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7:11-19
예수님은 누가복음 9:51에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주님의 공생애를 육개월 남겨 놓고 갈릴리 사역을 마치신 후 가버나움에서부터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을 따 르는 무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면서 각 촌 각 성에 가셔서 병자도 고치고 말씀도 가르치셨습 니다. 지난 주일에는 누가복음 16장에서 천국에 갈 성도들의 이 세상에서의 물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지고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 이 주신 것으로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선한 청지기로서 하나님 말씀 따라 충성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누가복음 17장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시는 길의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실 때라 했습니다.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시작해서 갈릴리를 지나 사마 리아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누가복음 17장은 이 지역을 지나 가실 때에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교훈과 행하신 기적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은 세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첫째 부분은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부분은 열명의 나환자를 치료하시는 일이요 셋째는 현세적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재림 때입니다.
첫째로 제자로서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덕목
예루살렘의 십자가의 길은 궁극적으로는 천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실 때에 주로 함께 가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도 제자들의 물질 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유언입 니다. 그러므로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귀중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옆으로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웃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덕목은 형제를 실족시키지 말라는 교훈(눅17:1-2)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 게는 화로다. 2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주님의 제자나 성도들은 믿음이 약한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소외시켜 이들이 믿음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됩니다. 실족케 하는 것의 실족은 헬라 원어로 짐승을 잡는 올가미나 함정을 말합니다. 실족케한다는 것은 고의적으로 올무를 만들어 영적으로 육적으로 죄악에 빠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도덕성이 부패했으므로 실족시키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는 더욱 힘써 남을 실족시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내분을 일으 키고 형제를 무시하고 여러 가지 일로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죄는 목에 연자맷돌을 메고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를 절대로 실족시키지 말라는 강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둘째로 성도들이 지켜야 덕목은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었을 때에 경계하고 회개 할 때에는 절대로 용서하라는 교훈입니다(눅17:3, 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4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 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첫째에서는 내가 형제에게 죄를 지었을 경우를 말하며 둘째는 형제가 내게 죄를 지었 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형제가 너를 거스러 거듭 종교적, 도덕적 죄를 범하거든 처음에는 그것에 대해 상대방이 죄를 깨닫도록 책망하고 죄를 깊이 뉘우치고 회개하 면 용서하라고 했습니다.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회개하면 용서하라 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일곱은 완전 수요 무한한 수입니다. 마태복음18장에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7:3, 4에서는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했는 데 마태복음 18:22에는 회개하면이란 말씀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믿음이 적은 자들을 실족시키지 말라 그리고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들이 회개하면 무한정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교훈과 같은 종교적 도덕적 요구를 현재 자신들이 가진 믿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에게 믿음을 더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셋째로 성도들이 가져야 할 덕목은 믿음의 능력을 가지라는 권고입니다(눅17:5,6)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 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교훈들이 너무 높은 차원이기에 예수님께 믿음의 양을 더해 달라고 요 청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은 양이 아니라 질적인 문제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뽕나무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라 했습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진실한 믿음일 진데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넷째로 성도들이 가져야 할 덕목은 예수님의 종으로서 겸손한 헌신의 교훈입니다(눅 17:7-10)
‘7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 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 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 하겠느냐 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여기 종은 그 당시에 노예를 말합니다. 노예들이 밭을 갈고 양을 치다가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주인이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인의 식탁을 차리고 옆에서 주인의 식 사를 수종하는 것이 노예의 본분입니다. 종이 의무를 다했다고 종에게 주인이 답례를 하지 않 는 다는 것입니다. 종이 한 일은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지 어떤 답례를 받을 사항이 전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봉사하고 헌신 할 때에 답례나 보상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당연한 의무로 여겨야 한다는 말로 겸손과 충성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일정한 봉사에 대해 어떤 대가도 하나님께 요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완전한 종의 직무를 다 할 수 없으며 부족한 직무 이행마저도 하나 님의 은혜 없이는 있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열명의 나환자 치유
또한 누가복음17:11-13에서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한 마을에 들 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 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 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시는 길에 갈릴리에서 사마리아 사이를 통과하고 계셨습니 다. 당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은 2개의 코스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요단강 줄기를 따라서 여리고를 지나 유대 광야로 올라 가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건이 바로 그 길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길은 유대인들이 극히 꺼리는 ‘사마리아’를 관통하여 가는 길입 니다. 당시 이 길은 지름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지나가셨습니다. 예수님 께서 빠른 길로 가시려는 마음으로 그 길을 택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빌립을 가사 광야로 데려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를 만나게 한 사건처럼 성령님은 아버지의 깊은 언약과 연결된 장소와 사람들과의 만남을 미리 아시고 이끄신 것입니다. 요단강과 여리고를 통해서 가 실 때 예수님을 간절히 만나기를 원했던 삭게오’를 만나 주신 것처럼, 이 사마리아의 노정에서 는 ‘나환자 10명’을 찾아 간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환자는 ‘진 밖에 사는 자들’입니다. 전통 유 대인들에게 이 병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지은 ‘원죄의 상징’이었습니다. 아담이 에덴 동산 밖으로 추방되었듯이 나병에 걸린 자들도 이스라엘의 진 밖에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 나병 환 자들은 사람들 가까이 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멀리서 소리 높여 병을 낫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에게 간다는 것은 병이 나았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이들 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고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의심 없이 가고 있을 때에 자신들의 병이 나 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사장에게 자신들이 병 나은 것을 확인 받음으로 가족과 사람들에게 합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 명 중에 한 사람은 병 나은 것을 확인한 후에 제사장 에게 간 것이 아니라 먼저 예수님께 와서 발 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이방 인으로 취급하는 사마리아사람이었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리라 말씀 하실 때까지 그는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 사람은 육신의 병뿐만 아니라 영혼의 병도 고처 서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이 열명의 나환자 중에 아홉은 하나님의 은혜를 수 없이 받았으나 구원의 은혜에 이르지 못한 유대인들을 대표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는가(눅 17:20-21)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1:20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라는 하나님의 나라는 로마의 정치적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나게 하고 자신들의 땅에 임할 민족적, 정치적 왕국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허튼 소리를 계속한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교훈을 비꼬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처음에 시작하실 때에 회개하라 천국이 임하였느리라 했습니다. 온 우주 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들이 바라는 메시야가 통치하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평화와 부가 형성된 유토피아가 아니며 또한 이곳 혹은 저곳에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 에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외형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통 치를 인정하며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는 자들 가운데 임하는 것입니다. 즉 성도들의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들의 마음이 천국인 것입니다. 20절, 21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루실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의 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넷째로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임할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눅 17:22-37)
‘22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23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24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 같이 인자도 자 기 날에 그러하리라 25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 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는 하나 완성된 형태의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때에 이 땅과 하늘이 변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되고 만물이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은 그 종말의 때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해 세 가지로 교훈하셨습니다.
첫째 교훈은 재림의 시기와 방법입니다(22-25절)
22절에서 ‘때가 이르리니’ 해서 그 때는 종말의 때가 아닌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이 말은 두 가지로 적용됩니다. 첫째는 예수님 이 재림하시어 권세로 영광스럽게 다스릴 날을 아직은 재림의 때가 아니므로 보지 못할 것이라 는 의미입니다. 둘째 의미는 말세에 미혹과 박해와 고난으로 인해 이것을 이기지 못하여 참 믿 음을 지키지 못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되고 따라서 인자의 통치를 보고자 하되 볼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전자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 이요 후자는 종말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때에는 거짓 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실재로 예수님의 승천 후 당시 데살로니카에서는 예수께서 재림하셨다는 소문이 난무했습니다(살후 2: 1, 2). 그 때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온갖 이단들이 우후죽순으로 출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것에 달려가지도 말고 떠나지도 말고 바른 신앙공동체에 붙어 있으라고 권고하 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교회에서 성도들이 종말론에 대해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종말론을 바로 가르쳐야 성도들이 이단에 미혹되지 않을 텐데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종말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종말론을 말하다가 오해 받을 까봐 꺼리고 있습니다. 사탄에게 속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번개가 하늘 이끝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예수님의 재림 도 그와 같으리라 해서 모든 사람이 일시에 다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오실 것이요 동시에 매우 급작스럽게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 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공중강림이요 둘째는 예수님의 지상재림입니다. 공중강림은 데살로니 카 전서 4:14-17 과 고린도전서 15:51에 있습니다.
‘14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 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주께서 호 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 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했습니다.
이 말씀의 14절에서 예수 안에서 자는 자 즉 낙원에 있는 성도들의 영혼들을 하나님이 예수님 과 함께 공중강림 때에 데려 오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큰 소리로 호령을 하시는 것은 죽은 사람을 향해, 나사로야 일어나라, 소녀야 일어나라, 청년아 일어나라고 호령하셨듯이 온 지구 상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의 시체를 향하여 자녀들아 일어나라고 호령하십니다. 천사장들도 예 수님의 호령에 합창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온 우주에 흘러 퍼집니다. 여기에 주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신다고 했습니다. 공중재림이라는 말은 잘못되었습니다. 강중강림 이라고 해야 맡습니다. 예수님의 공중강림은 신부를 어린양의 혼인으로 인도하기 위해 마중 나온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하고 그리고 살아서 예수님을 맞이 하는 성도들은 순식간에 변화되어 공 중으로 휴거 되어 공중에서 구름 속에서 주님을 만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51에서는 살아 있는 성도들의 변화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리고 예수님의 지 상 재림은 계시록 19:11-21에서 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마치고 아마겟 돈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 오십니다. 그리고 지구상에 천년왕국을 수립하시는데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이룹니다.
둘째 교훈은 재림 전에 있게 될 세상의 여러 현상에 대한 교훈(눅17:26-30)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28 또 롯 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 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 에도 이러하리라.’
인자의 재림의 때가 노아의 홍수 때와 같으리라 한 것은 노아의 때 홍수는 인류심판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자가 재림하실 때도 인류의 심판이 있을 것을 말합니다. 또한 노아의 홍수와 마 찬가지로 불현듯 돌연히 임하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가 시작되기 전에 오 래 동안 홍수심판에 대한 계시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자의 재림도 2천년 동안 예고되었 습니다. 그러나 그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그 때 만큼은 계시된 징조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경에서 주님의 재림의 때에 이른 일들이 있을 것이라는 예 수님의 계시에 따라 현세에 징조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주님의 재림의 때를 알고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노아 홍수 때의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 였으며 했습니다. 사실 먹고 마시는 것은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입 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문제가 된 것은 이를 정상적인 방식으로 하지 않고 온갖 탐욕과 쾌락의 방편으로 삼았고 시집가고 장가드는 것은 부도덕한 형태와 비정상적인 형태로 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동성애와 한 남편과 한 아내가 한 번만 결혼해야 하는데 열 번 스무 번 시집가고 장가들고 있습니다. 노아시대에 인간과 타락한 천사 사이에 태어난 네 피림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 네피림은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이 아닙니다. 그렇듯이 오늘날 세상은 인간에 기계를 가미해서 비인간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초인간을 만드는데 이 비 인간, 초인간이 세계를 지배하게 됨으로 노아심판이 있었듯이 세상 끝에도 이렇게 될 것입니다.
롯의 때와 같으리라 했습니다. 롯의 때는 노아시대보다 세상이 좀 더 복잡해진 때입니다. 이 때 도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함께 사고 팔고 집을 짓더니 해서 세상의 삶이 더 복잡해졌습니다. 롯의 때는 동성애 죄와 함께 네피림도 존재했습 니다. 이들이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변의 성읍들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노아시대와 같은 형 편이었습니다. 노아시대는 물로 심판했으나 소돔과 고모라는 불로 심판했는데 종말의 대 심판 도 불로 심판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의 자세(눅17:31-37)
-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세상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세간을 챙길 틈도 없이 급박한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 했습니다.
‘31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롯의 처를 기억하라 33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롯의 처는 소돔에서 도망할 때에 뒤를 돌아 보지 말라고 했는데 뒤를 돌아 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것은 세상 것에 대한 칩착 때문이었습니다.
- 주님의 재림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재림은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도적 같이 임하고 부지불식 간에 임하게 됩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는 항상 언제든지 주님이 오 시더라도 들림 받을 준비를 해놓고 살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몇날 몇시를 위해 금식기도하고 목욕하고 흰옷으로 갈아 입고 모여서 주님 오심을 맞이 하기 위한 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누가복음 17:34-37 말씀에 평상시 생활 가운데서 휴거가 이루어 진다 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 려둠을 당할 것이요 35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니라 36(없음) 37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 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밤에 주님이 오심을 자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자고 있을 때에 하나는 데려 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라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부부인지 형제 혹은 부자, 모녀인지는 모르지만 주님의 재림을 준비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는 이렇게 이별하게 될 것 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식사준비를 하고 있을 때에 한 여인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여인은 버 려둠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휴거가 밤에도 일어나고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일어 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온 지구 상에서 동시에 일어날 것을 보여 줍니다.
- 주님의 재림 장소는 어떤 특정 장소에서가 아니라 지구 모든 곳에서 이루어진다. 37절에, ‘37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이 말은 주님의 재림 장소가 어디에서 일어날 것입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과 심판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검 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이느니라고 하신 것은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먹을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 드는 것과 같이 심판 받아야 할 죄인이 있는 곳마다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용문산이나 신천지나 여호와의 증인의 단체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공중강림은 지구 모든 곳에서 이루어 집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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