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로 예수님이 안식에 들어가시다(누가복음 23:56)
요한복음 19:30, ‘30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누가복음 23:56, ‘56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창세기 2:1-2,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 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인류구속의 일을 성취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재창조를 위한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기 2:1에서 천지창조를 다 이루신 후 일 곱째 날에 안식에 들어가신 것과 같이 성자 하나님께서도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시자 마자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금요일 오후 3시에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운명하셨고 오후 6시부터는 토요일인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운명 하신 그 해는 안식일과 유월절이 겹치는 해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운명하신 날짜와 사명 성취의 날을 아주 절묘하게 맞추십니다. 예수님이 안식에 들어갔다고 해서 TV앞에서 가로누워 팝콘을 먹고 콜라를 마시면서 쉬는 것이 아닙니다. 목표했던 그 일을 마치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계속 영혼 구원의 일을 행하십니다.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무슨 일을 행하셨습 니까?
둘째로 지옥에 들어가셔서 영들에게 전파하셨습니다(베드로전서 3:18-20, 4:6)
‘18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그 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 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또한 4:5, 6에,“5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 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6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 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누가복음 16:26에 의하면 구약시대에는 낙원과 지옥이 함께 공존했습니다. 그러나 낙원과 지옥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혹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옮겨 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옥에 가셔서 낙원과 지옥을 구별하시고 낙원은 현재의 낙원에 지옥은 본래 그 대로 두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3:19에 의하면 영으로 옥에 가셔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에 있는 자들의 정체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노아가 방주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셋째로 부활을 맞이하던 대책 없는 여인들 (마가복음 16:1-3)
‘1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 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사복음서의 진술들이 매우 복잡하고 난해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부 활이나 천사들의 움직임이 초자연적 현상이기에 우리 인간들이 감지하기에는 너무나 신비스럽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식일이 지났으므로 다시 상행위가 시작되었음으로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습니다. 이 시간 쯤은 오늘날 시간으로 따 지자면 토요일 오후 6시 이후 경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3:56에 보면 예수님의 장사를 치룬 후에 안식일의 시간이 오기 전에 향품을 구입한 것으로 보아 이 여인들이 예수님을 위해 두번이나 향품을 구입한 것을 볼 때에 예수님을 향한 이들의 사랑이 이렇게 뜨거웠던 것입니다. 한편 이들 이 구입한 향품은 시체의 썩는 냄새를 막기 위해 사용되는 기름과 같은 액체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일행이 무덤에 간 것은 유대인의 관습대로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 입니다.
장사 지낸 후 며칠 동안 향유를 바르고 시신을 돌보는 것은 시체가 썩기 전까지는 죽은 자의 혼이 계속 시신을 떠나지 않고 붙어 있다고 믿은 유대인의 통념에 따라 생긴 관습입니다. 그러나 당시 의식법상 시체를 만지는 것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는데 이들은 그것을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들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볼 때에 이들의 신앙이 얼마나 헌신적이며 열렬했음을 짐작합니다. 한편 시체에 향료를 바르는 일은 일반인들에게는 하지 않고 왕의 시신 에만 향유를 발랐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에 이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들이 향품을 준비한 후 내일 아침을 기대하며 그날 밤을 맞이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에서 안식 후 첫날이라 했습니다. 이 날은 오늘날 주일인 일요일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여인들이 무덤을 방문한 시간과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루어진 시점이 주일인 것을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신 구약을 통 털어 처음 등장하는 주일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제 온 인류에게 구원의 빛을 환하게 비출 주님의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써 아담의 범죄 이래로 끊임 없이 인간을 속박하던 죄와 사 망의 올무를 단번에 깨뜨리셨습니다. ‘안식일이 지나매’했습니다. 이 시각은 토요일 오후 6시가 지났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지났다는 것은 안식일이 끝나고 첫날 즉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간의 첫날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더 이상 유대인의 안식일이 구원 사건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는 무기력한 날로서 이미 그 시대가 지나가 버렸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구약의 안식일이 주일로 대체되며 이것은 구속사의 대 전환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무덤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마태복음 28:1에서는 미명이라 했고 누가 복음 24:1에서는 새벽이라 했으며, 요한은 ‘아직 어두운 때’라고 했으므로 이들이 숙소에서 출발 할 때는 어두웠으나 무덤에 점점 가까웠을 때는 해가 돋았을 것입니다.
한편 마가복음 16:1에서 ‘해 돋은 때’라고 한 것은 구원의 기능을 상실한 유대교의 안식일의 시대 는 지나고 새로운 구원의 시대 즉 기독교의 주일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 니다. 구약의 마지막 성경인 말라기서의 마지막 장인 4:2에서 너희에게 의로운 해가 떠 오를 것이 라 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마가복음 16:3절에서 이들이 숙소를 출발했을 때에 걱정하기를 ‘3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 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했습니다. 이들은 숙소를 출발할 때에 큰 돌로 막혀 있는 무덤의 돌을 열 구체적인 대책도 없이 무조건 무덤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한가지 목적인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발라야 한다는 생각하나 만 가지고 대책 없이 무덤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이 가진 믿음입니다.
넷째로 부활의 아침에 있었던 초자연적인 일들(마태복음 28:1-4)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안의 핵심이자 모든 성경의 중심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기독교처럼 기만적인 종교도 없을 것이요 성경의 모든 기록은 허무맹랑한 신화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처럼 이 세상에서 불쌍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분명한 사실 이기에 기독교만이 참 생명의 종교입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예수 님의 부활을 받쳐 주는 몇 가지의 초자연적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큰 지진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2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그 형상 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에서 이 구절들은 마태복음에만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하나 님은 자신이 현현하실 때에 종종 지진을 통해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도 큰 지진이 있었듯이 예수님의 부활 때도 지진으로 인해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편 이 지진이 있기 전에 예수님은 벌써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생명 력이 충만하고 장차 부활할 성도들이 입을 부활의 몸을 가졌습니다. 주님의 부활의 몸은 살과 뼈 가 있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몸이기에 무덤 문의 큰 바위를 통과하여 나갔습니다. 그 무덤 에는 예수님이 없었습니다.
둘째로 천사들이 나타나 돌을 굴러 냈습니다.
천사들이 돌을 굴러 낸 것은 방문객들에게 그리고 파수병들에게 무덤이 비어있음을 알리기 위함 이었습니다. 한편 본문에는 그냥 주의 천사로 되어 있으나 마가복음에는 한 청년(막 16:5), 누가 복음에는 두 사람(눅 24:5), 요한복음에는 두 천사(요 20:12)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등장 자들과 숫자의 차이는 하나님의 임재라는 초 자연적 현상을 두려움 가운데 경험한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천사가 돌을 굴러 내고 그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덤 돌이 죽음을 상징 하는 것이라면 천사는 그 위에 앉아 죽음을 이겼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에는 여인 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돌문이 열려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인들이 무덤으로 가까이 오는 동안에 지진이 있었고 천사들이 돌을 굴러 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 천사들의 모습은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다고 했습니다. 성도들도 주님의 부활을 따라 장차 부활하게 되면 이런 모습으로 변화될 것을 보여 줍니다.
셋째로 파숫군들은 지진과 천사들이 무덤 문을 여는 것을 보았습니다.
‘4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에서 여기 지키는 자들은 대제 사장들과 장로들에 의해 무덤을 지키도록 배치된 빌라도가 내준 로마 군인들이었습니다. 이 파 숫군들이 이들이 아무 저항도 없이 비참하게 죽은 하찮은 예수라는 자의 시체를 밤잠도 자지 못 하고 파수를 봐야 한다는 명령에 불만을 품고 투덜거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중 하늘에서 천 사가 내려 오고 큰 지진이 일어나면서 천사가 돌을 굴러 내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초자연적 현상에 너무나 놀라고 두려운 나머지 기절하고 맙니다. 번개같고 눈 같이 흰 옷을 입은 천사들을 보고 혼 비백산하여 기절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깨어나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합니다.
다섯째로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줌(마가복음 16:5-8)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파숫군들이 기절하고 있을 때에 천사들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에게 안심하도록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24:5에 의하면 여인들도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었기 때문입 니다. 수직하던 자들과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했던 여인들에 대한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천 사들은 그리스도를 멸시하던 자들은 방치해 둔 채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향유를 들고 찾아 온 자들 에게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을 비교해서 생각해 볼 때에 막달라 마리아는 두번 무덤을 방문합니다. 첫번 방문은 요한복음 20:1-2에서 무덤을 방문했을 때에 무덤문이 열린 것을 보고 놀래 뛰어가 베드 로와 요한에게 그 사실을 알립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이 무덤을 방문했을 때에 천사들을 만나게 됩니다. 드디어 무덤에 들어 갔습니다. 무덤 안에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랬습니다. 한 천사가 예수님이 누우셨던 우편에 앉아 있습니 다. 이로써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과는 달리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긴 참 생명의 주님이 심이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순간입니다.
‘6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이 장면은 여인들이 예수님이 묻혔던 무덤에 정확히 찾아온 것을 천사들이 입증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무덤을 찾아 온 여인들은 모두 갈릴리 출신들입니다. 천사가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란 말에서 나사렛이라 는 동향의 이름을 말함으로 심리적인 위로를 주었을 것입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살아 나셨고 무덤에 계시지 않으며 예수님이 눕히셨던 곳을 보라고 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도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홀로 달리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온 인류에게 소망을 주는 감격적인 순간입니다.
‘7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 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8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 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천사가 여인들에게 이르기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라고 합니다. 여기를 자세히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하지 않고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알리라고 합니다. 베드로를 그의 제자들 속에서 분리시켜 강조를 하고 있습 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었기에 심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따로 위로와 격려를 주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지 않았나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가복음 22:31-32에서 예수님이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탄이 베드로와 제자들을 밀까부르듯 하려고 하나님께 청구하였다고 했으며 베드로를 위해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했다고 하셨으며 베드로가 돌이킨 후에 형제 들을 굳게 하라고 당부까지 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기까지 하셨다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도록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시험에 빠지도록 그대로 놓아두었을 까요? 아마도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베드 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도록 유도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고 예수님도 인정한 제자 중에 수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 도록 하셔서 다시 회복하게 하심으로 그 당시 유대인들과 로마 정부에 의해 박해 받을 성도들 중 에 심한 고문과 죽음 앞에 굴복하여 본의 아니게 예수님을 부인하게 될 성도들을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했다 할지라도 그 죄책감으로 인해 예수님을 떠나지 말고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 님께서 용서하신다는 것을 베드로의 실수와 회개를 통해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32절 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중에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신 말씀에 서 예수님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네 헝제’ 속에는 예수님의 사도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의 핍박과 박해 받을 성도들과 그 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박해 받는 성도들을 포함합니다.
누가복음 22:32-32, 34에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 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하라 ‘, ….‘34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6:31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날 밤에 이미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과 만날 장소를 갈릴리로 말씀하셨습니다. ‘30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31그 때에 예 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천사들은 여인들에게 주님의 그 말씀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한편 갈릴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예루살렘으로부터 160km 이상 떨어진 먼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만남의 장소로 선택된 데에는 특 별한 뜻이 있습니다. 우선 제자들이 대부분 갈릴리 출신이었고 또 공생애 동안 주로 갈릴리에서 사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갈릴리가 그 당시 문화적, 정치적으로 소외 되고 멸시 받던 지역이었으므로 이제는 이곳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새로운 예수 공동체의 구 원 역사를 시작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여섯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마가복음 16:1-10).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 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5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 매 6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 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9[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 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사복음서에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10번쯤 만나 주셨다고 했습니다. 제일 먼저 주 님을 만난 사 람은 막달라 마리아인 것은 확실한데 새벽에 무덤을 향했던 여인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어떻게, 언제 막달라 마리아가 홀로 주님을 만나게 되었는지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본문 9절에서 주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보여 주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 20:1-10 에서도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주님을 만났던 이야기를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가복음 16:1절에서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무덤을 향해 출발했다고 했으며, 마태복음 28:1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에 이르렀다고 했으 며 누가복음 24: 1에서는 단지 이 여인들이라고 만 했고 요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만 무덤에 왔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24:1에서 새벽에 무덤을 찾아 향유을 가져온 자들을 단지 ‘이 여인들’이라고 했는 데 천사를 만난 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말을 11제자들과 다른 모든 이에게 그 소식을 전한 여인들이 누가복음 24:10에서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또 저희와 함께 한 다른 여자들을 언급합니다. 마가복음 16:1에서 살로메도 있습니다. 이것을 종합해 볼 때 에 사복음서에 이름을 언급한 여인들만 네 명 외에 다른 여인들이라 해서 무덤에 간 여인들이 적 어도 6명 이상입니다. 각 복음서에서 몇몇 여인들만 제한된 언급을 하신 것은 각 복음서의 집필 의도 때문일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 먼저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은 마가복음16:8,9에서,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9[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에서 이 여인들이 천사를 만나면서 너무 놀라 도망을 쳤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도망치지 않고 무 덤에 홀로 남아 통곡을 하다가 주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8:8-10에,’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이에 예수 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 니라
마태복음 28:8에 ‘그 여자들’이라 해서 막달라 마리아가 ‘그 여자들’ 속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입 니다.. 이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천사의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려 가는 길에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신 후에 두 번째로 이 여인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여자들이 주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천사들을 만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보고하게 됩니다. 다음 주일에 더 상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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