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7

누가복음 18:31-43

우리는 누가복음 9:51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2천년의 기간 동안에 온 세계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제자들이 행하여야 할 일들을 교훈하셨습니다. 지난 주일 누가복음 17장에서 는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언하셨습니다. 오늘은 누가복음 17장의 예수님의 재림 때에 있게 될 핍박, 박해, 고난, 고통의 시대가 있을 것인데 그런 때에 제자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을 교훈하십니다.

누가복음 18장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첫째 부분인 누가복음 18:1-30은 예수님은 우리의 절대구주이심으로 우리도 주님 앞에서 절대적 신앙과 절대적 헌신을 가져야 할 것을 여러 측면에서 강조하는 교훈들을 함께 모아 놓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끈질긴 과부의 비유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와 어린이의 축복 사건과 부자 청년의 질문 사건입니다. 그리고 둘째 부분은 세번째 수난 예고와 바디메오의 치유사건입니다.

첫째로 제자는 주님께 절대적 신앙과 절대적 헌신을 해야함(눅 18:1-30)

  1.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눅 18:1-8)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 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 였느니라 6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 느냐 하시니라’

 

이 비유는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도할 것을 교훈하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시기에 일어날 무서운 환난에 대한 준비로서 계 속적인 기도의 중요성과 기도의 능력을 알려 주십니다. 항상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의 습관을 계속 유지하며 항상 기도하는 마음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낙망치 말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생각하기를 기도 응답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망하여 기도를 중지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그 원어적 의미는 악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혹은 겁쟁이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핍박, 박해, 환난 가운데서도 낙망하지 않고 끝까지 계속해서 기도하라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악한 재판장에게 한 과부가 찾아 와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러나 이 재판장은 눈도 깜짝하지 않습 니다. 그러나 이 과부가 끈질기게 재판장에게 찾아와 간청을 함으로 자신이 귀찮아서 결국 그 과부의 요청을 받아 주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6절에 주님께서 이 비유의 의도를 설명하십니다. 불공정한 재판관도 끈기 있게 간청하는 과부의 요청을 들어 주었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자녀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겠는냐고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밤낮으로 부르 짖는 자녀들의 요구를 반드시 들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님은 기도야 말로 하나님과 자녀의 밀접한 관계를 계속 유지시키는 확실한 방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 응답이 있기 까지 그리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재람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과 말씀을 의지하면서 믿음을 지킬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자기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끈질기게 재판관을 찾아간 과부와 같이 하나 님의 약속을 변함 없이 신뢰하는 성도들 만이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눅 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 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바리세인과 세리의 비유도 기도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 가를 가르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떤 선한 행동이나 올바른 행실로서 선이나 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이나 관습에 규정된 율법적 의식이나 규례를 지키는 것으로 자신은 의롭다 여겼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죄인이라고 부르고 그런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성전에 가서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아침 9 시, 12시 그리고 오후 3시 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 뜰에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일 반적으로 바리새인은 율법적으로 오류가 없는 사람들로 인정되어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 이었고 세리는 악하고 방탕하며 탐욕스런 사람들로 여겨져 죄인이라 불리어졌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성전에 기도하려 가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고 불 경건한 사람으로 대표 되는 세리가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갔다는 것은 특이한 경우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행동을 돋보이기 위해 눈에 띄는 장소에서 가식적인 태도로 기도합니다. 외형적인 모습으로 가득찬 바리새인의 기도는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도 같지 않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토색, 불의 이런 단어들은 세리를 비판하는 말들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은 회개와 고백은 하나도 없고 자신의 생활을 자화 자찬 하는 자랑거리로 가득차 있 고 자신과 함께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 간 세리를 의식하며 그와의 의도적인 비교를 통해 자신 의 의로움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리세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에 대한 고백이나 회개가 전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구가 전혀 없습니다. 그의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의 행위에 대한 자랑일 뿐입니다. 그의 자랑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죄를 짓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레에 두번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열심히 바친다는 것입니다. 그는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였고 의롭게 살았으므로 하나님께 회개 를 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자기 자랑을 늘어 놓았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구원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의를 힘입는 것을 방해합니다. 바리새인 은 자기의 의로 빗대어 타인 곧 세리를 정죄하고 멸시하는 범죄까지 행하였습니다.  이런 기도 는 하나님께 열랍 되지도 않을뿐더러 하나님 앞에서 죄악 된 행위가 됩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 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하는 일반적 인 자세는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잘 알고 있는 이 세리는 감히 하늘을 바라 볼 수 없었습니다.  세리는 죄책감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감히 고 개를 들 수 없었고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악을 통분해 하는 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세 리의 기도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 보다는 자신의 생활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 외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결론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종교적 열성을 하나님과 사 람들 앞에서 자랑했던 바리새인과 달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불쌍한 죄인이라고 탄식한 세리 만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1.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자(눅18:15-17)

‘15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 늘 16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 리라 하시니라’

우리 인간은 아무리 의롭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인입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한 회개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고 자기의 의로운 행동을 자랑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 서 이번에는 어떤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가를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를 통해 주시는 교훈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관습에는 부모들이 어린아이를 랍비에게 데려가 축복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그 당시 훌륭한 선생이신 예수님께 축복을 받기 위해 아 이들을 데려 왔습니다. 마가와 마태는 일반적인 아이를 나타내는 파이디아라는 단어를 사용했 는데 누가는 갓난아이를 나타내는 브레페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부모들이 아이들 을 데려 올 때에 비교적 큰 아이들 뿐만 아니라 유아들도 함께 데려왔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아이들의 머리에 손을 얻고 축복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한편 제자들은 부모들을 책망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책망한 의도는 부모들이 필요 이상의 많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 선포사역을 방해하고 예수님을 귀찮게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이 예수님 가까이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14에서는 아이들의 부모를 꾸짖는 제자들의 행동을 목격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화를 내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이 구원의 부수적 인 존재들이 아니라 그들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의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 시키고 있습니 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 했습니다. 이 말은 어린아이들과 같이 순수한 영혼으로 하 나님을 절대적으로 의뢰하고 순종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우리 인 간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요 죄인으로서 어린 아이처럼 유약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참 모 습을 발견하고 어린아이가 부모를 사랑하여 믿고 따르듯이 순수한 영혼으로 전적으로 하나님 을 사랑하며 의뢰하고 순종하는 자만이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1. 부자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눅 18:18-30)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0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예수께서 이 말 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3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24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 29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에서 어떤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가를 보여 주시고 부자청년비유에서는 어떤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는 가를 보여 주는 예수 님의 교훈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관원의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통해서 인간의 율 법적 행위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이 명칭은 그 당시 종교적으로 뛰어난 지도자인 랍비들에 게만 붙이는 명칭이었습니다. 이 관원이 예수님께 이런 명칭을 붙인 것은 좋으나 이 사람은 예 수님을 뛰어난 인간으로 보았지 하나님으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인간으로서는 선한 이가 없고 하나님만 선하신 분이시다고 말씀하셨습 니다.

이 청년 관원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는가를 물었습니다. 이 관원은 영생에 대해 고 민을 많이 해왔다는 사실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영생은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유 대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 다는 잘못된 구원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으 로서는 율법을 다 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 청 년에게 당시 유대인들이 영생을 얻는 방법으로 생각해 왔던 하나님과의 직접 관련이 있는 계명 들이 아닌 인간과의 관계를 규정짓는 십계명의 두번째 서판에 있는 계명들을 언급했습니다. 간 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였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이런 계명들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무를 규정하는 첫째 서판의 계명들도 지키지 못할 것 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청년의 대답은 이런 계명들은 자신이 어릴 때부터 다 지켜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렇 게 대답하는 청년에게 예수님은 아직  지켜야 할 계명이 너에게 하나  남아 있다고 하시면서 네가 가진 모든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너를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 다.  그 관원에게 한 가지 해야 할 남은 것은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자신의 재물을 포기해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재물은 그에게 우상이었고 그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게 한 요인이었습니다.이 관원은 겉으로는 율법을 준수한 것 같았지만 재물로 인하여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돌비에 새겨진 계명도 지키지 못한 것입 니다. 이런 자가 네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돌비에 새겨 진 계명을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재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않으면 결코 예수님을 좇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심히 근심하며 돌아 갔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율법을 준수하는 자신 의 생활을 입증해서 예수님께 어떤 칭찬을 들을 것을 기대했는데 자신이 아끼고 있는 재산을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침통한 기색을 띄었다고 했습니다. 재물 때문에 이 사람은 영생을 포기했습니다. 이 청년 관원 역시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율법의 형식적인 면은 중시했지만 그 내용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전형적인 유대인이었습니다. 경건의 내용은 없고 형식적인 종교 생활의 규범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오늘날 도 이런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열심히 참석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성경공부 열심히 하 지만 참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이웃을 참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의 사람들이 많습니 다. 이 비유의 결론으로 29절에, ‘29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 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했습니다.

  1. 세번째 수난 예고 (눅 18:31-34)

‘31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 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 아나리라 하시되 34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예수님은 누가복음 9:22-27과 누가복음 9:43-45에 이어 세번째로 수난을 예고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누가복음 9:51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장기간 걸어가고 있는 시점입니다. 이 말씀을 한 시점은 여리고성에 가까운 베레아 지역일 것입니다. 이 예수님 의 수난 예고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32에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길에 예수님의 태도와 행동에 어 떤 비범한 각오가 숨겨져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는 말씀을 부가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기록된(시편22편, 이사야53장, 단9:26)모든 것을 성취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고난 받을 장소라고 처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고난 받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번씩이나 수난을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십자가에서 이루 어진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오해하 고 있는 제자들과 따르는 백성들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깨우치기 위해서입니다. 세번째는 예수 님이 수난 후에 제자들이 낙심하고 절망에 빠질 것을 예비하여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격려 하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수난 예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둘째로 거지 맹인 바대메오의 치유(눅18:35-43)

‘35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39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 는지라 40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예수님은 누가복음 9:51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긴 여정이 여리고성에 이르렀습니다. 누가복음 에는 맹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마가복음에는 바데메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과 마가복음에는 한 맹인이라 했는데 마태복음에는 두 맹인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차이가 난 것은 예수님께서 고치신 맹인은 본래 두 사람이었으나 누가와 마가는 이 둘 중에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특이한 믿음을 가진 바디에오에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맹인은 바디 메오 옆에 있었기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바디메오의 믿음은 특별합니다.

그는 맹인이었기에 구걸해서 살아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그랬지만 예수님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맹인들이 예수님께 가면 눈을 뜬다는 소문도 들었 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예수님께 데려가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싶 은 간절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길가에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발소리를 들었 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뜻 밖에도 자신이 그렇게 사모하던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예수님을 만날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바디메오가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냐고 물었을 때에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바디메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적 지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당시에 다윗의 자손이라 는 호칭은 일반적으로 메시야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구주로서 인간을 구원할 예수님의 신적 사역을 나타내는 성경적 표현이었습니다. 바디메오는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신적능력 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는 그것에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 었을 때에 대뜸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엄청나게 큰 소리로 부르짖었던 것 같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맹인에게 잠잠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상관하지 않고 더욱 크게 부르짖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자기 같은 맹인이 어떻게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인가 하고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비록 육의 눈은 떴으나 영적으로 소경이 되어 그리스도를 앞에 두고도 알아 보지 못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으나 영의 눈 이 뜨인 바디메오는 예수님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요한복음 9장 전체는 날 때부터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준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눈을 뜨게 했다는 사실을 받아드리지 못했습 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심판 하러 이 세상에 왔는데 보지 못하는 자는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 되게 하리라 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맹인이었다면 죄가 없으려 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물러 서서 바대메오를 불러 오라 했을 때에 바디메오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께 달려 갔습니다. 이 바디메오를 향하여 예수님은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 원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한 마디 ‘보아라’ 하신 그 말씀이 입에서 떨어지자 마자 바디메오는 보게 되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좇았다고 했습니다. 바디메오는 눈을 뜨자 예수님을 좇아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고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 으시는 예수님을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되는 영광을 차지 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갈보리 산상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앞서 가신 예수님을 끝까지 좇아 가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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