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9:51
‘51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우리는 누가복음 9:51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누가복음 9:51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육 개월 남긴 갈릴리 사역을 마치신 때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잔치에 초청을 거절한 자들과 천국잔치에 참여할 자들이 어떤 자들인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잔칫집 주인이 잔치에 초청한 세 그룹이 있었습니다. 첫째 그룹은 정식으로 초청한 자들인데 이들이 모두 잔치의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첫째 그룹에 속한 자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둘째 그룹을 초청했는데 도시의 거리와 골목길로 가서 초청한 자들입니다. 이 그룹은 유대인들 중에 죄인 시 되는 대상들입니다. 세리와 창녀들로서 바리새인들에게서 절대로 구원받지 못할 죄인들로 취급 받던 자들입니다. 셋째 그룹들은 길가와 산울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입니다. 이 이방인들은 역시 유대인들이 절대로 구원을 받지 못할 자들로 간주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은 이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올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제 누가복음 15장에 이르렀습니다. 1절에 수많은 세리들과 죄인(창녀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며 식사도 같이 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비난하기를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했습니다.
누가복음 15;1-2,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님은 비난하는 이들에게 천국 구원에 관해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15:1-7의 잃은 양 비유요, 두번째는 잃은 드라크마 비유이며 셋째는 집 나간 탕자비유입니다. 잃은 양 비유와 드라크마 비유는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죄인을 애타게 찾으시는 하나님 측의 노력에 초점을 맞추고 세번째 탕자비유는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인간 측에 초점을 맞춘 비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된 자들끼리 서로 가져야 할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가를 보여 줍니다.
첫째로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비유(누가복음 15:3-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 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 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죄인을 회개시켜 구원하려 오신 예수님의 사역을 알지 못하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오히려 예수님을 비방하는 자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혼 아홉마리를 들에 두고 찾아 나서는 목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혼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찾아 나선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자의 행동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한 없는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한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찾아 나선 것은 아흔 아홉 마리를 그 한 마리 보다 못하게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아흔 아홉 마리의 양 하나 하나를 이렇게 사랑한다는 목자의 심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내팽개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지 않는 목자라면 다른 아흔 아홉 마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목자는 삯군 목자입니다. 자기 양이 아닌 남의 양을 치는 삯군 목자만 그렇게 할 것입니다. 여기의 ‘들’은 양들이 생활하는 목초지로서 99마리는 안전한 곳에 두고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리고 잃은 양을 찾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힘든 노력 끝에 잃은 양을 찾은 후에 그 양을 어깨에 메고 기쁨으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양을 어깨에 멘 목자의 행동은 잃은 양을 찾게 된 목자의 기쁨이 물씬 풍기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잔치를 베풉니다. 6절에,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했습니다. 이 말은 양에 대한 목자의 애정이 얼마나 깊은 가를 나타냅니다. 한편 죄인 한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에 하나님 한 분 만의 기쁨이 아니라 천국의 모든 천사들과 먼저간 성도들의 기쁨인 것을 나타냅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창녀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못을 박았지만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도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누구든지 받아 주신다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의 말씀의 의도를 말씀하십니다. 7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했습니다. 세리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늘에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 보다 더 하리라고 한 것은 아흔 아홉은 회개할 것없는 의인 이라 했으므로 이미 구원 받고 하늘나라에 있는 영화로운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죄인 하나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 오면 의인 아흔 아홉에 속하게 됩니다. 아직도 회개하지 않은 잃어 버린 양 한 마리는 이 세상에 수 없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버림 받은 죄인들을 끝까지 찾아 회개시켜 천국으로 이끌어 갈 것을 이 비유에서 보여 주십니다.누가복음 14장에서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하신 말씀과 일치합니다.
둘째로 잃은 드라크마 비유(눅 15:8-10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 하겠느냐. 9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문화와 언어와 생활 양식은 헬라적으로 살고 통치는 로마 나라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는 화페도 로마 화페와 헬라 화페를 통용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주로 로마화폐인 데나리온이 상용되었지만 헬라화폐인 드라크마도 통용되었습니다. 한 데나리온과 마찬가지로 한 드라크마는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의 가치를 가집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양은 자기 스스로 움직이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드라크마는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난 죄인을 찾으시는 그리스도의 행동을 나타냅니다. 드라크마 비유는 범죄하고도 자신이 죄인인 줄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를 찾으시는 그리스도의 세심한 노력을 강조합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는 신앙생활하다가 죄짓고 타락한 사람을 찾으시는 예수님을 보여 준다면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는 자기가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 모르는 사람들을 찾으시는 예수님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양이 아흔 아홉의 무리에게서 뛰처 나간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신앙생활를 하다가 포기한 자들, 어릴 때는 교회다녔고 열심이었는데 어떤 이유로 신앙생활을 포기한 사람들, 집안 대대로 믿어온 자들 중에 신앙을 떠난 자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드라크마는 자기 스스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자기 스스로 찾아 올 수 없는 것입니다. 주인이 찾으려 가야할 자들입니다. 이 드라크마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자, 교회에 한 번도 다니지 않은 사람들, 세상에 교회가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자들을 말합니다. 마약중독자들, 깡패, 강도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고 주님께로 돌아 오며, 유대교인들이나 무슬림들이 예수님의 환상을 보고 예수님께 돌아 오는 자들이 많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목자는 산으로 들로 찾아 갔습니다. 그러나 드라크마는 집안에 있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이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등불을 켜서 집안 구석 구석 찾았다고 했습니다. 이 여인이 가진 열 드라크마는 남자가 결혼을 기념하는 증표로 준 것입니다. 여인들은 이 열 드라크마를 꿰어 머리나 목에 장식용으로 사용했다 합니다. 이 열 드라크마는 화폐 이상의 가치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 열 드라크마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결혼증표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잃어버린 그 한 드라크마를 꼭 찾아야만 합니다. 잃어버린 그 한 드라크나를 찾기 위해 이 여인은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한 드라크마를 찾아냈고 그것을 찾은 기쁨을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풉니다. 9절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했습니다.
이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열심히 찾는 모습이 마치 전도자가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구원할 자를 열심히 찾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잃은 한 마리의 양의 비유에서는 목자가 양을 찾은 기쁨에 친구, 이웃을 불러 잔치를 했는데 여기서는 남성 정관사가 붙어 남자들이 모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에서는 헬라어 원어를 살펴 보면 여성형 정관사가 쓰여 여자들이 모여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비유의 결론에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했습니다.
한 죄인의 회개가 하나님의 기쁨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들의 관심사 일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큰 기쁨을 준다고 했습니다. 잃어버린 양과 한 드라크마 비유는 한 사람의 회개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중요하고 또 하나님께 큰 기쁨을 가져다 주는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죄인들을 멸시하고 조롱했습니다. 이 비유들은 이들에 대한 주님의 책망이기도 합니다.
셋째로 집을 떠난 탕자 비유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려 가고 있습니다. 그 따르는 무리들에게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것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어떤 자라도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 오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 탕자의 비유는 잃은 양의 비유와 드라크마 비유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과 죄인의 회개를 주제로 보여 주지만 강조점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의 100마리와 잃은 드라크마 비유의 10개에서 두 아들로 숫자가 줄어 들었습니다. 아들이라고 하여 귀중함의 극치를 이룹니다. 잃어버린 양과 드라크마 비유는 이것들을 찾는 하나님의 사랑에 강조점을 두지만 탕자비유에서는 둘째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 온 것을 부각시켜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이 회개라는 사실에 강조점을 줍니다. 탕자의 비유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둘째 아들의 방탕과 궁핍입니다. 둘째는 이 아들이 극한 상황에서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셋째는 맏아들의 불평과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 줍니다. 이 탕자비유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맏아들은 율법적 전통에 익숙한 유대인들이나 모든 시대에 존재하는 자기 의로 가득찬 사람들을 의미하고 둘째 아들은 하나님의 품을 떠난 죄인들이지만 후에 회개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 탕자의 방탕과 궁핍(눅 15:11-16)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 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자신의 유산 몫을 챙겨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납니다. 여기서 유산 들을 각각 나누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작은 아들에게 유산을 나누어 준 나머지는 맏아들 몫 인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자기 유산을 물러 받은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가버렸 는데 이 말씀에서 이 아들은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고 떠나 가면 다시는 아버지께로 돌 아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 탕자의 모습은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하고 자기의 뜻대로 살기 를 좋아하는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사탄의 밥이 되어 사탄의 노예가 되어 죄의 노예가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다 탕진한 것은 사탄의 노예상태의 결과입니다.
그는 재산을 다 허비하기 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재산이 다 떨어지자 그 지방에 심한 기근이 왔습니다. 이 흉년은 탕자가 살던 지역뿐만 아니라 그 나라 전체에 임한 흉년이었습니다. 물가는 오르고 회사는 도산되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럴 때는 가족 친척끼리 서로 도와 연명을 하는데 이 탕자는 연고자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탕자는 기술도 없고 부자집 아들로 태어나 방탕한 세월만 살았기에 세상 물정도 모릅니다. 굶어 죽음 직전에 천신만고 일자리를 구했는데 돼지지기입니다. 굶어 죽지 않게 먹는 것만이라도 해결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 비참한 생활이야 말로 탕자로 하여금 회개하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는 수 많은 불행이 가득 차 있지만 이런 불행이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을 찾도록 동기를 제공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잠시 동안은 자기 세상을 만난 듯하고 모든 것이 제 마음대로 될 줄 생각하지만 그는 결국 죄의 세상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안 아니면 사탄 안에 있습니다. 사탄의 안은 노예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게 와서 쉼을 얻으라.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라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고달프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떠나는데 사탄의 멍에는 죽을 지경으로 무거운 것입니다.
이 탕자가 먹기 위해서 돼지지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돼지지기는 유대인에게 있어 아주 천하고 모멸적인 일입니다. 이 아들이 돼지지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이 작은 아들의 비참한 상태를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 겪게 될 비참한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탕자가 돼지지기를 해서 먹는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데 저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주인에게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아주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쥐엄열매라도 먹어 굶주림을 면해 보려고 했는데 그것도 함부로 먹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돼지를 치는 자들 중에 신분이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을 것입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물정도 모르고 눈치도 없고 일을 해봤어야지, 일할 줄도 몰랐을 태니 사람들에게 천덕구리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 탕자가 아버지를 생각하다(눅15:17-24)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 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 가니라 아직도 거리 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 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이에 스스로 돌이켰다고 하는 것은 그가 집을 나온 때로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곰곰히 돌아 봤다는 것입니다. 돌이켰다는 것은 성경에서 죄에 빠진 인간이 회개하고 겸허한 모습을 나 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내 아버지께는 날품팔이도 먹을 것이 풍부한데 아들인 나는 주려 죽 는 구나 생각하면서 아버지께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일어나 아버지께로 향하여 갑니다. 사 사기서를 보면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길 때에 주변 국가들의 침임을 받고 극한 고통을 받게 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기드온, 입다와 같은 사 사들을 세워 백성들을 구원합니다. 그러다가 평안해지면 또 우상을 섬기다가 고통을 당하 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께로 가서 품군의 하나로 써 달라고 하겠다고 하고 일어나 아버지께로 향 하여 갑니다. 이 아들은 자신의 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무슨 대 우를 하더라도 순종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여기서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합 니다. 하늘은 하나님을 말하는데 자신의 패역한 죄가 아버지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죄였다 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회개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피상적인 고백이 아니라 잘못 된 행동을 고백하고 그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다시는 그른 죄를 범하지 않도 록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직도 자신의 집과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먼저 자신을 알아보 고 두 팔을 벌리고 달려 옵니다. 아버지가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췄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기쁨이 어떠한 것을 보여 줍니다. 이 아들은 돼지지기로 서 냄새와 목욕도 하지 못했습니다. 더럽고 냄새 나는데 아버지는 그것이 하나도 눈에 들어 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이후 계속 동구 밖에서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 대하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회개한 죄인을 향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 적이며, 죄인을 무조건 용납하시며 죄인의 회개를 도리어 크게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께 가면 무슨 말로 용서를 빌까, 아버지가 자신을 받아주실까 수 없이 생 각하면서 아버지께 할 말을 준비하고 또 준비했습니다. 21절에,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 겠나이다 하나’ 했는데 아버지 귀에는 아들의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기뻐서 아들의 고백을 들을 여유가 없습니다. 22, 23절에,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은 잔치나 연회 때에 입는 가 장 화려한 옷인데 작은 아들에게 이 옷을 입힌 것은 잔치의 주인공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손에 가락지를 끼우는 것은 총애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아들의 지위로 회복했다는 것을 나타내며, 그 당시에는 종이나 노예는 신을 신을 수 없었는데 아들에게 신을 신긴 것은 자유로운 아들이라는 표시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죄를 회개하고 돌아온 자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했는데 이 송아지에 정 관사가 붙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 올 때에 잡으려고 오래 전부터 키워온 준비해 놓은 송아지입니다. 그래서 종들이 그 송아지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 오기를 기다릴 뿐만 아니라 그 때에 누릴 기쁨을 대비하여 준비하고 계실 것입니다.
- 집안의 탕자(눅15:25-32)
한편 맏아들은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와 집에 이르렀는데 노래와 춤추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맏아들은 밭에서 자기의 업무에 충실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맏아들은 하나님 곁에서 신앙적 특권을 받은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맡은 일에 형식적으로는 충실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나 신앙적 독선과 배타적 정신으로 말미암아 버림 받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맏아들이 집안에서 잔치소리가 들리므로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집에 들어가지 않고 한 종을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이 때에 종이 대답하기를 27절에,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했습니다.
이 사실을 들은 맏아들이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이것은 탕자를 받아들인 아버지에 대한 분노입니다. 동생을 재산이나 축내는 불량자로 생각했는데 그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터진 것입니다. 이 맏아들의 모습은 세리와 창녀를 영접하고 그들과 식사도 하고 복음의 진리를 가르쳤던 예수님을 비난하는 바래새인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29절에서 맏아들은 자신의 구체적인 불만을 토로하기 위해 그의 지금까지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정체를 밝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이 말에서 큰 아들은 첫째로 아버지를 여러 해 섬겼다고 했으며 둘째로 아버지의 명령을 어김 없이 지켰다고 합니다.
결국 맏아들은 자기의 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맏아들은 아버지를 간접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맏아들의 주장은 그의 행동이 아버지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겉치례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버지를 섬겼다고 하는데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이지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은 자신의 것입니다. 그는 실제 아버지를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그가 상속받기로 되어 있는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일해 온 것입니다. 그의 정신은 아들의 정신이 아니라 종의 정신이었습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보고 섬겼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역시 상속을 받았다면 작은 아들과 같이 재산을 팔아 도망쳤을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염소새끼 한 마리 주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작은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줄 때에 맏아들도 재산을 받은 것입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의 삼분의 일을 받고 맏아들은 아버지 재산의 삼분의 이입니다.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간 이후 맏아들은 자기가 받을 상속을 생각하며 기뻐하고 있었는데 난데 없이 자신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 때문에 자신의 재산에 손해가 갈 까봐 그 동생을 받아들인 아버지께 분노를 터트린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바리새인이나 유대인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잃어버린 아들은 작은 아들로 대변되던 세리나 창녀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장자라 생각했던 바리새인과 같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이 맏아들의 모습은 스스로 의인인 것처럼 생각하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엄청난 축복은 생각지 않고 눈 앞의 기득권만을 지키기 위해 신앙적 독선에 빠진 당시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1, 2로 돌아가서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시는 예수님을 비난한 바리새인들이 잘 못된 것을 비유로 지적한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는 누가복음 16장으로 갈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눅16장
거지 나사로와 홍포부자
- 죽은 후에 영혼이 잠자는 상태가 아니라 영혼의 상태로 활동한다.
-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푼다고 했는데 낙원에서 뱅킽을 즐김
- 낙원과 음부가 서로 볼수 있으며 대화도 나눌 수 있으나 오고 가지는 못함
- 예수님 부활 이전까지는 음부와 낙원이 같은 곳에 있었으나
부활 후에는 낙원은 하늘나라로 옮기도 음부는 그곳에 그대로 있음
- 거지는 이름이 있는데 이름의 의미, 홍포부자는 이름이 없다. 세상에서는 거지였지만 별볼일 없었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생명책에 이름이 적혔고 하늘나라에서는 중요한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홍포부자는 세상에서는 이름날리고 떵떵거리고 살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생명책에 이름이 없다. 그래서 성경책에서도 이름이 없어 홍포부자라고 별칭을 지었다.
- 아브라함의 품의 뜻
Views: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