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로 어머니께 말씀하시다(요한복음 19:25-27)
‘25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아침 9시부터 정오까지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여 제 자들이 멀리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다고 했습니다(마27:55, 막15:40, 눅23:49). 누가 복음 23:49,’ 49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9:25에서는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 밑에 까지 와서 예수님 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정오가 되자 대낮이 갑자기 어둠으로 깔리자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분위기가 어수선 해지면서 사형장에서 많이 떠나갔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형집행을 하고 있던 군인들도 혼비백산한 상태를 보여 주고 있는데 이때에 이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왔던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 27:49에 ‘49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에서 사람들이 떠나가고 그 남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이 부분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목격한 4명의 여인을 기술함으로써 마태복음 (마27:56)과 마가복음(막15:40)에 기록된 십자가 밑의 여인들이 3명인 것과 다소 대조를 이룹 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미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숨어 있는 동안 제자들을 대신해서 그 공간을 채우는 일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 들은 누가복음23:49에서는 ‘예수를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 로 표현함으 로써 이 여자들이 대부분 갈릴리 여자였다는 사실과 그 당시 여자들 뿐만 아니라 요한 (요19:26) 을 비롯해 ‘예수를 아는 자들’로 표현된, 이 말씀 속에 남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아마도 베드로나 다른 남자 제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체포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 때에 형장에 있었던 여인들의 명단에 대해서는 복음서마다 약간 씩 차이가 있습니다. 마 태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데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언급 되어 있고(마27:56), 누가복음에는 ‘예수를 아는 자들, 여자들’로 되어 있고(눅 23:49), 요한복음 에는 ‘예수 모친 마리아,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가 언급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마태, 마가에서 모두 선두에 기록되어 가장 열성적인 예수님의 여제자였던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세베데의 아들들의 어머니(마27:56)는 요한복음에서는 이모로 표현되었고 마가 복음에는 살로메(막15:40)라 하는데 살로메는 세베데의 아내이며,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이며, 예수님의 이모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의 여형제입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의 육신적 이종사 촌 간입니다. 세베데는 예수님의 이모부입니다. 또한 마가복음에서는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 니 마리아’라 했는데 마태복음 27:56에서는 요세 대신에 요셉으로 표기되었습니다. 이것은 요세 는 헬라식 표기이고, 요셉은 히브리식 표기입니다. 한편 야고보 이름 앞에 ‘작은’이란 말이 붙은 것 은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작은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명 인 ‘알페오의 아들 야고보’로 보여집니다(막3:18). 그리고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한복음 19:25에서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로 나온 것으로 보아 글로바와 알페오는 같은 사람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9;26-27에, ‘26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 신 세번째 말씀입니다. 여기 ‘섰는’에 해당되는 헬라어 ‘파레스토타’는 남성 단수형으로 여인들 외 에 이 제자 한 사람 만이 십자가 밑에까지 와 있음을 봅니다. 누가복음 23:49의 ‘예수를 아는 자들’ 중의 남성 제자들 중에 요한 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까지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어머니가 십자가 아래까지 오신 것을 보시고 어머니께 말씀하십니다. 육신적인 아들이 십자가에서 고통 당 하는 것을 목격하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심정은 칼로 찌를 듯이 아팠을 것입니다(눅2:35).
한편 이런 어머니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적인 측면에서의 자식의 도리이기도 한 큰 위로였 습니다. 즉 극렬한 고통 속에서도 어머니의 뒷일을 염려하시는 극진한 효성을 보이십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부모에 대한 자식의 의무와 부모의 책임에 대해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합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에서 ‘여자여’는 헬라어로 ‘귀나이’입니다. 이 귀나이는 불손하거나 냉정한 표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어머니께 죽음에 임박해서 불경한 호칭을 사용했을 리가 없습 니다. 이 호칭은 여인을 부르는 공식적인 표현으로서 예식적이고 극존칭으로 귀부인을 부르는 용 례로 사용되었습니다. 왕이 그의 어머니와 부인에게 부르는 호칭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이 호칭은 여러 번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2:4과 본 절의 호칭은 특별한 의미를 줍니다.
첫 번째의 경우는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첫 번째 이적을 베푸신 가나의 혼인잔치 때였습니다. 그리 고 지금은 공생애를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께 이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 님은 공생애 시작과 마지막 시점에서 마치 왕이 그의 어머니를 부르는 것과 같은 권위 있는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스스로 만왕의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셨으며 진정한 왕으로서 이 지상에서 활동하셨음 을 나타내 보이셨던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이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귀나이라고 부른 것은 더 이 상 자신을 육신의 아들로 보지 말아 달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려 오신 메시야로 서의 공적 사역을 시작할 때를 정하는 순간인 가나 혼인 잔치 때의 이적 때가 그랬고 지금 대속적 죽음을 당하는 순간도 아들에 대한 연민 보다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구속사적 의미에 관심 을 집중시키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한편 사랑하는 제자에게 네 어머니라고 한 것은 요한으로 하여금 어머니를 돌보아 드리게 부탁한 것입니다. 요한에게는 마리아가 이모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리아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자 신의 형제들이 아닌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한 것은 그 당시 그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주님의 형제라는 말씀이 상기됩 니다. 전승에 의하면 요한은 마리아와 함께 11년간 예루살렘에 살았고, 마리아는 59세에 죽어 겟 세마네 동산 입구의 동정녀 무덤에 장사되었다 합니다. 또 다른 전승은 이후에 요한은 목 회하였던 에베소에서 마리아를 계속 모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승에 대한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대낮이 빛을 잃고 어두워짐(마태복음 27:45-49)
‘45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예수님은 우리 시간으로 새벽 6시에 빌라도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즉시로 골고다를 향하여 십자 가를 지고 가서 아침 9시경에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오후 3시경에 운명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45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에서 제 육시는 우리 시간으로 정오를 나타냅니다. 정오부터 오후 3시에 운명하기 까지 온 세상이 갑자기 어두워집니다. 여기서 온 세상이란 온 지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즉 유대 땅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에 대한 온 우주의 슬픔을 나타냅니다.
실로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요 1:9)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에 온 세상이 어두워진 것은 당연 합니다. 특히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는 태양이 가장 뜨겁고 그 빛이 가장 환한 시간이었음에도 불 구하고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표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3시간 동안 어두움이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대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준엄함의 징조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종말에 있을 준엄한 심판의 경고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일식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주장은 터무니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월절은 음력 14일로서 만월에 가까워 달이 지구와 태양 사이에 개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46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 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네번째 말씀을 하셨습니다. ‘엘리’라는 말은 나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라마 사박다니’는 어찌하 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입니다. 원문에 보면 마태복음에서는 히브리음 ‘엘리’로 기록하였으며 마가복 음에서는 이것을 아람어음 ‘엘로이’로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은 유대인 독자들을 위해 히브리음으로 기록했고 마가는 예수님의 본래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구속의 대사명 을 위해 하나님께까지 버림을 받아야 할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한편 이러한 본 절은 시편 22: 1인,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 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의 성취입니다.
여기서의 예수님의 이 절규는 자신의 죄가 아니라 온 인류가 범한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는 고통의 궁극적 깊이를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이처럼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을 겪음 으로써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을 다시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예 수님은 성부의 아들 성자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 왔으나 여기서는 온 세상의 죄인을 대표하 는 의미에서 공적인 명칭인 ‘하나님’으로 불렀습니다.
‘47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라 초자연적인 어두움 이 임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질려 슬금슬금 그 현장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 하고 아직도 간 큰 사람들이 십자가 현장 주위에 머물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들이 얼마나 악함이 극렬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엘리야는 알았으나 ‘엘로이’를 엘리야로 잘 못 들은 것으로 보아 헬라계 유대인들일 가능 성이 큽니다. 엘리야는 살아서 하늘로 올라간 선지자로서 유대인들은 고통 당하는 자들을 구원하 기 위해 그가 다시 오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에 그가 엘리야인가 라고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말라기 4:5의 ‘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에 의해 그들의 종말관에 엘리야를 연결시 키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밑에 있던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외침을 이러한 시각에 서 듣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한 의도에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님 의 죽음에 대한 초자연적인 현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서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예수님을 조롱하 는 이들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극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48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이 말씀에서 ‘그 남은 사람들’이란 표현은 많은 의미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온 세상에 어둠이 깔 리자 두려움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사형장에서 슬금슬금 빠져 나가고 간 큰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해면은 일종의 스폰지로서 높이 달린 예수님께 직접 마시우게 할 수 없으므로 신 포도주를 적셔 예수님의 입에 대주어 빨아 먹게 한 것입니다. 또한 신 포도주는 마취성 약술이 아니라 물이 귀한 팔레스타인에서 물의 대용으로 마시는 신 포도주에 계란과 물을 섞어 만든 로마 병사들의 일상적인 음료입니다. 그렇다면 그 한 사람은 로마군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명 백한 것은 그들에게 정말 엘리야가 등장하는가에 대한 천박한 호기심이 있었고, 또 가상 칠언 가운 데 4번째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란 외침과 5번째 내가 목 마르다 란 말이 있은 후에 이 사건이 있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다(요한복음 19:28-30)
’28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예수님의 가상칠언 중에서 요한만이 기록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마지막 고뇌가 잘 나타나고 있습 니다. 즉 ‘내가 목마르다’와 ‘다 이루었다’가 바로 그것입니다. ‘모든 일이 다 이룬 줄 아시고’에서 예수님은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을 십자가에 달려 계셨고 이는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 한 12시를 기준으로 할 때에 두 부분 중의 한 부분입니다. 마태와 마가가 기록하는 대로 천지에 임한 어두움 가운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부르짖은 예수님께서는(마27:45, 46)이제 그의 사역이 완전히 성취되어 가는 줄을 아셨습니다. 한편 여기서 ‘모든 일’이란 예수님의 지상 생활 동 안 행하신 모든 일을 가리킵니다. 특히 십자가 상에서 그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사역을 말 합니다.
예수님은 이 고난의 의무가 완성에 가까워 온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목마르다’은 예수님의 죽음 마지막 장면에서 어둠이 임하고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고 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나고 백부장이 감격적인 고백을 하는 것들인 신성적인 승리의 장면들을 생략하고 요한은 대신에 예수님 자신의 인간적인 측면을 부각시킵니다. 즉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영혼의 갈등과 고뇌가 내포되 어 있고, 많은 출혈로 인한 극심한 육체적 고통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목마르다 하 신 것은 가상 칠언 중의 다섯 번째 말씀이요, 시편 22:15과 시편 69:21의 말씀을 응하게 하려고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9:29에, ‘29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이 신 포도주는 로마 군인들이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준비한 저급한 술입니다. 때때로 처형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등장하는 신 포도주 는 마태와 마가가 기록하는 쓸개 탄 포도주나 몰약 탄 포도주와는 다릅니다. 이 신 포도주는 형이 집해 되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것으로서 예수님께서 마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 마가복음에서 형 이 집행되기 전에 주는 쓸개 탄 포도주는 예수님이 거절하셨습니다. 군인들은 십자가에 올라가서 마시우게 할 수 없으므로 스폰지로 사용하는 해면에 포도주를 적셔 우슬초 끝에 매어 예수님의 입 에 대었습니다. 한편 우슬초는 마조람이라고 불리는 긴 식물로 견고한 줄기를 가지고 있으며 공관 복음서가 기록하는 갈대와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우슬초의 길이를 미루어 살핀다면 주님의 십자가 형틀의 높이가 3m를 넘지 않았을 것이므로 십자가의 전체 높이는 길어야 4m이내 였을 것입니다. 한편 공관복음서에서 갈대로 나와 있는 것 을 요한복음서에서 우슬초로 밝힌 것은 출애급기에 우슬초에 적신 어린 양의 피를 문인방과 문설 주에 바름으로써 이스라엘을 죽음에서 건져낸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함인 듯 합니다. 즉 유월절 어 린 양이 상징하는 바 이 땅에 고난의 주로 오신 예수의 희생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로서 갈대라는 보편적 명칭보다 우슬초란 구체적인 이름을 밝힌 것입니다.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테텔레스타이 인데 ‘단 번에 완전히 끝마친다’라는 강조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인류 의 구속적 사업이 다 이루어졌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께 대한 구속 사역의 완성 을 보고 하신 것이기도 하며, 죄의 권세이며 예수의 구속 사역을 계속 방해하여 왔던 사탄에 대한 도전장이 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희생으로 인한 위대한 승리는 복음의 핵심입니 다. 그리스도로 인해 인류의 모든 죄와 결핍의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3:46에서 예수님은 일곱 번째 마지막 가상 칠언을 하셨습니다. ‘46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이것은 시편 31:5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지만 또 한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궁극적인 의미를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3:15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인류구속을 위해 여자의 후손인 메시야를 보내어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리라는 예언에 따라 때가 차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즉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모든 죄값을 치루심으로 인류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속 하시고 이제 모든 일을 다 이루시고 다시 하늘나라로 귀향하시는 뜻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넷째로 예수님 운명하실 때의 초자연 현상들(마태복음 27:50-54)
‘50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백부 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님이 운명하시면서 발생한 첫째 초자연적 현상은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의 낮이 어두 움으로 변한 것입니다.
두번째는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입니다. 성막시대로부터 당시 성전에 이르기 까지 성전에는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안쪽 휘장과 성소로부터 안뜰을 구분하는 바깥쪽 휘장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휘장인 카타페타스마는 외부 휘장인 칼륌마와 구별이 되나 여 기서 는 특별히 양쪽 휘장을 다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제사장들만이 출입이 가능한 성소 와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만 들어가는 지성소 사이에 있는 안쪽 휘장만 찢어졌다면 이것은 보 통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키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 무리들이 이 사실을 극비에 부쳤을 것 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이 이 사건을 비교적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점에서 볼 때에 바깥쪽 휘장도 함께 찢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쪽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르는 것으로서 일년 중에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단 한 차례만 들어 갈 수 있는 지성소입니다. 그 크기는 길이가 12.5m, 폭 1.8m 주름이 72 주름, 두께는 성인의 손바닥 두께 정도였으며. 매우 귀한 재료를 사용했다 합니다. 이 휘장은 24 가닥의 실로 엮은 끈 82개로 정교히 짜여져서 그 두깨가 손바닥 만큼 되었기 때문에 위에서 아래 로 순식 간에 찢어진다는 것은 이적 중의 이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휘장이 찢어진 것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바 성전 파괴의 전조임을 나타내며, 구약의 성전 제사 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더 이상 그 의미가 없다는 것이요, 지성소의 휘장이 상징하는 바 그리 스도의 육체의 찢기심으로 할례와 성전을 중심으로 한 혈통적 이스라엘, 즉 선민 의식은 이제 끝 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위선으로 가득 찼던 성전이 파괴되어 이제는 더 이상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 가 되지 못하고 멸망 받을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대제사장 만 일년에 한 번 들 어갈 수 있었던 불완전했던 구약의 제사가 끝나고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가 제사장 이 되어(벧전 2:9)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 로 찢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셨음을 의미합니다.
세번째 초자연 현상은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는 현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셨던 지성소 뿐만 아니라 성소 밖에서도 하나님의 역사함이 일어났습니다.
네번째 자연현상은 무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마태복음 27:51의 지 진으로 인해 무덤의 입구를 막았던 돌문이 굴러 열렸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무덤들은 자연 동 굴이나 파낸 동굴에 시체를 안치하고 둥근 돌로 막았습니다. 지진으로 무덤이 열렸다는 것은 죽 음의 권세에 대해 종지부를 찍은 표시입니다. 사탄의 최고 무기인 사망의 권세가 깨뜨려졌다는 의 미입니다. 성도들이 다시 살아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 시점에서의 성도들의 부활은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실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27:52의 성도들의 부활은 어떤 부활인가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3-24 의 부활장에서 부활의 순서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23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 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그 후에는 마지 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에서 영 원한 부활 의 첫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다음의 부활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일어나는 성도의 부 활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52절의 부활은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 이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살아 난 것과 같이 생명의 연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다시 살아나서 어느 정도 살다가 다시 죽게 됩니다. 이들이 부활해서 예수님이 하셨듯이 승 천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죽었다가 예수님으로 인해 살다가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공중강림 하실 때에 데살로니가전서 3:16에서와 고린도전서 15:52 때에 완전한 영원부활로 살아 날 것입니다.
다섯번째 예수님의 운명을 목격한 자들의 반응
첫째로 백부장과 함께 예수님을 못박은 군인들의 고백(마27:54)
이들이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자들의 입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고백이 나왔다는 것은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입증하 는 것이요 이방선교의 청신호가 된다 할 것입니다.
둘째로 누가복음 23:48에,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에서 이들은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기 위해 호기심을 갖고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서 있 던 자들입니다. 이들은 평소 예수님을 잘 알고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러나 그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전후해서 일어난 여러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직접 목격하 고서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란 표현은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인해 고민하며 자기들이 행한 죄악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행동을 묘사하 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예수님의 장례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순서 | 성경구절 | 대상 | 말씀 | 의미 |
첫째 | 눅23:34 | 성부하나님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 당신을 못박은 원수들까지도 사랑하사 용서를 구하심 |
둘째 | 눅23:43 | 회개한 강도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죽음과 고통 중에서도 죄인을 사랑하사 구원해 주심 |
셋째 | 요19:26,27 | 어머니, 사도 요한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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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고통 중에서도 모친에 대한 효도를 보이심 |
넷째 | 마27:46 | 성부 하나님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인류의 죄를 대속하사 하나님과 단절된 절망을 토로하심 |
다섯째 | 요19:28 | (독백) | 내가 목마르다 | 온전한 인자로서 인간적 고통을 호소하심 |
여섯째 | 요19:30 | (독백) | 다 이루었다 | 사탄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지상사역을 완수하심 |
일곱째 | 눅23:46 | 성부 하나님 |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 근본 하나님이심에도 죽기까지 성부께 복종하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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