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만일 네가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지을 수 있는 자라면 십자가에서 내려 옴으로써 너의 능력을 보 이라’란 의미인데 이것은 그들이 생각한 메시야관의 단면을 보게 해 줍니다. 즉 그들은 초능력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초월적인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신적 능력의 소유자로 메시야를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7:40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사탄이 예수님을 성전꼭대기에서 시험할 때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거든 뛰어내리라고(마4:6) 한 말과 같습니다.
셋째 그룹은 로마 군인들입니다. 누가복음 23:36, 37에, ‘ 36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 주를 주며 37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그의 위에 이는 유대 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했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며 신 포도주를 주는 군인들의 모습은 누가 만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부르며 희롱하는데 이 말은 빌라도 법정에서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께 홍포를 입히고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그 앞에 경배하며 희롱할 때에 했던 말입니다. 이 말은 대제사장무리들이 빌라도에게 고소한 말입니다. 빌라도가 별 볼일 없는 인간을 데려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다고 해서 가이사의 반역자로 십자가에 못박으 라고 고소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을 비웃기 위해 사용한 말입니다.
넷째 그룹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산헤드린공회원들입니다. 마태복음 27: 41-43, ‘그와 같이 대 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 이라 하였도다 하며’했습니다. 여기서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한 말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에 수 많은 사람들을 질병에서, 불구에서, 귀신들에게서 구원했습 니다. 심지어는 죽은 자들을 살려 낸 것을 빗대어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말과 같이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려 오신 것입니다.
이들이 비웃기를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라고 했는데 이스라엘의 왕은 유대인의 왕보다 더 함축적인 의미로서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왕’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네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면 십자가에서 내려 올수 있지 않겠느냐 내려와 봐라 그러면 우리 가 너를 믿어줄게 하는 의미입니다.
다섯째 그룹은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조롱은 현장에 있는 무리들로 시작 해서 지나가던 나그네들, 군인들, 유대 교권자들에 이어 이제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죄인들 까지 합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리들의 비난이 예수님께 쏟아지자 상대적으로 우월감에 빠져 덩달아 예수님을 비난한 듯 합니다. 마태, 마가복음에는 처음에는 두 강도가 합세해서 예수님을 비방했지 만 누가복음에서는 나중에는 한 강도는 회개하고 용서받아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됩니 다. 누가복음23:39-43,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 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 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 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비방했던 강도를 책망하여 자신의 죄에 대한 온전한 회개의 모습을 보였던 이 강도는 이 제 예수님의 무죄를 입증하고 더 나아가 예수님께 자신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신적 사역을 바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강도의 말 속에는 비록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모함으로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그의 나라를 세우시며, 자기를 구원할 충분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강도들은 로마에 대항하여 자기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열심당원들이기 쉽습니다.
이들은 조국을 위해 온 정신을 쏟다보니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잡혀 십자가에 못박힌 자리에서 예수님을 대하면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와 그 동안 예수님에 대한 소문들을 기억하면 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의 두번째 말씀을 선언하시기를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오늘’이라는 분명한 시간 을 명시함으로써 그가 즉시적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 의 보편적인 원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자신의 죄를 회 개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 하고 영접하기만 하면 즉시로 구원을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섯째로 예수님과 사탄과의 관계
마태복음 27:40에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 에서 내려 오라’고 하였는데 이 말들은 사탄이 예수님께 한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죽 어려 오신 목적과 사탄의 기원과 그의 운명과 그 활동목적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 보기 로 하겠습니다.
첫째 사탄의 기원
사탄은 범죄하기 전에는 그룹천사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가 천상의 천사들 삼분의 일을 규합하 여 반란을 일으킵니다(계시록 12:4). 그 일로 타락하여 사탄이 됩니다. 사탄의 타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사탄이란 말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란 뜻입니다. 그렇 다면 하나님은 이 사탄과 그 졸개들을 당장 불못에 가두어 심판하셔야 할 텐데 일정 시간 동안 그 냥 놔두십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불못에 가두기 위해 지옥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 41, ‘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그러므로 사탄과 그 졸개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탄을 가둘 지옥 만 만들어 놓고 왜 사탄을 가두지 않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에 사용하시기 위해서 입 니다. 그 목적이란 앞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사람들 중에 사탄의 꾀임에 속지 않고 예수님을 끝까지 믿는 하나님의 참 자녀를 고르기 위한 수단으로 사탄을 사용하실 계획이었습니다.
둘째로 사탄의 활동목적
하나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기 위해 할 수 만 있으면 사람을 미혹해서 지옥으로 데려가려고 합니다. 사탄은 자신의 운명이 영원한 지 옥에 들어갈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탄은 자신만 들어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미혹하여 자신과 함께 지옥으로 데려 가려고 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활동목적입 니다. 사탄은 너 죽고 나 죽자 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참 자녀를 얻기 원하셔 서 사탄을 세상에 잠깐 놓아 둔 것입니다.
사탄은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하여 죄짓게 하여 사람을 죄 가운데 빠지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 도를 보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창세기 3:15에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께서 사탄의 머리 를 깨뜨리심으로 인류의 죄값을 치루게 하심으로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 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이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기 전에 사탄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 를 물으리라 했습니다. 이 때로부터 사탄은 여자의 후손이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을 주시하며 경계 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 는데 애굽의 바로왕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사내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나타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헤롯을 통해 베들레헴과 그 인근에 태어난 2살 아래의 모든 사내아이를 다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그것이 실패하자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 하실 무렵 공생애의 사역을 방해하고 유혹해서 타락시켜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하지 못하도록 세 가 지로 시험을 했습니다. 먹는 것으로 시험하여 메시야의 사역을 포기하게 하였고, 성전꼭대기에 세 우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내리라고 하여 명예를 추구하여 메시야의 일을 포기하려했고 나중에는 자신에게 절을 하라고 하여 온 세상을 주겠다 하여 권세적이요 영적이요 종교적인 문제 로 시험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매도하여 어찌 하든지 예수님을 죽 이려고 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게 했는데 이제 사탄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에 대한 전략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오락 가락했습니다. 어떤 때는 죽이려 하다가 어떤 때는 예수님이 십 자가에 죽지 말라고 유혹 하기도 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계획을 죽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탄은 아직 창세기 3:15의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메시야로 오신 예 수님을 죽이는 것이 자신의 전략이었는데 오히려 예수님과 하나님은 십자가에 죽기를 바라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전략이 틀리지나 않았나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 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미혹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3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것이라 예언했을 때에 베드로가 그리하지 마소서 했을 때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했습니다. 마태복음 27:40에서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 영웅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이 말은 예수를 조롱하는 사탄의 유혹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지 말고 신적인 능력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자의 구속사역을 중지시키려는 사탄의 최후적인 발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 따위의 계략에 넘어갈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주님은 당당히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최후 승리를 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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