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부
예수님이 직접 인을 떼시면 네 스랍들이 각각의 말들을 내어 보냄으로 일곱 인을 떼시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일곱 인을 떼심은 7년 환난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일곱 인을 떼심은 7년 환난의 이정표(milestone)가됩니다.
7년 환난이 가까워 옴을 보여주는 싸인입니다. 특히 여섯째 인을 떼심에서 큰 천재 지변이 일어남으로 세계 경제가 완전히 붕괴됩니다. 아울러 적그리스도가 등장할 환경이 조성되면서 전 3년 반, 일곱 나팔 재앙의 환경으로 바뀌게 됩니다.
일곱 인을 떼심은 일곱 나팔 재앙과 일곱 대접 재앙과는 구별됩니다. 그 차이점들을 말하자면,
- 일곱 인을 떼심은 예수님이 주관하시는데, 일곱 나팔, 대접재앙은 천사들이 수행합니다.
- 일곱인을 떼심은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재앙의 내용들과 확연히 구별됩니다. 일곱 인을 떼실 때는 백마, 적마, 흑마, 청황색마, 천재지변, 순교자 등으로 나타나지만,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재앙 때는 이들 두 재앙의 내용들이 비슷합니다. 재앙들이 땅, 바다, 강과 호수, 공중, 3차 전쟁과 아마겟돈 전쟁 등으로 그 양상이 비슷합니다. 그래서 인을 떼심은 나팔과 대접재앙으로부터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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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인을 떼시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계시록 6:1-17)
- 일곱 인으로 봉함한 뜻
- 인봉한 시기
- 인을 떼시는 시기
- 인을 떼시는 목적
- 적그리스도의 정체가 드러남
- 프리메이슨이 만든 나라 미국
- 신세계 질서가 최종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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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인으로 봉함한 뜻
1) 인봉했다는 것은 비밀이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5:1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오른 손에 일곱 인으로 봉함한 두루마리 책이 있는데 안팎으로 쓴 책이 들려 있습니다. 이 때에 한 천사가 큰 소리로 외치기를 누가 그 책을 펴며 그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냐 합당한 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 위 영계나 땅위에 있는 어느 누구도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보고 요한이 실망하여 통곡을 합니다.
인을 뗀다는 것은 그 내용을 모든 인류에게 알리고 보게 되는 것, 즉 그 비밀의 사건들이 역사에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하나님의 비밀의 계획을 역사에 실현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왜 이 책을 하나님의 오른 손에서 받아서 인을 뗄 자가 없었을 까요?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합당한 사람이 보이지 않으므로 요한이 크게 울고 있을 때에 장로 중에 한 사람이 요한에게 말하기를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했습니다. 이 때에 어린 양이 나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서 책을 취하여(계시록 6:1에 보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십니다. 인을 뗀다는 것은 비밀이 풀어지고 공개된다는 의미입니다. 때가 차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표증이 됩니다.
- 일곱 인으로 봉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에 성취하실 일곱 가지 비밀을
의미합니다.
본래 인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역사의 시작과 역사의 진행과 역사의 종말이 모두 전개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건설하시려는 하나님이 역사에 대한 청사진이 없겠습니까? 역사는 하나님의 청사진 대로 진행됨을 우리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하신 그 모든 예언들이 성취되었듯이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 오늘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일곱 인이란 하나님께서 말세에 이루어 가실 일곱 가지 비밀 즉 말세에 성취될 세계 역사의 7대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이 일곱 사건들이 전개되는 것은 7년 환난이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며, 세상 종말이 가까웠다는 표적(Sig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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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봉한 시기
다니엘서 12:4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그 인봉한 책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했습니다. 다니엘은 그 글의 내용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다니엘서 12:8에,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주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니엘아 갈지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다니엘서 12:9) 이 일곱 인봉한 책은 다니엘서 12:9에서 인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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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을 떼시는 시기
계시록의 예언을 해석하는데 절대 필요한 조건은 언제부터 인봉한 두루마리 책의 인을 떼기 시작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이 대답을 확실하게 얻게되면, 예언의 해석도 정확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세의 비밀을 담은 두루마리를 하나님이 맨 처음으로 보여 준 사람은 다니엘 선지자였습니다. 다니엘도 환상 중에 여러 가지 많은 환상들을 보았는데 그 중 맨 나중에 본 것이 이 두루마리였습니다. 다니엘이 이 책의 내용을 알고 싶어서 ‘내가 본 놀라운 이 사건들의 끝이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고 질문했을 때에 주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다니엘아 갈지어다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다니엘서 12장 4절 속에 인을 떼시는 시기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마지막 때까지’란 말을 정확히 해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지막 때 즉 말세까지는 봉함하여 아무도 그 비밀을 알지 못할 것이나 마지막 때가 되면 그 인을 개봉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때, 인봉을 뗄 그 때가 언제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암시에는 ‘사람들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는 그 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류 역사를 돌아 볼 때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빨리 왕래하기 시작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었던 주후 1세기에는 현대와 같이 빨리 왕래하는 교통수단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가장 빠른 교통 수단이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과학이 발달하면서 1712년에 영국의 토마스 뉴코멘(Thomas Newcomen)이 증기 엔진을 개발하였고 그 엔진으로 기선과 기차가 발명되어 바다와 대지를 빨리 달리기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1770년 경에는 가솔린 엔진이 개발되어 더 빠른 교통 수단들 즉 가솔린 자동차가 발명되었습니다. 그 후에 전기 엔진, 디젤 엔진 등이 발명되어서 더 빠른 기차와 자동차가 대지 위를 달리게 되었습니다. 기선과 군함이 바다를 누비며 비행기가 지구를 일일 생활권으로 만들었습니다. 더 놀랍게도 제트 엔진의 발명으로 제트 비행기와 미사일이 발명되어 핵무기의 운반체가 개발되면서 우주 여행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증기 엔진과 가솔린 엔진이 모두 1700 년 대에 발명되었으니 ‘사람들이 빨리 왕래하며’란 다니엘서 예언이 1700년 대에 이루어진 것을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서 12:4의 암시에 의하면 우리는 이제 인을 떼기 시작하는 말세권의 시대가 1800년도 초부터 시작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에서 ‘왕래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쉬테투’는 문자적으로는 ‘노를 젖다’ 혹은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책을)통독하다’, ‘(책을) 철저히 검토하다’로도 해석되는데 이는 책을 샅샅이 훑어보는 모습을 마치 책에 담긴 지식 속에서 이리 저리 돌아다니는 모습으로 비유한 데서 유래된 표현이라 합니다. 요즘은 인터냇을 통해 책상에 앉아서 온 세계를 구석구석 쉽게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터냇 구글을 통해서 모르는 모든 궁금한 문제들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본서에 기록된 예언이 성취될 종말의 때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예언의 내용을 연구하며 그에 따라 이 예언의 의미가 밝히 드러나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될 것을 뜻합니다(그랜드 종합 주석, 다니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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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을 떼시는 목적
인을 떼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미리 우리들에게 계시해 주신 비밀을 우리가 보고 알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 성도들에게 미리 종말에 이런 일이 역사에 일어날 것이라고 계시하시고, 진행시키는 그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4에 보면, ‘그러나 그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라’고 하시므로 미리 종말에 대한 징조를 우리들에게 이미 예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
(누가복음 21;28).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누가복음 21:31).
위의 인용한 성경구절들은 모두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역사에 이 시대에 성취되는 성서의 예언들에 대하여 매우 민감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모든 예언이 역사 위에 재림의 징조로 모두 성취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성도들이 깨어 기도하며 말세의 사명을 다하게 하기 위하여 이 예언들이 오늘날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종말적인 예언과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종말의 시간을 알려주는 역사의 시계라고 생각함이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그 예언의 시간들이 하나 하나 성취될 때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시계를 보면서 그 시간을 잘 이해하고 그 시간에 해야 할 우리들의 사명을 완수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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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그리스도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남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데살로니가후서 2:7).
이때로부터 멸망의 아들, 불법의 사람들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입니다. 이제부터 이들을 막는 일이 걷우어지고, 세상에 드러나며, 세력을 형성하며, 음모의 일이 본격화됩니다.
(이하의 내용들은 김준식목사의 요한계시록의 증언에서 필요한 부분들을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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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인을 떼심-식민전쟁
“내가 보매 어린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 소리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이에 보니 흰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계 6:1-2).
- 본문의 해석 첫째 인을 떼시는 예언의 해석을 위한 암시가 들어 있는 단어들을 하나씩 분석해 보면, ‘흰 말’은 그 당시 전쟁터에 나가서 싸울 때에 왕이 총 사령관이 되어 전투를 지휘할 때 타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흰말은 어떤 왕이 타고 전투를 지휘하고 있다는 암시입니다. ‘면류관’은 그 당시 오직 왕 만이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흰말과 면류관이 모두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는 데 탄 자는 어떤 나라의 왕이라는 암시입니다.
‘활’은 대개 그 당시에 왕은 전투를 지휘할 때에 손에 검을 들고 전투를 지휘했는데 이상하게도 이 왕은 손에 활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암시가 내포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활은 공격무기로써 공격수들이 가지는 무기입니다. 이 백마를 탄 왕은 전사들에게 전쟁을 지휘도 하지만 자신이 일선에서 전사들의 앞에서서 공격하며 싸우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또 다른 암시는 활이란 화살로 한 사람씩 쓰러뜨리는 무기이니 개인을 상대로 하는 어떤 싸움임을 나타냅니다.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는 전쟁의 계속적인 승리를 암시한 표현입니다. 백전백승의 전쟁을 수행하는 왕이라는 것입니다.
이상의 단어들 속에 내포된 뜻을 자세히 종합하여 연구해 보면 어떤 왕이 엄청난 힘과 지혜와 전략을 가지고 전쟁터의 선두에 서서 지휘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씩 쓰러뜨리며 계속적 승리로 인하여 그의 영토가 계속 확장되며 그 나라의 백성들이 날마다 증가되어 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백마를 타신 분이 어느 나라의 왕이며 누구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 백마를 타신 왕이 그리스도라고 해석함이 타당하다고 믿습니다. 그 근거는 계시록 19:11-16까지의 말씀 때문입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했습니다. 여기에서 백마를 탄 자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백마를 타신 분이 그리스도이시라면 활은 복음의 활입니다. 왜 복음을 활과 화살로 계시했을까요? 그것은 화살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쏘아 쓰러뜨리는 무기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특색입니다. 부모가 예수를 믿고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나라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다고 해서 그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복음의 화살에 맞아 쓰러져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여 예수를 구주와 왕으로 마음 속에 영접하고 그의 주권과 왕권을 존중하며 성령의 인도로 살기 시작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활과 화살로 상징하여 계시한 것은 매우 적합한 상징으로 생각됩니다. 백마에 대한 예언은 역사 위에 어느 시점에서 기독교가 급속히 전 세계로 전파되어서 기독교가 전 세계적인 종교로 부상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 기독교가 전 세계로 전파된다는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간단히 고찰해 보고자 합니다
기독교가 전 세계로 전파되고 전 세계적인 종교가 되는 것이 필연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6:15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시기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하셨고 또한 마태복음 28:18-20에서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영혼구원입니다. 선교하도록 하늘 나라에서 지구로 파송하셨습니다.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사명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최우선 순위의 사명입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을 통해서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에서의 성령님은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라고 명령하심에 따라 복음이 소아시아를 거쳐 로마로 그리고 그 당시에 알려진 모든 세계로 전파되었습니다.
1517넌 종교 개혁 이후 적어도 1 세기 동안은 가톨릭과의 교리적인 논쟁 때문에 선교는 별로 강조되지 못했습니다. 본격적인 프로테스탄트의 선교운동은 영국에서 1800년 초에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의 영향을 받은 요한 웨슬레가 전 영국에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부흥운동의 영향은 선교운동에 불을 붙였습니다. 1792년에 윌리암 케리를 중심으로 대영 침례선교회가 발족되었고 1799년에는 대영 선교회, 그리고 1804년에는 대영 성서공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 후에 우후 죽순처럼 영국과 유럽에서 선교회들이 조직되어 근대 선교운동을 적극적이며 조직적으로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이렇게 범 세계적으로 선교운동을 일으킨 것은 기독교 역사상 처음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기독교는 유럽의 종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종교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는 1세기부터 세계 선교를 위해 노력해 왔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했으나 1800년 초 영국에서 일어난 선교운동 시대 이후로부터 성공적으로 선교사명을 수행하게 된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유럽의 강대국들이 세계 도처에 식민지를 만들어서 유럽인들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여러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가는 곳마다 교회와 학교와 병원들을 설립했습니다. 그 전에는 선교사들이 식인종들에게 살해되는 경우도 있었고 후진 지역의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병에 걸려도 치료가 불가능해서 병사하는 선교사 수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식민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본국과의 연락도 가능해졌고 안전도 보장되었고 질병의 치료도 가능해졌습니다. 물론 유럽인들이 식민지에 이주해 가면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둘째는 과학의 발전으로 교통 수단이 발달하여 선교사들을 보낸 후에도 선교사의 생활비와 의약품이나 필수품들을 보내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일어난 1800년대 초의 강력한 세계 선교운동은 윌리암 케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대영 침례 선교회의 창립은 신교의 역사상 새로운 한 시대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1795년에 런던 선교회가 초 교파적으로 창립되었고, 1797년에는 유럽에서 네델란드 선교회, 1799년에는 교회 선교협회, 1804년에는 대영 성서공회가 조직되어 외국어 성서번역과 출판에 크게 공헌하기 시작했습니다. 청교도들의 식민지인 미국은 조금 늦은 1850년대부터 현대 선교 운동에 동참했으나 현재로는 온 세계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설립된 이후 약 1800년 동안 기독교는 서구의 종교, 즉 백인들의 종교로 존속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선교운동이 1800년대 초에 영국에서 일어난 이후 기독교는 약 1세기 동안에 세계적인 종교로 확장되었습니다. 1800년 이후에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이 복음을 받고 죽어가던 수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께 예배하여 영광을 돌리며 신앙생활을 하며 주의 지상명령을 함께 수행하게 된 일은 참으로 놀라운 역사의 기적입니다.
1800년 이후에 선교한 조견표를 참고해 보겠습니다.
선교운동의 조견표
국 가 |
파송 년도 |
파송한 선교회 |
개척 선교사 |
남 아시아 지역(5개국) |
|||
인도 |
1793년 |
대영 침례 선교회 |
윌리암 케리 |
파키스탄 |
1849년 |
미국 장로교 선교회 |
찰스 훠맨 |
실론 |
1912년 |
대영 침례 선교회 |
제임스 차터 |
네팔 |
1950년 |
네팔 연합 선교회 |
성명미상 |
티벧 |
1955년 |
복음주의 연맹 선교회 |
레(티 벹인) |
동남 아시아 지역 (12개국) |
|||
버마 |
1812년 |
미국 외국 선교 위원회 |
아도니람 저드슨 |
말레이시아 |
1788년 |
런던 선교 협회 |
윌리암 밀른 |
태국 |
1828년 |
화란 선교협회 |
칼 구슬라프 |
베트남 |
1911년 |
미국 크리스찬 연맹 |
미국 크리스찬 연맹 |
라오스 |
1902년 |
스위스 해외 선교회 |
성명 미상 |
캄보디아 |
1915년 |
미국 크리스천 연맹 |
성명 미상 |
인도네시아 |
1776년 |
화란 선교 협회 |
성명 미상 |
수마트라 |
1858년 |
바셀 복음주의 선교협회 |
루드웍 로멘스 |
셀레베스 |
1822년 |
화란 선교협회 |
성명 미상 |
보르네오 |
1835년 |
라인지방 선교협회 |
성명 미상 |
필리핀 |
1899년 |
미국 장로회 선교회 |
제임스 로저스 |
민다나오 |
1903년 |
미국 선교 위원회 |
5명의 선교사 |
극동 지역(4개국) |
|||
중국 |
1807년 |
런던 선교 협회 |
로버트 모리슨 |
대만 |
1865년 |
영국 장로회 선교회 |
성명 미상 |
일본 |
1895년 |
미국 감독교회 선교회 |
리긴스 |
한국 |
1884년 |
미국 북장로 교회 |
알렌 |
중동 지역(9개국) |
|||
터키 |
1830년 |
미국 외국 선교회 |
폴리니 피스크 |
이집트 |
1815년 |
교회 선교 위원회 |
윌리암 조윗트 |
레바논 |
1823년 |
미국 선교 위원회 |
피스트 |
시리아 |
1824년 |
미국 선교 위원회 |
버드 |
이란 |
1811년 |
동인도 회사 소속회 |
헨리 마르틴 |
이락 |
1820년 |
런던 유대인 협회 |
조셉 월프 |
요르단 |
1848년 |
영국 교회 |
성명 미상 |
아라비아 |
1885년 |
소속 미상 |
이온 케잇 활코 |
이스라엘 |
1820년 |
런던 유대인 협회 |
성명 미상 |
서 아프리카 지역 (12개국) |
|||
세네칼 |
1862년 |
파리 복음주의 선교협회 |
성명 미상 |
기니아 |
1916년 |
크리스천 얼라이언스 |
성명 미상 |
시에라 레오네 |
1795년 |
대영 침례 선교회 |
루드웨이, 그릭 |
리베리아 |
1830년 |
교회 선교 협회 |
팀 선교 |
상아 해안 |
1913년 |
리벨리아 |
인 하리스 |
가나 |
1828년 |
바젤 선교회 |
팀 선교 |
토골란드 |
1847년 |
북 독일 선교회 |
성명 미상 |
다호메이 |
1870년 |
영국 감리 교회 |
아더 밀슨 |
나이지리아 |
1842년 |
웨슬레 감리교회 |
성명 미상 |
수단 |
1919년 |
복음 선교 연합회 |
팀 선교 |
볼타 |
1921년 |
하나님의 회중 |
성명 미상 |
니제르 |
1924년 |
수단 내지 선교회 |
팀 선교 |
남 아프리카 지역 (7개국) |
|||
앙골라 |
1878년 |
대영 침례 선교회 |
성명 미상 |
로데시아 |
1859년 |
런던 선교 협회 |
로버트 모파트 |
모잠비크 |
1880년 |
감리교 선교 협회 |
성명 미상 |
서남 아프리카 |
1805년 |
런던 선교 협회 |
유우고 |
베추아날드란 |
1817년 |
런던 선교 협회 |
로버트 모파토 |
남 아프리카 |
1737년 |
모라비안 선교단 |
조지 슈마트 |
말라라가시 |
1818년 |
런던 선교 협회 |
데이비스 존스 |
북 아프리카 지역 (4개국) |
|||
리비아 |
1888년 |
북 아프리카 선교회 |
윌리암 레이드 |
튀니지 |
1829년 |
런던 유대인 협회 |
성명 미상 |
알제리아 |
1881년 |
북 아프리카 선교회 |
에드워드 클레이 |
모로크 |
1875년 |
런던 유대인 협회 |
팀 선교 |
동 아프리카 지역 (6개국) |
|||
수단 |
1899년 |
북 아프리카 선교회 |
윌리암 레이드 |
에디오피아 |
1844년 |
스웨덴 복음주의 선교회 |
팀 선교 |
소말리아 |
1875년 |
스웨덴 복음주의 선교회 |
의료팀 선교 |
케냐 |
1844년 |
교회 선교협회 |
죤 크라프, 죤 랩멘 |
우간다 |
1876년 |
교회 선교협회 |
8명의 팀 |
탕가니카 |
1860년 |
중앙 아프리카 대학선교회 |
팀 선교 |
중앙 아프리카 지역 (6개국) |
|||
카메룬 |
1841년 |
대영 침례 선교회 |
성명 미상 |
챠드 |
1925년 |
침례교 중앙 선교회 |
팀 선교 |
중앙 아프리카 |
1920년 |
형제 교회 선교회 |
팀 선교 |
가봉 |
1842년 |
미국 선교 위원회 |
성명 미상 |
슈바이처 박사가 선교한 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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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지운 콩고 |
1878년 |
리빙스톤 내륙 선교회 |
죠지 그랜팰 |
르완다 ,우룬디 |
1926년 |
교회 선교 협회 |
팀 선교 |
남 아메리카 지역 (10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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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
1855년 |
남미 복음 주의 연맹 |
로버트 켈리 박사 |
우르과이 |
1839년 |
미국 감리교회 |
윌리암 노리스 |
파라과이 |
1839년 |
남미 선교협회 |
아돌프 헨릭센 |
아르헨티나 |
1820년 |
남미 선교 협회 |
제임스 톰슨 |
칠례 |
1821년 |
영국 성서 공회 |
제임스 톰슨 |
볼리비아 |
1898년 |
케나다 침례 선교회 |
팀 선교 |
페루 |
1824년 |
미국 성서 공회 |
아이삭 휘라인 |
에콰도르 |
1824년 |
영국 성서 공회 |
제임스 톰슨 |
콜롬비아 |
1825년 |
영국 성서 공회 |
제임스 톰슨 |
베네수엘라 |
1833년 |
해외 기독교 선교회 |
팀 선교 |
중앙 아메리카 지역 (10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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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
1826년 |
미국 성서 공회 |
성명 미상 |
과테말라 |
1881년 |
미국 장로교 선교회 |
미국장로교 선교회 |
온두라스 |
1896년 |
중남미 선교회 |
중남미 선교회 |
엘살바도르 |
1898년 |
중남미 선교회 |
중남미 선교회 |
니카라과 |
1849년 |
독일 모라비안 선교회 |
독일 모라비안 선교회 |
코스타리카 |
1849년 |
중남미 선교회 |
중남미 선교회 |
파나마 |
1898년 |
미국 남침례교회 |
미국 남침례교회 |
쿠바 |
1881년 |
미국 남감리교회 |
미국 남감리교회 |
도미니카 |
1889년 |
신교 감독 교회 |
신교 감독 교회 |
아이티 |
1869년 |
웨슬레 감리교회 |
두 선교사 |
남 태평양 도서 지역 (8개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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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이어티군도 |
1797년 |
런던 선교 협회 |
18명의 팀 |
통가 제도 |
1797년 |
런던 선교 협회 |
10명의 팀 |
사모아 제도 |
1830년 |
런던 선교 협회 |
존 윌리암스 |
피지 제도 |
1823년 |
영국 웨슬레 감리교회 |
성명 미상 |
뉴헤브라이트 |
1839년 |
런던 선교 협회 |
요한 윌리암스 |
카롤린 군도 |
1852년 |
미국 선교 위원회 |
팀 선교 |
솔로몬 군도 |
1850년 |
뉴질렌드 영국 교회 |
성명 미상 |
뉴기니아 |
1870년 |
런던 선교 협회 |
사무엘 알레인 |
이상의 표에서 보는 대로 총 93개국 중에 1800년 대에 선교된 나라는 71개국이나 되는데 비해 1700년대는 7개국, 1900년대는 15개국 뿐입니다. 이 근대 선교운동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매우 경이적인 사건입니다. 하나의 종교가 1세기 동안에 세계적인 종교로 확장된 예가 없었습니다. 백마의 사건은 종말에 대한 주님의 예언의 성취이며(마24:14), 세계 역사의 대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가 백마를 타고 그분을 주와 왕으로 모시고 따르는 그의 백성들을 총지휘하며 말씀과 성령으로 된 복음의 활과 화살로 전 세계에 나가서 승리하셨고, 또 계속적으로 승리하고 계십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태복음 24:14).
그런데 현대 선교운동을 분석해 보면 서구의 식민주의의 물결을 타고 복음이 전 세계로 신속히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말은 전쟁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 백마는 백인들의 식민 전쟁을 암시한 것입니다. 복음이 아시아에서 먼저 유럽으로 건너 갔습니다. 복음을 받아 하나님을 믿은 유럽이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하나님의 축복을 먼저 받아서 정치, 경제, 과학, 군사적으로 앞서가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종교개혁, 산업혁명, 금융제도, 민주주의 정치제도 및 과학의 발전으로 기선, 군함, 기차, 자동차, 전차,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백인들이 발명하고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리고 항해술의 발전으로 아시아와 미대륙을 발견하게 되고 무역과 통상을 위해 왕래하게 되었습니다. 새로 발견한 그 곳에 이민을 보내서 마을과 도시를 건설하고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농장과 상점을 통해 산업이 발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가 주둔하고 경찰서를 세우고, 그 곳을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어 갔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이 서구의 식민주의의 바람에 돛을 달고 빠르고 효과적으로 전 세계에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선교사들과 식민주의의 세력 간에는 협력관계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특히 영국은 대륙에서 떨어진 유리한 지정학적인 원인도 있었으나 18세기 초에 강력한 영국 해군, 무역의 활성화, 식민지 등으로 세계 정상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영국을 하나님이 위와 같이 축복하여 정상의 위치에 올려 놓고 영국을 통해서 강력한 현대 세계 선교운동이 일어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확신합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기초가 영혼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14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일곱 인을 떼심을 복음전파 즉 선교의 측면으로 생각해야 하며 그렇기에 백마를 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시라는 것이 맞는 해석이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첫째 인을 떼심은 백인들, 특히 영국에서의 식민전쟁으로 인해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가를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식민전쟁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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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식민지와 제국주의
원래 역사에서 말하는 식민지Colony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식민植民, 즉 구성원의 일부를 이주케하여 거주하도록 할 목적으로 개척하여 만든 도시나 국가를 일컫는 것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미생물 배양을 할 때 배지 위에 만들어진 미생물의 군집을 콜로니라 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미생물 하나가 어느 지점으로 떨어져 나와 증식하여 하나의 군집을 이루듯, 모집단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또다른 집단을 이루어 확장해가는 바로 이것이 원래의 식민지인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마을을, 도시를 떠나 또 다른 마을을, 도시를 건설하는 식민사업을 통해 확장되어 왔습니다. 처음에는 한 개 마을에 불과하던 것이, 어느 샌가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되고, 그렇게 마을이 늘어나면서 마을과 마을 사이의 네트워크를 통해 사회는 보다 거대화되고 복잡해지고, 그러는 사이 그 중심에는 그 모든 마을을 통괄하는 중심부가 형성되게 됩니다. 보다 거대하고 보다 고도화되고 그리고 다른 마을을 통괄하는 권위가 존재하는 초기국가는 그렇게 형성되었습니다.
고대의 식민지라는 것은 바로 그러한 연장이었습니다.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카르타고나 그리스인들이 건설한 밀레토스 등의 식민도시들도 결국은 같았습니다. 한정된 생산, 그럼에도 부양해야 하는 많은 인구는 페니키아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바다를 통해 더 먼, 더 풍요로운 땅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 되도록 되었습니다. 그래서 점차 페니키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나와 때로는 땅을 걸어서, 때로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자신들만의 도시를 건설했고, 그러므로 그들의 세계는 지중해 전체로까지 확장되어 갔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만이 아니었습니다. 근세, 지리상의 발견으로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에 소개되자 많은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유럽을 떠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서 마을을 세우고, 도시를 세우고, 그렇게 새로운 대륙에 새로운 자신들만의 세계를 세우고, 마침내는 자신들만의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이 역시 고대 식민지의 연장이라 할 것입니다. 결국은 유럽인의 식민정책에 의해 건설되고 유지되고 발전되었습니다.
그러면 근대의 식민지란 무엇이겠습니까? 아시다시피 근대의 식민지라는 것은 근대 이전의 식민지와는 달리 식민지라기에는 식민이라 할만한 것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과연 영국인으로서 멀리 인도까지 이주하여 자신의 마을을 만들고 도시를 만들고 자신의 터전을 일군 사람이 몇이나 되었습니까? 아프리카에서는? 중동에서는? 멀리 동남아에서는? 물론 남아메리카 공화국과 같이 백인의 식민에 의해 세워진 나라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들 식민지에서 유럽인들은 아주 소수였고 비록 그 백인들이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다수는 어디까지나 원주민들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같은 차이를 만든 것일까요? 아니 그럼 왜 근대 식민지를 식민지라 부르는 것일까요?
결국 이것이 근대제국주의와 근대 이전의 영토확장을 구분 짓는 기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대 이전의 영토확장이란 말 그대로 땅 따먹기였습니다. 땅을 빼앗아 자기 땅을 늘리고, 백성을 빼앗아 자기 백성을 늘리고, 땅은 곧 생산이고 백성은 곧 노동력이고 병력이니, 그것이야 말로 당시 국력을 키우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아직 땅에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던 시대에 생산을 확보하고 인구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영토확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땅과 사람을 두고 다투는 종래의 방식은 18세기에 접어들면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굳이 땅을 통하지 않고도 충분한 부를 쌓고, 굳이 사람을 통하지 않고도 충분한 힘을 갖출 수 있게 된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출현이었습니다. 산업혁명으로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자본주의로 말미암아 자본 그 자체가 생산수단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땅과 사람에 집착할 필요 없이 생산과 자본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든지 부를 쌓고 힘을 키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른 면에서 영국이 프랑스를 결정적으로 추월할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습니다.
다시 말해 18세기 이후 이른바 근대라 불리우는 시대로 접어들게 되면서 제국주의 열강의 목표는 더 이상 땅과 사람을 빼앗고 차지하는 정책을 고수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땅을 차지하기보다 더 많은 부를 쌓을 수 있는 수단이 생겼고, 굳이 사람의 머릿수를 늘리지 않아도 기술의 발전은 그것을 충분히 채워주고도 남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더 이상 무슨 땅과 사람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 구축한 새로운 생산양식 아래 생산된 제품들을 더 비싼 값에 파는 것과 그 원료가 되는 것들을 더 싼 값에 사들이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쓸데없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며 자국의 국민들을 굳이 멀리 남의 땅에 옮겨 놓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근대의 제국주의 아래에서의 식민지에서는 식민지이면서도 식민이 나타나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다른 형태로의 식민이 나타난 것입니다. 바로 경제적인 식민입니다. 상대의 정부를 무너뜨리고 땅과 인민을 차지하고 구속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직접 지배하여 그로부터 이익을 구하려 하지 않고. 그 대신 그로써 자국의 민간 자본가들이 그 땅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함으로써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근대제국주의에 있어 이익을 얻는 대상은 이들 자본가들인 것이고,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란 이 자본가들이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경제활동이었던 것입니다. 즉 식민지를 생산수단으로서 본국에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본국의 경제적 이해를 식민지로 이식하여 그로부터 이익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것이니, 그래서 경제적인 식민인 것입니다.
아무튼 이처럼 근대제국주의가 추구하는 것이 땅이나 사람보다는 경제적인 이익을 더 최우선의 목표로 삼고 있기에, 사실상 근대제국주의와 영토획득 – 식민지 개척은 큰 관계가 없었습니다. 식민지라는 것은 근대제국주의가 그 경제적인 이익을 확대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의 과정이고 수단일 뿐이고, 어차피 식민지가 아니더라도 경제적인 이익만 극대화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실제 19세기 영국 등의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침략할 때도 사실상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등의 열강이 중국으로부터 얻어낸 영토란 극히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아편전쟁을 비롯 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때마다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냈음에도 특별히 더 많은 영토를 얻은 것도 황제를 폐위시키고 대신해 중국을 지배하게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또 전쟁을 일으키거나 해서 더 많은 영토를 얻거나 황제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대신하고자 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중국에서의 자국의 이권을 더욱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했을 따름이었습니다. 하긴 그것이 원래 제국주의 를 하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전쟁이라는 건 원래 경제활동의 하나로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더 많은 생산과 더 많은 이익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우던 것이, 싸우지 않고도 그것을 얻고자 정치가 나오고 외교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결국 궁극은 경제였습니다. 생산이 충분하다 못해 과잉된 시대에는 그래서 정치든 외교든 전쟁이든 결국 다시 경제로 수렴하게 됩니다. 그래서 현대의 제국이란 곧 자본의 제국입니다. 제국주의를 하자면 돈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국의 민간 자본가들이 그 땅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함으로써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근대제국주의에 있어 이익을 얻는 대상은 이들 자본가들인 것이고,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란 이 자본가들이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경제활동이었던 것입니다. 자국의 민간 자본가들이 그 땅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함으로써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근대제국주의에 있어 이익을 얻는 대상은 이들 자본가들인 것이고,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란 이 자본가들이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경제활동이었던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자본가들이란 누구를 말합니까? 식민전쟁을 하려면 자금이 필요합니다. 이 전쟁자금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1800년 대에 유럽 특히 영국에서 국제 자본, 국제 금융업이 발전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이 문제를 풀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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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정책의 주체자들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기로하겠습니다. 마태복음 6:19-24에서 예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의 물질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에서 하나님과 재물을 동등하게 놓았습니다. 여기 ‘재물’의 원어는 매몬(Mamon)입니다. 히브리어적 의미는 ‘물질적 소유’인데 원래는 나쁜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이 단어는 ‘맡기다’라는 뜻을 가진 어근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매몬이란 사람이 은행이나 어떤 종류의 안전한 금고에 재물을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매몬은 어떤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안전하게 보관하려고 다른 사람에게 맡긴 재물을 말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매몬은 맡겨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믿어(Trust) 버리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 끝에 매몬은 대문자로 시작하게끔 되었고 신과 같이 인식되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안전하게 보관 하기 위해 누구에게 위탁했던 소유물이 결국에 가서는 인간이 전적으로 신뢰를 걸은 신이 되어버렸습니다. 신이란 인간이 전적으로 신뢰를 거는 것입니다. 이 정의보다 신의 본질을 더 잘 나타내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물질을, 재물을 믿을 때에 그 물질이 자기를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재물의 신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로 다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재물 신’은 세상 신을 말함이요 세상 신은 곧 사탄을 말합니다. 조금 전에 ‘매몬’은 ‘어떤 사람이 돈을 맡기는 은행’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이런 의미에서 국제 금융가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은행이 세상 신이 된 과정을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매스컴에서는 500억 달러 재산가인 빌 게이츠가 세계 제일의 부자라고 떠들썩 하게 소개합니다. 이 말을 사실이라고 믿는다면 보기 좋게 속은 것입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세계의 부호 랭킹에는 초 슈퍼 급 부호의 그림자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방의 주요 매스컴을 단단히 통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길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100명중 99명은 미국 씨티 은행은 알아도 로스차일드 은행은 모른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로스차일드 가문은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은행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이 가문이 전 세계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미치는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데도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은 낯설기만 합니다. 이렇게 지명도가 낮은 것을 보면 뛰어난 은신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로스차일드 가의 재산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이것은 세계적인 수수께끼입니다만 어림잡아 50조달라에 이른다고 합니다.
로스차일드 가는 어떻게 그 많은 돈을 벌었을까요? 가족의 엄격한 통제, 은밀한 물밑 작업, 기계처럼 정확한 협조, 빠른 시장 정보수집 능력, 냉철한 이성, 금권에 대한 끝없는 욕망, 그리고 이 모든 것에 기반을 둔 금전과 재산에 대한 깊은 통찰과 천재적인 예지 능력 등이 로스차일드 가가 200년 동안 전 세계의 금융 및 정치와 전쟁의 냉혹한 소용돌이 속에서 활약하며 인류 역사상 가장 방대한 금융제국을 세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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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차일드 가문이 등장한 시대적 배경
로스차일드는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불길처럼 퍼지고 금융업이 전에 없이 번성하던 시대에 성장했습니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금융의 실체와 개념이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유럽전역으로 퍼져 나갈 때에 로스차일드 가문을 비롯한 신흥 은행가들은 이렇게 중요한 기회를 포착해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현대 금융업의 역사적 흐름을 주도했습니다.
메이어 암셀 바우어(Mayer Armschel Bauer)는 1744년 2월 23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골동품상이자 대금업자였던 가업을 이어받아 자신의 성씨를 로스차이드(Rothschild: 독일어로 ‘rot’는 ‘붉은 색’, ‘schild’는 ‘방패’를 의미함)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그의 고객인 윌리엄 왕자에게 희귀한 금화를 싼 가격으로 계속 공급하면서 윌리엄 왕자의 환심을 사 측근이 되었습니다. 그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나폴래옹이 프랑스군대를 보내어 독일 국경을 위협하자 윌리엄 왕자는 황급히 덴마크로 망명하면서 떠나기 전에 300만 달러에 달하는 현금을 메이어에게 보관하게 했습니다. 이 돈이 바로 메이어에게 막대한 권력과 재산을 가져다 주고 금융제국을 세우게 한 첫 번째 뭉칫돈이 되었습니다. 메이어는 잉글랜드 은행보다 더 큰 은행을 설립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윌리엄 왕자에게서 거액의 돈을 받자 말자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그의 다섯 아들은 마치 다섯 발의 화살처럼 유럽의 심장인 중요한 다섯 개 지역에 파견되었습니다.
큰 아들 암셀은 프랑크푸르트 본점을 지키고, 둘째 살로몬은 오스트리아 빈으로 보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게 하고, 셋째 아들 네이선은 영국 런던으로 보내 대국을 주도하도록 했으며, 넷째 칼은 이태리 나폴리로 보내 근거지를 세우게 했습니다. 형제들은 늘 긴밀한 연락을 주고 받았으며, 이들 사이의 연락을 담당한 다섯째 제임스는 프랑스 파리의 업무를 관장하게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전무 후무한 금융제국은 이렇게 막을 열었습니다.
네이선은 런던의 금융시티를 장악하게 됩니다. 런던 금융시티는 그레이터 런던 지역 중심에 있는 약 2.6 제곱 킬로미터 면적의 지역입니다. 18세기 이래 줄곧 영국 및 세계의 금융중심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곳은 독립적인 사법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바티칸 공화국과 유사한 ‘국가 속의 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비좁은 이 지역에는 잉글랜드은행 본점을 포함한 세계의 중요 금융기관들이 운집해 있으며, 현재 영국의 GDP의 6분의 1을 창출합니다. 이러한 런던 금융시티를 주도하는 사람은 영국을 주도하는 셈입니다. 네이선은 동인도 회사의 인도 및 아시아 지역의 식민정책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으며, 특히 워털루 전쟁 당시 첩보활동을 통해 영국이 전쟁에서 승리한 사실을 영국정부보다 하루 앞서 알고 영국이 전쟁에서 패한 것같이 조작하여 주식을 폭락시킨 후에 그 주식을 사들인 후 영국이 전쟁에서 승리한 사실이 밝혀지자 영국의 국채가 하늘을 찌르듯 가치가 급상승함에 따라 엄청난 돈을 벌게 되고, 또한 워털루 전쟁 당시에도 영국과 프랑스 전쟁 당사국에 전쟁자금을 빌려 줘 많은 돈을 움켜진 후 런던 금융시티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영국의 경제 명맥을 한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화폐발행과 황금가격을 포함한 주요한 결정권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수중으로 들어갔습니다
로스차일드 가의 다섯째 아들 제임스도 프랑스 금융가를 한 손에 쥐고 흔들게 되었는데 제임스 로스차일드의 재산은 그 당시 6억 프랑에 육박했는데 프랑스에서 개인 재산이 그보다 많은 사람은 8억 프랑을 보유한 국왕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프랑스에 있는 다른 은행가들의 재산을 모두 합쳐도 제임스보다 1억 5천 만 프랑이나 적었다고 합니다. 이런 재산은 자연 그에게 막강한 권력을 부여했으며 심지어 언제라도 정부 내각을 쓰러뜨릴 정도였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둘째 아들 살로몬은 유럽의 대도시를 돌면서 로스차일드 가의 각 은행들을 조율하는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그는 형제 중 외교 능력이 가장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그를 유럽의 심장인 오스트리아 빈의 은행업무를 맡겼습니다. 빈은 유럽 정치의 중심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유럽 왕실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와 복잡한 혈연관계로 맺어져 있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신성로마제국의 왕실을 위해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북부, 스위스, 벨기에, 네델런드, 룩셀부르크, 체코 슬로바키아와 프랑스 동부 지역을 400년 동안 통치한 유럽의 전통의 왕실의 혈통이었습니다. 살로몬은 19세기 유럽 정계를 풍미한 오스트리아의 외무장관 메테르니히와 모든 것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메테르니히는 살로몬의 대규모 자금 지원으로 오스트리아의 유럽 영향력을 확장해 갔습니다. 그러나 메테르니히를 움직이는 막후에는 로스차일드 은행이 있었습니다. 1848년 살로몬은 오스트리아의 금융과 경제를 주무르는 거물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20세기 초까지 로스차일드 가문이 통제한 재산은 당시 세계 총 재산의 절반 정도로 추정됩니다. 은행가의 입장에서 볼 때 전쟁은 큰 호재입니다. 평화 시기에는 감가상각이 느리게 진행되던 각종 고가의 시설과 물품이 전쟁 때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기 마련입니다. 전쟁의 당사자들은 어떤 댓가를 치르고라도 싸움에서 이기려고 하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긴 쪽 정부든 진 쪽 정부든 은행채무라는 함정에 빠져들고 맙니다. 잉글랜드 은행의 설립 때부터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21년 동안(1694-1815년) 영국은 56년을 전쟁 가운데 보냈으며, 나머지 시간의 절반은 전쟁 준비에 할애했습니다. 이 전쟁들을 책동하고 그 자금을 대는 것은 은행가의 이익에 들어맞습니다.
프랑스 혁명부터 제 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거의 모든 근대 전쟁의 배후는 로스차일드 가문, 그들의 음모에 의한 것입니다. 로츠차일드는 현재 주요 서방 선진국의 최대 채권자입니다. 1800년대 중반쯤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유럽의 주요 공업국가의 화폐 발행 권리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수중에 떨어짐으로써 신성한 군주의 권력이 ‘신성한 금권’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이들은 세계 1차 대전, 2차 대전 등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멈추게도 하며, 1929년의 경제대공황도 이들의 음모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유럽 경제를 움켜진 이들 가문은 일루미나티(프리메이슨의 한 조직)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일루미나티 창시자 아담 바이스하우프트의 후원자가 되어, 세계정복의 공작을 꾸미게 됩니다. 또한 서서히 강대국으로 발전하고 있는 미국에도 손을 뻗치기 시작합니다.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야콥 시프라는 청년을 관리인으로 미국에 보내어 미국 경제도 장악합니다. 미국의 대표적 은행가인 J.P. 모건, 철강의 카네기, 철도의 해리먼, 석유 산업의 록펠러 등은 다 로스차일드의 자금을 받아 거부가 된 사람들입니다. 아프리카에도 손을 뻗쳐 다이아몬드 광산을 개발하여 막대한 돈을 벌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공산혁명에도 돈을 대어 마지막 남은 독립적 왕조를 무너뜨렸습니다. 이스라엘 건국에도 참여해 현재까지 많은 돈을 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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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인을 떼심-사상전쟁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계시록 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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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해석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나타난 말은 붉은 말입니다. 이 붉은 말에 탄 자는 손에 큰 칼을 받아 가지고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되 서로 죽이게 하면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며 파괴합니다. ‘말’은 전쟁 혹은 싸움을 의미합니다. ‘붉은 색’은 피의 색깔로써 전쟁이나 혁명을 의미합니다. ‘큰 칼’은 군사적인 세력 혹은 그것을 뒤에서 통제하는 정치적인 세력을 의미합니다. ‘땅에서 화평을 제한다’는 말은 이 붉은 세력 때문에 세계 평화가 위협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 죽이게 한다’는 말은 이 붉은 세력의 특색입니다. 땅에서 평화를 제하여 버리는 방법으로 백성들을 서로 죽이게 하는 수단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18세기 초에 영국에서 일어난 기독교 세계 선교운동이 백마의 출현이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나타난 말은 붉은 말인데 이 말은 백마가 나타난 후에 나타났으므로 18세기 이후에 일어난 세계적인 대 사건이라는 암시입니다. 이 붉은 말을 탄 자가 손에 큰 칼을 잡았다는 것은 정치적 또는 군사적인 큰 세력을 가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 붉은 세력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인데, 나라와 민족이 서로 분쟁하며 서로 죽이게 하는 방법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면서 세계 평화에 큰 위협이 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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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죽이게 하는 세력
이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 1800년 이후 세계적으로 평화를 위협한 대표적인 인물들을 고찰해 봅시다. 먼저 나폴레옹 1세는 그가 집정 취임 시부터 1814년 까지 유럽 정복을 위하여 무려 60회의 전쟁으로 유럽을 피로 물들이며 세계 평화를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어디를 가든지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했습니다. 민족을 분열시켜 백성이 서로 죽이게 하면서 프랑스의 세력을 확장하지는 못했으므로 ‘서로 죽이게 하고’라는 말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히틀러, 이테리의 무솔리니, 일본인들 역시 서로 죽이게 하는 책략으로 세력확장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서로 죽이게 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간 자는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킨 레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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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혁명운동
1800년 초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공산주의 혁명운동은 세계 평화를 위협함과 동시에 세계를 공산화시키려는 방법으로 동족을 서로 죽이게 하는 수단을 사용해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였던 레닌은 칼 맑스와 엥겔스가 쓴 ‘자본론의 이론’을 굳게 믿고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을 일으켜 성공하여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그 후 이 공산주의 운동은 전염병처럼 전 세계에 신속히 퍼져 나가 약 70년 동안에 전 세계 인구의 약 절반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공산주의 정권하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전 세계 인구의 거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 확장은 러시아가 군대를 보내서 전 세계를 점령해 세계를 공산화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서 성공한 그 모델 즉 무산대중이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하고 자기 국가 안에서 혁명을 일으켜서 서로 죽이게 하는 방법으로 공산주의 세력을 확장시켜 나간 것입니다. 중국의 공산화, 월맹 전쟁, 쿠바, 한국 전쟁, 앙골라 전쟁 등 모두가 민족 상잔의 전쟁이었습니다.
서로 죽이게 하는 이 방법은 공산주의의 변증법적 철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본래 이 철학은 독일의 철학자 헤겔의 창작인데 헤겔의 역사변증법은 대립된 양자는 경쟁으로 역사를 발전시킨다고 보았으나 레닌은 경쟁이 아니라 투쟁으로만 가능하다고 보고 헤겔의 역사변증법의 글자 한 자를 고쳐서 공산주의의 역사변증법의 무기로 만들어 전 세계로 수출했습니다. 그러기에 공산주의 사상이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 들어가든지 동족 간에 서로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유물주의 사관에 기초를 두었기에 무신론에 빠져들어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아니하니 무자비한 투쟁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기 때문에 인류 역사상 기독교인들의 피를 가장 많이 흘렸으며 인간이 인간으로 대우를 못 받고 하나의 기계나 동물처럼 취급을 받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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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 1차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가?
1) 1차 세계대전의 원인
제 1차 세계대전은 1914년 이지만, 그 불씨는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의 식민지 분할이 거의 끝나갈 무렵부터 시작되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열강들 사이에서는 분할된 식민지의 재분할을 위해 싸움이 다시 벌어졌습니다. 특히 독일은 식민지에 대한 야욕을 채우기 위해 싸움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는 식민지를 빼앗으려 했고, 러시아가 점유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발트해 연안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이 그 야욕을 먼저 표현한 것일 뿐 전쟁에 참여한 나라들은 나름대로 욕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독일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러시아는 이들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이 두 나라에 몇 십억 루불의 부채를 지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독일이 군침을 흘리고 있는 러시아의 서부지역을 지키기 위해서 독일의 상대국들과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그런데 레닌은 고리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혁명에 대한 소원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혁명을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어야 하지만, 오스트리아 황제나 러시아 황제가 우리에게 그런 기쁨을 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기대했던 대로 전쟁은 진행되었으며 러시아 혁명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구미의 열강들을 참혹한 전쟁 속으로 밀어 넣은 제 1차 세계대전의 시작은 당시 19세의 프란치프라는 학생이 쏜 두발의 총성으로 시작됐습니다. 러시아가 1905년 일본과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한 후 러시아가 주춤한 사이에 오스트리아는 1908년 발칸의 보스니아 지역을 기습적으로 합병합니다. 이는 결국 1914년 ‘사라예보 사건’으로 이어지고 1차 세계대전의 불을 붙인 발화점이 되었습니다. 1914년 오스트리아-항가리의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드 부처가 오스트리아가 합병한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했을 때에 세르비아의 한 대학생인 프란치프가 황태자 부처를 암살하고 말았습니다.
이 프란치프는 세르비아 청년으로서 보스니아를 세르비아 땅으로 합병하자는 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항가리 정부는 세르비아 정부가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주장하며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그러자 슬라브족의 작은 아우인 세르비아를 러시아가 지원하겠다고 나서자, 같은 게르만 족인 독일은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을 지원하게 됩니다. 또한 독일을 경계하는 프랑스와 영국은 세르비아를 지원함으로써 황태자 부부를 죽인 총알 몇 방이 순식간에 세계 대전의 화염으로 발전했습니다.
독일의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는 러시아 국민들의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국민들이 단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러시아 국민들은 같은 핏줄인 세르비아를 위해 정의로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독일은 우선 프랑스를 침공하고 다음에 러시아로 쳐들어 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잘 훈련된 독일군은 8월 21일 프랑스를 침입하여 파리를 점령하자 프랑스는 정부를 보르도로 옮겼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은 동맹국인 러시아에게 러시아 동부전선에서 군사행동을 개시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장비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2개 군단은 동프러시아에서 프랑스가 독일에게 짓밟히는 것을 막아 주었습니다. 이어 러시아는 동남부전선에서 오스트리아-항가리를 쳐부수고 갈리치야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상황이 급박하게 흐르자 독일은 프랑스에 진주해 있던 군대를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켰습니다. 독일군의 이동과 함께 러시아는 동프러시아에서 독일에게 격퇴당했지만 독일의 파리 침공은 중단되었습니다.
1915년 많은 사람들의 종전을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전쟁은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장기전에 전혀 준비가 없었고 장비와 경제력에서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비축돼 있던 보급품을 바닥이 났고, 전선에 지급할 보급물자의 부족으로 병사들은 배고픔과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1915년 독일군은 배고픔과 질병에 지쳐있는 러시아를 먼저 함락한 후 프랑스와 영국을 다시 공격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철저하게 무장된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항가리군이 폴란드와 발트해 연안, 백러시아에서부터 우크라이나의 서부지역을 기습했습니다. 그 결과 수백만의 피난 인파가 러시아 내륙으로 이동했으며, 전사자는 15만 1,000명, 부상자는 68만 3,000명, 포로 89만 5,000명이 발생했습니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러시아 군사들의 사기는 떨어졌고 짜르를 원망하는 소리가 높아졌습니다. 1916년 6월, 러시아군은 부루실로프의 지휘 아래 남서부 전선에서 총공격을 실시하여 오스트리아-항가리 군을 후퇴시켰습니다.
그러나 밀고 밀리는 장기전 속에서 경제는 혼란에 빠졌고 철도는 연료부족으로 수송량을 감당해내지 못했으며, 농촌에서는 남자들을 절반 이상 잃어버렸기 때문에 농작물을 수확할 수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생필품의 가격은 전쟁 전에 비해 최소 2-5배까지 뛰었고, 농민들은 식량을 도시에 내놓지도 못했습니다. 이와 함께 노동자들의 파업은 1914년에 34만 752건에서 1916년 한 해에 108만 6,354건으로 급증했습니다. 임금은 치솟는 물가를 따라잡지 못했고, 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해 도시로 몰려들어 임금은 더욱 낮아졌습니다. 경제가 극에 달하자 국민들 사이에서는 짜르 정부에 대한 원망과 함께 전쟁 초기에 일어났던 애국심은 혁명운동으로 변해갔습니다. 혁명운동의 기운이 점점 커지며 전국적인 동맹파업과 농민봉기가 일어났고, 심지어 굶주린 병사까지 봉기를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결국 전쟁은 러시아를 혁명으로 이끈 촉매 역할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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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의 원인의 배후 세력들
지금까지는 눈에 보이는 제 1차 세계대전에 대해 말씀 드렸고, 이제부터는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의 배후 세력들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국제 금융가들은 그들의 세력 범위를 더 넓혀 보다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전쟁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들은 유럽은 물론 미국에서도 정치가들을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전쟁은 두 나라가 싸우는 지역전쟁에서 재미를 톡톡히 보았지만 이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세계 전쟁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전쟁을 통해 전쟁에 가담한 정부는 상상을 초월한 어마어마한 빚을 지게 되지만 반면에 이것은 국제 금융가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수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제 1차 세계대전 중에도 독일의 암셀 로스차일드는 독일정부에,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의 로스차일드인 야콥 로스차일드에게, 영국의 로스차일드는 영국 정부에 각각 돈을 대 주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J.P.모건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앞잡이로서 전쟁물질을 영국과 프랑스에 파는 무기상 노릇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전쟁이 일어난 지 6개월이 지났을 때 J.P. 모건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돈을 쓰는 사람으로 알려졌는데, 당시 돈으로 하루에 1천만 달러를 쓴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뉴욕의 월가 23번지에 있는 그의 사무실은 전쟁에 소요되는 물자를 팔기 위해 모여든 상인들로 항상 북적였으며, 지금의 뉴욕 은행들은 모두 그 당시의 전쟁을 통해 돈을 벌어들인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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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혁명은 누가 일으켰나?
영국과 미국의 국제 자본가 및 금융가들은 미국 남북 전쟁 때에 러시아가 이들 국제 금융가들의 적인 링컨대통령을 도와준 사실을 기억하고 있으며, 또한 러시아는 주요 유럽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국제 금융가들의 중앙은행이 설립되지 못한 나라일 뿐만 아니라 이들 금융가들의 계략을 완강히 거부한 나라였습니다. 이들 국제 금융가들은 기회만 있으면 러시아의 황제 짜르를 없애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며, 마침내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지 3년 후에 러시아에 공산혁명을 일으켜 러시아 황제를 몰락시켰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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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에 의해 조작된 공산혁명
‘러시아 공산혁명’은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노동자 농민을 너무 탄압하고 돌아보지 않은 나머지 굶주림을 못 이겨 일어난 자연 발생적인 반정부 폭동이었고, 그것이 공산혁명으로 연결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또한 소련이 유대인을 학대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서 프랑스 혁명과 마찬가지로 그 진실은 따로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세계의 석유와 경제권을 휘어잡기 위한 미국과 러시아의 패권 다툼과 관련된 사건이었습니다. 1800년대 후반, 미국의 드레이크(Edward L. Drake)가 처음 유전을 발견하여 기름을 뽑기 시작하면서 미래는 ‘석유’라는 상품이 몹시 중요한 경제적 수단이 될 것이 예상되었습니다.
존 록펠러는 1863년에 2명의 동업자와 함께 스탠다드 오일사를 세우고 정유사업을 시작하여 1872년에는 미국의 정유업계의 25퍼센트, 1879년에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정유 분야 사업의 90 퍼센트를 독차지 하게끔 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미국 만이 기름을 갖고 있어서 미국 시장을 차지하면 세계 시장을 차지한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독점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의 카스피 해안가에 있는 바쿠(Baku) 평야에서도 유전이 발굴되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황제는 1883년 흑해로 빠져나가는 철로를 부설하는 한편, 유전개발을 위해 노벨(Nobel)형제와 로스차일드(Rothschild)그룹 사람들을 초청하여 경제적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리하여 록펠러 그룹과 로스차일드 그룹이 세계석유 분야에서도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로스차일드의 도움으로 러시아석유 사업은 대단히 급속하게 발전해, 1888년에는 미국의 생산량을 앞지르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와 미국의 석유생산량 비교
연도 | 미국 | 러시아 |
1860 | 70,000톤 | 1,300톤 |
1885 | 3,120,000톤 | 2,000,000톤 |
1901 | 9,920,000톤 | 12,170,000톤 |
당시 러시아의 경제는 아직 농경체제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유럽 전체에서 가장 뒤떨어진 나라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1907-1917년 사이 러시아의 산업 성장률은 엄청나게 뛰어올라 당시의 산업국가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영국, 독일 같은 나라들을 능가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은 피폐한 경제상황 때문에 터진 것이 아니며, 또한 혁명이 반 세기 정도의 줄기찬 경제발전 끝에 일어났다는 것에 우리는 유의해야 하며, 그리고 경제 발전의 혜택이 주로 사회의 중산층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혁명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겠는데, 먼저 18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겠습니다.
1814년 러시아가 나폴레옹 군대와 전쟁을 할 때에 파리를 점령한 러시아 주둔군이 있었습니다. 이때 많은 러시아 장교들이 프랑스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들 가운데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사상, 즉 일루미나티(프리메이슨의 일파)가 만들어낸 자유, 평등, 박애 사상에 마음이 끌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중심으로 러시아에는 두 개의 프리메이슨 종단이 탄생하게 됩니다. ‘북극성종단’과 ‘남극성종단’이 그것인데, 이들은 많은 부호들과 상류층 사람들을 단원으로 입단시키게 됩니다.
[삼면작전]이라는 책을 쓴 얀 코자크(Jan Kozak)는 공산혁명에 3개의 세력이 있었는데 첫째는 러시아 제정시대의 황제의 권위를 박탈하고 섭정을 하게 만든 임시정부이며, 둘째는 이를 뒤에서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비밀조직이며, 셋째는 행동대라고 할 수 있는 ‘폭력단’이 그 세력들인데 이중 전체를 통솔하는 세력은 역시 뒤에서 보이지 않은 비밀조직이었다는 것입니다. 임시정부의 우두머리는 알렉산더 케렌스키(Alexander Kerensky)라는 사회주의자이며, 폭력단의 중심은 사회민주 노동당의 블라디미르 레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회민주노동당의 중심 인물들이 실제로 어떤 민족적 배경을 갖고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아래 표를 보면 혁명 당시 전체 24명의 사회민주 노동당 중앙 의원들은 모두 유대인이었으며, 레닌의 어머니는 러시아인이었지만 아버지는 역시 유대인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이름을 바꾸었는데 우연이라고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눈길을 끄는 사항입니다. 그런가 하면 혁명에 가장 앞장 섰던 임시 정부파는 순수한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시민들의 성원을 얻었지만 이들은 일단 혁명에 성공한 후에 모두 쫓겨났고 레닌파가 권력을 인계 받아 악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사회 민주 노동당의 중심인물들
알려진 이름 | 원래 이름 | 출신 민족 |
레닌 | 울리아노 | 반 유대인 |
트로츠키 | 브론스타인 | 유대인 |
슈테클로프 | 나카암 | 유대인 |
마르토프 | 체데르바움 | 유대인 |
치노비프 | 압펠바움 | 유대인 |
댄 | 고레비치 | 유대인 |
가네츠키 | 퍼스텐베르크 | 유대인 |
파르부스 | 헬프판드 | 유대인 |
유리츠키 | 파도밀스키 | 유대인 |
라린 | 루르게 | 유대인 |
보린 | 나탄손 | 유대인 |
카메네프 | 로센펠드 | 유대인 |
막실슈븜 | 치바르 | 유대인 |
보다노프 | 질베르스타인 | 유대인 |
가린 | 가르펠드 | 유대인 |
슈카노프 | 기멜 | 유대인 |
캄넬프 | 골드만 | 유대인 |
사게르스키 | 크로흐만 | 유대인 |
리아차노프 | 골덴바흐 | 유대인 |
소루테제프 | 블라이흐만 | 유대인 |
피아트니츠키 | 치윈 | 유대인 |
악셀로트 | 오소독스 | 유대인 |
그라스노프 | 슐츠 | 유대인 |
취리에사인 | 바인스타인 | 유대인 |
라핀스키 | 뢰벤손 | 유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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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페이비언협회의 지원받은 공산혁명
레닌은 카잔 대학 재학 중에 칼 맑스의 저서들을 읽고 완전히 도취되었는데, 그 책에는 혁명을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는 비폭력적인 방법이요, 다른 하나는 폭동을 일으키고 폭력으로 대항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레닌은 후자를, 트로츠키는 비폭력적 방법을 원했습니다. 두 사람의 토론이 계속되자 당 회의에서 표결에 부쳤는데 레닌을 지지하는 파가 다수를 차지해 그의 방법이 통과되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을 흔히 ‘볼세비키혁명’이라고도 하는데, 러시아 말로 ‘대다수’라는 말이 볼세비키(Bolsheviki)고 ‘소수’라는 말은 멘세비키(Mesheviki)여서 트로츠키파를 ‘멘세비키’라고 불렀고, 공산혁명을 ‘다수’라는 뜻에서 볼세비키혁명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러시아명 발발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05년 봄에 볼세비키파의 대표와, 비폭력적인 멘세비키를 선호하는 영국의 페이비언협회(프리메이슨의 일파) 회원들이 런던에서 만난 일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페이비언협회 회원이자 미국에서 비누산업으로 거부가 된 조지프 펠스(George Pels)와 그 밖의 여러 페이비언들이 돈을 갹출하여 볼세비키파에게 거액의 돈을 희사했습니다. 여기서 희한한 일은 당시 세계 최고 갑부로 알려진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가 뉴욕의 록펠러 계열사인 체이스 은행과 모건의 계열사인 내셔널 시티 은행과 개런티 은행, 하노바 신탁은행, 매뉴팩처러스 신탁은행에 4억 달러를, 파리의 로스차일드 은행에 8천만 달러를 예금해 놓고 있었는데 결국 차르의 돈으로 차르를 치라고 차르의 적들에게 선심을 베푼 샘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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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 2차 대전은 누가 일으켰는가? 화폐전쟁 P207
1933년 11월 24일 <뉴욕타임스>는 [시드니 와버그]라는 책을 소개했습니다. 이책의 내용은 미국과 영국의 금융가들이 히틀러의 권력장악을 위해 자금을 지원한 비사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책의 내용에 따르면, 1929년을 전후해 월가는 도스안(Dawes Plan)과 영 플랜으로 독일의 전쟁 배상금 지급 의무를 완화해 주었습니다. 1924-1931년 월가는 이 두 계획으로 독일에 총 1,380억 마르크의 대출을 제공했고, 독일은 이 기간에 860억 마르크의 전쟁(1차 대전 패전) 배상금을 지급했습니다. 또한 미국에서 거액의 금융자금을 지원받아 군대를 재정비할 수 있었습니다. 실질적으로 독일에 대한 대출은 월가에서 독일 채권을 팔아 대중으로부터 자금을 모집해 이루어졌는데, 모건과 와버거 가는 이 과정에서 짭짤한 이익을 챙겼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프랑스 정부가 독일 배상금 문제에 대해 고압정책을 쓴 것입니다. 프랑스는 독일 배상금을 대부분 받았습니다. 이 돈의 최종 출처는 물론 월가였습니다. 프랑스의 고압정책을 계속 두고 볼 수 없었던 월가의 은행재벌들은 1926년 6월 회의를 열고 모건 계와 록펠러 계의 은행가 밎 미연방준비은행 간부들이 모여 독일을 프랑스의 압박에서 어떻게 하면 해방시킬지 의논했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혁명’의 수단으로 프랑스의 억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여기서 거론된 독일의 지도자가 ‘히틀러’였습니다.
이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후버 대통령과 록펠러의 친필 편지를 지닌 시드니 와버그가 히틀러와의 개인접촉을 명령 받았습니다. 히틀러는 이 조건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1억 마르크를 요구했지만 결국 1,500만 달러로 흥정을 했습니다. 그 당시 록펠러는 히틀러의 나치주의에 심취해 있었다고 합니다. 곧이어 그 동안 히틀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던 뉴욕 타임스는 갑자기 나치 학설과 히틀러의 연설을 정기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월가의 은행가들은 1,500만 달러를 제공하기로 하고 히틀러의 합법적 집권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1933년 2월 27일에 최후 정권 탈취 행동을 완수하기 위해 최대 700만 달러를 더 필요하다는 히틀러의 요구에 월가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변했습니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는 독일 총리로 임명되었고 독일은 1923년의 슈퍼 인플레이션으로 말미암은 경제 난국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뿐 아니라 전 세계를 휩쓴 심각한 불경기에서도 빠른 속도로 탈출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독일은 유럽 최강의 무기 장비를 배치해 1939년 9월 1일 제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겨우 6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독일이 6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신속하게 경제를 회복하고 대규모의 전쟁 준비를 끝냈다는 것은 외부의 강력한 금융 자금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실상 월가는 나치 독일의 최대 자금줄이었습니다. 1924년 독일의 슈퍼 인플레이션이 막 진정된 후 월가의 은행가들은 독일의 전쟁 준비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1924년 도스 계획과 영 계획은 모두 이를 목적으로 기획된 것입니다. 1924-1931년 월가의 은행가들은 이 두 계획으로 독일에 총 1,380억 마르크를 대출했으며, 사실상 독일은 미국이 지원한 520억 마르크라는 거액의 금융자금으로 군수산업 전체를 신속하게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그 당시 미국은 대공황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는데 월가의 금융재벌들과 미연방 준비은행이 미국의 납세자의 돈을 독일의 전쟁무기 자금으로 지원했다는 사실입니다.
국제 유대인 은행가들에겐 민족도 국경도 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하면 큰 돈을 벌 것인 가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나치 독일은 미국 대기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정치를 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대는 대기업 미쓰비시가 전쟁비용을 댔고, 독일의 경우는 화벤(Interssen Germeinschaft Faben).이라는 대기업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화벤은 미국 자본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증거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증거 1] 나치기업-히틀러-미국 대기업의 연결고리
화벤이라는 화학회사는 히틀러를 독일의 ‘떠오르는 태양’으로 생각하여 재정을 비롯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회사의 막강한 자금력, 조직, 연구팀, 생산시설 등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독일은 그렇게 빠른 시간에 급성장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사의 주인은 독일 사람이 아니라 뉴욕 월가에 있는 J. P. 모건을 위시한 국제 금융가들이었습니다. 그 이름을 열거하면,
- P. 모건
- 딜런 (Dillon)의 리드사(Read & Co)
- 해리스(Harris)의 포르베사(Forbes & Co)
- 내셔널 시티은행(National City Bank)
이들은 1924년 미국의 은행가 찰스 도스(Charles Dowes)의 이름을 내걸고 독일의 화벤에 8억 달러를 합자 형식으로 투자했습니다. 그것으로 거대한 공장 시설을 갖춘데다가, 1928년에는 미국의 헨리 포드가 포드자동차회사의 독일공장을 화벤과 병합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은 적국을 원조함으로써 몸집을 키워준 다음에 다시 싸웠다는 얘기입니다. 말하자면 미국 정부는 미국 금융가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이들의 음모에 놀아나는 허수아비인 것입니다. 화벤은 1차 대전 때에도 독가스인 염소가스를 생산했으며, 2차 세계대전 때는 유대인들을 학살했다는 지클론(Zyklon)가스를 생산하기도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공습이 그렇게 치열했는데도 이 회사의 시설은 거의 파손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회사가 연합군의 폭격 대상에서 처음부터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증거 2] 연합군은 독일의 휘발유 공장을 폭격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은 1차 대전의 패전의 원인을 ‘물자부족’, 그 중에서도 특히 ‘휘발유부족’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1909년에 석탄에서 휘발유를 추출하는 기술을 개발한 독일이었지만 그 기술은 아직 미완성이었고, 그게 패전의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화벤이 마침내 그 기술을 완성했고 1927년 11월에는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사가 독일의 화벤과 합자하여 그 기술로 ‘대용품’(ersatz:석탄으로 만드는 휘발유)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대용품의 생산량은 전쟁을 치르기에 충분했고 히틀러는 이에 용기를 얻어 마침내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독일은 2차 대전을 치르는 동안 이것으로 휘발유 소비량의 75%를 충당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난다 긴다하는 연합국의 수두룩한 첩보원들이 이런 공장들이 어디에 있는 줄 몰라서 폭격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치열했던 전쟁의 와중에서 화벤공장 시설의 15프센트 정도 밖에 파괴되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연합군이 일부러 폭격을 피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록펠러의 자산이었기 때문입니다.
[증거 3]나치 기업과 미국 재벌의 결탁
미국의 ITT(International Telephone and Telegraph)사는 독일의 포케 볼페라는 항공기 제작회사에 투자하여 독일 전투기들을 생산하고 있었고, I.G. 화벤의 미국 지사는 ‘아메리칸 I.G. 화벤’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메리칸 I.G. 화벤’의 이사회 구성멤버를 보면,
- 포드 자동차회사의 에들셀 포드 사장
- 록펠러 그룹의 뉴욕 내셔널 시티 은행 미첼 사장
- 뉴욕 스탠다드 오일사의 월터 티글 사장
- 독일의 자본가 맥스 와벅의 동생이고,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 회장인 폴 와벅
- 맨해튼 은행의 중역인 메트 이사
[증거 4] 미국은 나치에게 휘발유를 공급했다.
스탠다드 오일사는 1939년 독일이 폴란드와 오스트리아를 침공했을 때 화벤에 2천만 달라 상당의 항공기용 휘발유를 공급했습니다. 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에 독일은 전쟁 중에 스페인 오일탱크 선박을 동원해 아루바(Aruba)섬에 있는 스탠다드 오일사 소유의 정유소에서 항공유를 수송했고 그 밖에도 세계 각처에서 유류를 구입해 수송했지만 미국의 잠수함들은 이들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나치 독일에 음으로 양으로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미국이었습니다. 신세계 질서 계획이라는 것은 현재 일루미나티들이 추구하는 단일 세계 정부를 말하는데, 그 말은 히틀러도 그 말을 사용했고 미국의 부시 대통령도 중동전쟁을 끝내면서 그 단어를 언급했습니다. 히틀러는 정권을 잡고 전쟁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전 유럽과 아프리카를 점령해 나갈 때에 아마도 자신이 신세계 질서 계획을 달성해 마침내 절대 군주가 될 것이라고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미국의 금융가, 자본가들이 바다를 건너와 자기를 위하여 막대한 돈을 지불했고, 자신의 군대를 단시일 안에 세계 최강의 군대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로드차일드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지도 모르고, 그런 까닭으로 최소한 자신이 독일의 최고 권력자로 있는 한 로드차일드는 자신을 옹호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연합국 측, 정확히 말하자면 프리메이슨에게 속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 이후 영국이 선전포고를 하고 나서자 비로소 자신의 실수를 처음 깨달았을 것이며, 미국이 독일과 동맹관계에 있던 일본의 해외 물자 보급선을 봉쇄하는 속셈과 독일군으로 하여금 선공하도록 만든 미국의 교묘한 수단을 깨닫고 다시 한 번 땅을 쳤을 것입니다.
이렇게 국제 금융가(프리메이슨을 움직이는 자)들은 국적을 초월해서 온갖 교묘한 수단을 동원해서 나라들 간에 전쟁을 하게 해서 전쟁 자금을 빌려 주어 돈을 벌고 전쟁 후 복구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돈을 버는 자들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큰 세력을 가진 나라들을 잘게 부수어 세력을 약화시켜서 자기들 수중에 넣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해왔습니다. 그것이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원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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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의 붕괴
붉은 말인 공산혁명운동은 제 3의 말, 즉 경제전의 문턱에서 붕괴될 것을 계시록은 예언했습니다. 경제전이 시작되면서 전 세계 공산 혁명은 약화되기 시작했고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동구권의 모든 공산국가들이 민주주의 국가로 혁명을 단행하여 시장 경제체제로 전환했습니다. 중국도 이미 자본주의로 향하고 있으며, 월남도 이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서방 선진국들과 국교를 맺고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공산주의 혁명운동은 경제전의 벽에 부딪혀 이미 종말을 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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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 주의가 붕괴된 원인
시장경제의 철학은 ‘인간은 이기주의자’라는 인간관 위에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이기주의자이기 때문에 정의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 견제하며 감시하는 시스템이 절대로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민주주의의 국가들은 행정, 입법, 사법이 분리되어 있고 그 위에 언론이 권력자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이 이기주의자라는 사실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국가들은 모든 기업체들을 국유화하고 농지도 모두 국유화했습니다. 국민들이 공장이나 농장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기의 수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기주의자인 인간이 왜 일을 열심히 하겠습니까? 적당히 상부 권력자의 눈가림만 하면서 일하는 척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유 경제체제하의 국민들은 열심히 일하면 더 많이 돈을 벌 수 있기에 돈을 많이 벌면 그것이 모두 자기 소유가 될 수 있기에 열심히 일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자신의 땅을 비옥하게 가꾸고, 한 가지라도 물건을 더 잘 만들어 수입을 올리려고 합니다. 그러니 자본주의의 시장경제 체제 국가들은 경제가 발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계가 경제전 시대로 접어들면서 공산주의의 국가 계획경제가 자본주의의 시장경제에 패배하여 공산주의 국가들이 모두 몰락하게 된 것입니다.
첫째로 1세기 전만 해도 소련은 곡물수출국 중의 하나였는데 소련이 곡물 수입국이되었습니다. 1979-1982년의 4년간 흉작으로 매년 3,500만톤의 곡물을 수입했으며 풍작이었던 1983년에도 식량자급이 불가능했습니다. 소련의 농산물 생산이 이렇게 저조한 원인은 농민의 책임감과 창의성을 무시한 잘못된 관료주의와 낭비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감자 생산의 50%가 저장, 운송 및 유통의 잘못으로 손실되었다고 합니다.
둘째로 과도한 에너지 낭비였습니다. 소련의 주택은 모두 국가의 소유이며 아파트에 집단적으로 거주합니다. 그러기에 난방시설의 에너지도 국가가 공급하고 있는데 각 가정에 온도조절기가 없습니다. 소련의 추운 겨울철 방의 온도는 화씨 100도 정도 유지되었는데, 방안이 아무리 더워도 히터는 가동되기 때문에 겨울에도 대개 문을 좀 열어 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낭비는 불가피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두 국가의 소유요 자기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을 사용하든 절약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첨단과학기술의 도입을 원해도 자금이 없습니다. 소련 지도층의 관점에서 볼 때에 로버트 공학, 슈퍼 컴퓨터, 레이저, 광학, 전기 통신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제기된 도전이 문제인데, 소련은 이 방면에 뒤떨어져 가고 있었고, 결국 전자장비를 갖춘 첨단무기를 생산하지 못하게 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 문제는 이미 이스라엘과 아랍국들 사이의 수차에 걸친 전쟁에서 미국제 무기를 가진 이스라엘이 소련제 무기를 가진 아랍국들의 항공기들과 전차들을 손쉽게 탐지하고 파괴하고 승리하는 데서 입증되었습니다. 첨단기술은 매우 필요하지만 도입을 위한 자금이 없는 것입니다.
넷째로 1983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 행정부가 발표한 “우주방위계획(SDI)”을 발표하였습니다. 당시 소련은 SDI를 상쇄하고 경쟁하기 위해서는 5~6천만 달러가 소요되고 시간도 4~5년이 소요되는데 소련은 이를 뒷받침할 시간과 재력이 부족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양극화에 따라 소련은 엄청난 군사력 증강에 재원을 투자함으로 경제가 파탄되었습니다.’ 경제전의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냉전시대에 우리가 공산주의를 얼마나 두려워했습니까? 소련은 핵무기와 핵탄두 미사일로 무장하고 있었고 만일에 전쟁이 발발하면 지구는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자유 세계도 소련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소련이 총 한방 쏘지 못하고 해체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경제전의 파괴력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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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
제 2차 대전이 종결되던 1945년부터 세계는 자유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분열되어서 냉전시대에 돌입했습니다. 자유진영은 북대서양 동맹군을 유럽에 배치했고, 공산 진영은 와르샤와 팩 연합군을 유럽에 배치하여 서로 핵과 미사일을 가지고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허락을 받아’란 말이 나옵니다. 누가 왜 공산주의의 출현을 허락했습니까? 로마서 13:1에,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큰 의문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기독교를 극심하게 박해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큰 권력을 허락 하셨는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 대답은 주의 재림의 징조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백마가 마태복음 24:14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하여 나타난 것 같이 적마도 주의 재림의 징조인 누가복음 21:29-30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 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했습니다. 주의 재림이 임박하면 무화과 나무와 모든 나무들이 싹이 날것이라고 주님이 예언하셨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이며 싹이 난다는 것은 마치 식물들이 겨울철에 땅 속에 잠자고 보이지 않다가 봄이 되어 새 생명의 싹이 나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 민족이 신생국가로 독립하여 세계사에 나타나므로 모든 사람이 볼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사실 이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약 2000년 동안이나 세계 각국에 흩어져서 자유와 독립을 열망하면서 온갖 박해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1948년 5월 14일에 전 세계에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1949년 9월에 유엔의 회원국이 되어 예수님이 예언한 지 약 2000년 만에 이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나무도 싹이 나야 한다고 예언했습니다. 즉 세계 모든 약소 민족들도 이스라엘 민족처럼 독립을 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모든 나무가 싹이 난다는 뜻은 세계 모든 약소 민족과 국가들이 강대국의 힘에 의한 식민지 정책에 눌려서 살다가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쯤이 되면 세계 모든 약소 민족들도 독립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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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제국의 해체
전쟁에서 승리하면 나라의 영토는 더 넓어진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은 이 상식을 뒤엎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에 승리한 나라들이 모두 영토가 줄어들었습니다. 우선 미국의 경우, 미국의 식민지였던 쿠바와 필리핀이 독립하여 미국의 영토가 좁아졌습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 아시아의 식민지를 비롯하여 석유가 많이 생산되는 리비아, 알제리아 등 북아프리카의 모든 식민지까지 독립하므로 인하여 영토는 아주 좁아졌습니다.
영국은 더욱 극심합니다. 대영 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다고 자랑했습니다. 북미의 케나다로부터 태평양의 오스트랄리아, 인도와 아프리카의 대부분을 식민지로 통치하던 해가 질 수 없던 나라였습니다. 식민지들을 모두 잃고 초강대국이었던 영국이 가난한 나라로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2차 세계대전은 이해하기 어려운 전쟁입니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세계는 공산 진영과 민주 진영으로 갈려서 냉전체제로 들어갔습니다. 지구를 수 십 개 파괴하고도 남을 핵무기와 그 운반체인 미사일을 가지고 서로 대결하고 있었습니다. 이 핵전쟁이 일어나면 승자도 패자도 없이 지구는 폐허가 될 것이 확실했습니다. 만일 인도가 독립하려 할 때에 영국의 주력부대를 인도로 이동할 수 있었다면 인도의 독립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 한국도 제 2차 대전으로 인해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잠시 권력을 허락하사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또한 말세의 징조로 예수께서 예언한 누가복음 21:29-31을 성취하여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을 깨우려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역사에서 100년 동안에 세계 역사에서 10개국이 독립하는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 2차 대전 후 냉전시대에 약 100개의 나라가 40년 동안에 독립한 것을 우리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세계 제 2차 전쟁은 그림자 정부의 엘리트들이 일으킨 전쟁이며, 큰 세력들을 잘개 부수어 통제하기 쉽게 하려는 음모였습니다.]
<1945년부터 시작된 냉전체제하에 거의 모든 지역에서 탈냉전시대에 이르는 기간에 독립한 나라들과 유엔에 가입한 나라들의 연대기록>
1945 | USSR |
1946 | AFGANISTAN, ICELAND, SWEDEN, THAILAND |
1947 | PARKISTAN |
1948 | MYANMAR |
1949 | ISRAEL |
1950 | INDONESIA |
1953 | ROMANIA |
1955 | ALBANIA, AUSTRIA, BULGARIA, CAMBODIA, FINLAND
HUNGARY, IRELAND, ITLAY, JORDAN, LAOS, LIBYA, NEPAL PORTUGAL, SPAIN |
1956 | MOROCO, SUDAN, TUNISIA, SRI LANKA |
1957 | GHANA, MALAYSIA |
1958 | GUINEA |
1960 | BENIN, BURKINA FASO, CAMEROON, CYPRUS, GABON
MADAGASCAR, MALI, NIGER, NIGERIA, SENEGAL, SOMALIA, TOGO, ZAIRE |
1961 | MAURITANNIA, MONGOLIA, SIERRA LEONE |
1962 | ALGERIA, BURUNDI, JAMAICA, RWANDA,
TRINIDAD&TOBAGO, UGANDA |
1963 | KENYA, KUWAIT |
1964 | MALAWI, MALTA, ZAMBIA |
1965 | GAMBIA, MALDIVES, SINGAPORE |
1966 | BARBADOS, BOTSWANA, LESOTHO |
1968 | EQUATORIAL, MAURITIUS, SWAZILAND |
1970 | FIJI |
1971 | BAHRAIN, OMAN, QATAR, UNITED ARAB EMIRATES |
1973 | BAHAMAS |
1974 | BANGLADESH, GRENADA, GUIEA~BISSAU, GUYANA |
1975 | COMOROS, MOZAMBIQUE, PAPUA NEW GUINEA,
SAO TOME E PRINCIPE, SURINAME |
1976 | ANGOLA, SEYCHELLES, WESTERN SAMOA |
1977 | DJIBOUTI, VIETNAM |
1978 | SOLOMON ISLAND |
1979 | DOMINICA, ST. LUCIA |
1980 | ST. VINCENT & THE GRENADINES, ZIMBABWE |
1981 | AUTIGUA & BARBADA, BELIZE, VANUATU |
1983 | ST. KITTS & NEVIS |
1984 | BRUNEI |
1990 | LICHTENSTAN, NAMIBIA |
1991 | ESTONIA, LATVIA, LITUANIA, MARSHALL ISLAND
MICRONESIA, SOUTH KOREA, NORTH KOREA |
1992 | ARMENIA, AZERBAIJAN, BOSNIA, HERCENGOVINA, CROATIA
KAZAKHSTAN, KYRGYZSTAN, MOLDOVA, SAN MARINO SLOVENIA, TAJIKISTAN, TURKMENISTAN, UZBEKIST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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