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누가복음9:51절에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시기로 작정하셔서 6개월의 세월이 지나고 이제 예루살렘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6개월을 남기고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해 오시는 길에 예루살렘에 들리셨다가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함으로 베레 아 베다니 동네로 피신 하셨다가 유대 베다니의 마르다 마리아가 오빠 나사로를 살려 달라는 전 갈을 받고 다시 유대 베다니에 가셔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살이 썩어 냄새 나는 나사로를 살 리는 일로 또 다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시매 예수님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니므로 그때 를 기다리며 갈릴리 에브라임으로 피신하셨다가 마지막 유월절이 가까워 오자 다시 누가복음 13:22에서부터 예루살렘을 향하여 걸어 가셨습니다.
지난 주일의 누가복음 19:1-27에서는 여리고성에 오셔서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하시고 삭개오 집에 들리셔서 삭개오의 구원을 선포하시고 그 집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그 다음날 예루살렘성에 도착하신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예루살렘성 입성(눅19:29-44)
누가복음 19:28과 29절 사이에는 시간의 흐름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2:1에서 그 시간 사이에 있었던 중요한 한 사건을 설명합니다. 누가복음 10:38-42과 누가복음 13:22절 사이의 시간적 흐름을 요한복음 10:39-42에서 설명했습니다.예수님이 베레아 베다니로 피신가셨다가 다시 유 다 베다니에 오셔서 나사로를 살리시고 그 일로 인해 유대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죽이시려 함에 요한복음 11:53-54에서 갈릴리 에브라임으로 피신 하신 사실을 설명합니다. 이렇게 누가복음 에서 빠뜨린 내용을 요한복음에서 보완했습니다. 요한복음 11:55에서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오셨는데 누가복음 19:28절에서 므나 비유를 마치신 후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오셔서 베다니의 마르다 마리아의 집에 들리셨습니다.
그 때에 요한복음 12:1-8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 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일로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으로 갈릴리로 피신하셨다가 다시 베다니로 왔 을 때에 마리아가 나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붙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딱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건이 요한복음 11장 바로 뒤에 있으므로 요한복음 12장의 사건 이 바로 연속해서 일어난 것 같이 생각하기 쉽습니다. 11장 과 12장 사이에 몇 개월의 시간의 공백이 있은 것입니다. 이 잔치 때에 예루살렘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왔 으며 또 살아난 나사로도 보기 위해서라 했습니다.
요한복음 12:9-11,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 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 로도 보려 함이러라. 10대제사장들이 나사로 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11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이 잔치는 토요일 안식일이 었습니다. 요한복음 12:1에,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에서 유월절 엿새 전은 금요일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2: 12-14,’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 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 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 말씀과 우리 본문 누가복음 19:29절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날은 일요일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함께 고난주일의 첫째 날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이 주일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저녁 해지기 전에 마리아의 집에 도착하셔서 주무시고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수님을 위해 베푼 잔치에 참여하셔서 마리아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으신 후에 마리아 집에서 한 밤 주무시고 그 이튿날 벳바게에서 나귀 새끼를 구해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29에, 맞은 편 마을로 가서 아직 아무 도 타지 않은 나귀 새기를 풀어 오라고 했습니다. 맞은 편 마을이란 벳바게 마을인 것입니다. 벳바게는 무화과의 집이란 이름인데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동네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을 설명하는 우리 본문을 세 부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메시야 적 행위의 준비입니다(29-34절).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벳바게 동네에 가서 나귀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약 50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였 습니다.
스가랴 9:9,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그 동안 예수님은 많은 비유를 통해서 자신이 메시야임을 은연 중에 말씀 하셨지만 이제부터는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아무도 타 보지 못한 나귀새끼란 예수님이 쓰시기 위해 거룩하게 보존해 두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마가와 누가는 나귀새끼만 있은 것으로 표현했는데 마태는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차이는 마가와 누가는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신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고 마태는 본래적 사실에 충실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필 나귀새끼를 타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스가랴 9:9의 예언의 겸손한 왕임을 이루기 위해서 였고 또 다른 이유는 메시야의 본질을 무리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였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마칠 즈음에 이르자 그를 메시야로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을 압제 받고 착취당하는 이스라엘민족을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 야로 오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이 땅에 평화를 촉진 시키기 위 해 오신 것입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이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말합 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평화의 상징인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31절에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 동네에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나귀새끼가 있어 나귀를 풀 때에 주인 들이 왜 나귀를 푸느냐고 물었을 때에 주께서 쓰시겠다 하셨다고 하니까 그대로 나귀를 내어 주 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신적 능력으로 섭리하셔서 나귀 주인으로 하여금 나귀를 선뜻 바 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용하신 후에는 다시 돌려 드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합리적 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부분은 예루살렘 입성과 무리들의 반응입니다(35-40).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 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이르되 찬 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로 끌고 온 나귀새끼는 전에 타본 사람이 없기에 안장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겉옷을 나귀 등에 펼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태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스스로 앉으셨 다는 말이 아니라 제자들이 강권하여 예수님을 나귀 등에 앉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시는 앞 길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펼쳐 놓았고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습니다. 이런 행위는 그 당시에 왕에 대한 존경과 환영을 나타내 는 전통적이 풍습이었습니다. 요한복음12:12에 유월절을 시키려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과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듭니다. 그 당시 조사 자료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275만 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유월절을 지키려 온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 를 살렸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요12:7,18).
베다니와 벳바게는 감람산 위에 있는 동네입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보다 200미터 높습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주무시고 주일 아침에 베다니에서 출발해서 벳바게 마을에 있던 나귀새끼 를 가져 와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37절에는’.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했습니다. 지금 감람산 내리막길에서부터 예루살렘 성 입구까지 예수님을 환영하려 나온 사람들로 가득 찼 습니다.
그리고 찬송하기를 ‘38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 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했는데 이 말씀은 예루살렘을 향해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승리적 모습을 묘사하는 시편 118:25의 인용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메시야의 대망을 염원하던 유대 인이 유월절 기간 동안 낭독하던 할렐 시편 중의 하나입니다. 유월절을 지키려 모인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이러한 명칭을 부여했다는 것은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자기들의 소망을 실현시킬 메시 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 구절의 말씀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의 사명을 암시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탄생 때에 천사들에 의해 밝혀졌던 사실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환 영했던 무리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런 명칭들을 사용했던 근본적이 배경에는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정치적 욕구를 강하게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복음13:34, 35에서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될 것이요 예수님이 죽게 되면 유대인들이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닌 온 인류의 메시야로 재림하시는 예수님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고 환영할 때까지 예수님을 보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34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 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5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을 재촉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마태복음24:14의 선교적 요소요 다른 하나는 유대인들의 회심입니다. 마태복음 24:14천국복음이 온 땅에 전파될 때에 그 때에 끝이 올리라 하셨고, 유대인들의 회심은 누가복음 13:35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온 무리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한편 바리새인들은 매우 불쾌하게 여겼 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환영하는 무리들을 중지시킬 것을 요구하는 주제넘은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만약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했습니다. 사 람들이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 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의 메시야 사역을 오해하는 것은 몹시 경계하셨지만 사람들이 예수 님의 메시야 되심에 관한 진리를 선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은 마땅히 여겨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부분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에 대한 애가입니다(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 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 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 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더디어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 입구에 도착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51에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걸어가신 6개월 간의 여정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까지 5일이 남았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올라온 제자들과 갈릴리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려 올라온 수백만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세워질 메시야 왕국에 대한 기대로 축제의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멀지 않는 장래에 예루살렘에 임할 멸망을 보시고 우시며 애통해 했습니다. 평화스럽고 웅장한 자태를 갖추고 있는 예루살렘성이지 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능욕하고 돌로쳐 죽이 는 강퍅한 범죄를 행했던 이 성읍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가를 잘 알 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시며’한 단어는 ‘에클라우센’인데 단순히 눈물을 흘리며 우는 정도가 아니라 갑자기 울 음을 터트려 소리를 내어 통곡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여 서로 떠들고 웃으며 축제 분위기에 있던 사람들이 놀래서 조용해졌을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 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멸망에 대해 누가복음에서 세 번 말씀하셨습니다. 첫번째는 누가복음 13:34-35에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오시는 길에 말씀하셨고, 두번째는 누가복음 19;41-44 에서 말씀하셨고 세번째는 누가복음 21:20,21에서 예언하셨습니다. 한 사건을 두고 세번씩이나 경고한 것은 반듯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강력한 표현입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21:20, 21에 서는 예루살렘이 포위될 때에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도 알려 주셨습니다.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치고 성내에 있는 자들은 성에서 빠저 나갈 것이요, 촌에 있는 자들은 성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예루살렘성으로 피난해 들 어 갔습니다. 왜냐하면 히스기야 시대에 앗수르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천 사를 보내시사 하루 밤 사이에 앗수르군대 18만 5천명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 유대인들이 생각하기를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성 이라 하여 전쟁이 일어나면 예루살렘으로 몰려 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이 포위되면 그 성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양식과 물 공급입니다. 그런데 성은 포위되었고 밖에서 들어 오는 물자가 차단되게 되면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칼로 죽는 사람보다 굶어 죽는 사람이 더 많을 것입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전염병이 돌아 병으로 죽게 되고 그러다가 성이 함락되면 칼에 죽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AD70년에 로마장군 디토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에 그 때도 유월절이었다고 합니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고 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나라 전역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 들었다고 합니다. 그 때에 예루살렘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이 포위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산으로 피신 하고 성 안에 있던 자들은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왔고 성이 없는 촌에 살던 사람들은 신변 보호를 위해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당시로는 당연한 처신이었지만 그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산으로 피신해서 그 난리를 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이유가 많이 있겠지 만 주후 70년 때에 기독교인들이 로마군과 모의를 해서 자기들만 살아 남고 민족을 배반했다고 오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유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보살 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했는데 ‘보살핌을 받는 날’의 정확한 원어적 의미는 ‘하나님 이 너를 방문하시는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 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지만 그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그를 능욕하고 죽 인 것이 무엇보다도 예루살렘 멸망의 직접적인 이유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일날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성전만 둘러 보시고 베다니로 돌아 가셨습니다. 마가복 음 11:11,12,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 서 시장하신지라.’
둘째로 월요일에 있었던 무화과 나무 저주사건 (마가복음 11:12-14)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셔서 고난주간의 둘째 날인 월요일을 맞이했습니다. 무화과 나무의 저주 사건은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이 무화과 저주 사건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를 저주(막11:12-14)한 것과 무화과 나무의 마른 것을 발견하고 예수님이 그에 대해 교훈 하신 것(20-22)을 분리하여 전자는 성전정화사건 이전에 있었던 일로, 후자는 성전 정화 후 그 이튿날인 화요일 아침에 있었던 것으로 언급합니다.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13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예수님은 일요일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둘러 보시고 다시 베다니 동네로 오셔서 그날 밤에 집에서 주무시지 않고 노숙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침식사를 하지 못해 시장하신 채로 예루 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저주하시고 예루살렘 에 가셔서 성전정화작업을 하시고 다시 베다니로 나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땅의 무화과는 3월에 싹이 나서 5, 6월에 열매를 맺고 8-10월에 수확을 합니다. 이 때는 유월절주간입니다. 유월절은 3,4월에 해당합니다. 마가복음 11:13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때는 무화과의 때가 아닙니다. 그럼 에도 예수님이 그 나무에 접근한 것은 잎이 무성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무화 과 나무 저주 사건 자체를 상징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잎사귀는 무성하나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 무를 저주하심으로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성경에서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했습니다(호세아 9:10, 요엘 1:7).잎만 무성하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종교적 의식만 번창하고 참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의 저주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에 급박히 있을 것을 알린 것입 니다.이 사건은 AD 70년에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9:41-44의 말 씀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4:32-34에서 이 죽었던 무화과 나무가 다시 살아 나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이 거의 2천에 가까운1948년 5월 14일에 유엔에 의해 이스라엘이 다시 탄생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탄생하는 것을 보거든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줄 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와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전혀 무관심합니다.
셋째로 월요일에 있었던 성전 정화사건 (눅19: 45-48)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백성이 다 그에 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누가복음19장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곧장 성전으로 가셔서 정화작업을 하신 것 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성경기자들이 예수님의 메시야임을 강조 하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주간의 둘째 날 아침에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에 성전에 가셔서 정화작업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작업은 공생애 기간에 두번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13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도 성전 정 화 작업을 하신 것으로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방문은 구약 예언의 진정한 성취자 이 신 예수님께서 성전을 방문하신 것은 유대교의 마지막 보루인 성전이 더 이상 성전을 통한 하나 님과의 교제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다는 것을 선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모든 자들이라 했는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종합해서 볼 때에 소나 양과 비둘기, 환전상들입니다. 이것들은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에 소용되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먼 곳이나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은 짐승을 가져 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져 온다 할지라도 검사를 엄격하게 해서 제사용으로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별합니다. 그러므로 아예 성전에서 구입하게 됩 니다. 이 과정에서 제사장과 상인 사이에 담합을 하여 비싸게 제물을 팝니다. 그래서 생긴 이익 금이 제사장에게 돌아 갑니다. 그리고 모든 유대인들은 일년에 성전세 반 세겔을 유월절 시기에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통용되던 로마 황폐에는 로마 황제상이 새겨져 있었기에 우상이 새겨진 화폐를 성전에 바칠 수 없다하여 유대 화폐로 바꾸어 바치게 했습니다.
이 때에 로마화폐와 유대화폐와의 차액을 크게 하여 이득을 독점하였는데 여기에서 나오는 이익 을 제사장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둘기 파는 자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소나 양을 바 치지 못하는 가난한 자를 위해서 비둘기를 제물로 바치라고 했는데 제사장은 이것을 악용해서 비둘기 값을 높게 하므로 가난한 자들을 괴롭혔습니다.이렇게 제사장들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사악한 욕심을 채우는 장소로 전락시켰습니다. 이 성전 정화는 곧 있게 될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을 정화하신 후에 예수님은 소경과 저는 자들을 치료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성전 정화 사건은 기득권자인 대제사장과 그 아류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입니다. 자신들의 밥통에 손을 댄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단합니다. 그런 사실을 아시는 주님은 그런 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성전에서 무리들에게 말씀도 가르치고 병자 들도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제 저녁이되어 성전을 떠나 베다니로 물러 가서 거기서 유하셨다고 합니다. 고난주간 이틀 채인 화요일이 저물었습니다. 마가복음 11:19-20, ’19 그리고 날이 저물 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다음 주일에는 누가복음 20장의 수요일에 일어난 일들을 알아 볼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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