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쿠스 3세

다니엘 11:10-21

 

출몰년도: 기원전 241- 기원전 187년 7월 3일

출생지 :페르시아 수사

사망지 : 페르시아 수사

지 위 : 메가스 바실레우스

국가 : 셀레쿠스 왕조

가족관계 : 셀레쿠스 2세 칼리니쿠스 (아버지)

라오디케 2세(어머니)

셀레쿠스 3세 케라우노스(형)

 

라오디케 3세(안티오쿠스 3세의 아내)

안티오쿠스(장남)
셀레쿠스 4세 필로파토르(차남)
라오디케 4세(삼녀)
클레오파트라 1세(사녀)
안티오키스(오녀)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삼남)

주요 전투지: 마그네시아 전투

재위기간 : 기원전 223년 ~ 기원전 187년 7월 3일

전임자: 셀레우코스 3세 케라우노스

후임자: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

 

첫째로 안티오쿠스 3세의 개략

안티오쿠스 3세는 다니엘 11:10-19에 이르는 많은 구절에서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성경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피파네스의 아버지입니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등장하게 될 원인자인 것입니다. Antiochus Megas(영어)
Ἀντίoχoς Μέγας (그리스어)

안티오쿠스 3세는 셀레쿠스 왕조의 여섯번째 왕(BC 223~187 재위)입니다. 셀레쿠스 왕조의 최대의 군주이면서 동시에 제국 쇠망의 단초를 만든 인물로 지목되기도 합니다. 알렉산더 3세 대왕을 제외 한다면, 역대 그리스인 중 그보다 넓은 영토를 통치한 그리스인은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치세에 막 카르타고를 이겨 지중해 세계의 최강자로 떠오른 로마에 대항하는 모든 이들의 우상이었습니다. 셀레쿠스 제국의 최대 영토를 실현한 것은 바로 그이며, 동시에 제국의 남은 200여년의 방향을 결 정한 것 역시 그의 치세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는 죽은 이후에도 지중해 세계에서 최고의 명성을 누렸으며,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자들은 그를 모방해 자신을 새로운 안티오쿠스 메가스라고 선포하곤 했습니다. 그 자신, 또 그가 남긴 옥좌가 지닌 이런 불멸의 마력은 셀레쿠스 제국이 로마에 최종 멸망 하는 그 날까지 로마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쪽인 이란 지역에서 제국을 재건한 반면 소아시아 지역과 유럽에 대한 로마의 지배권에 도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주(州)의 크기를 줄여 제국을 행정적으로 개혁하고, 군주숭배 의례(자기와 부인 라오 디케를 신으로 받드는 것)를 창시했으며, 주변 국가의 군주들과 자신의 딸들을 결혼시킴으로써 관계  를 개선했습니다

불안한 제국의 정세

셀레쿠스 2세 칼리니쿠스가 죽자 그의 장남인 셀레쿠스 3세 케라우노스가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셀레쿠스 2세가 사망하면서 소아시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케라우노스는 번개같이 그들을 진압 하러 직접 군대를 이끌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군대의 반란으로 암살당하고 동생인 아 직 어린 안티오쿠스 3세가 왕위를 계승합니다. 안티오쿠스 3세는 총리에 헤르미아스를, 소아시아 총독에는 아카이우스, 메디아의 총독에 몰론과  페르시아 등 동부 속주들의 총독으로 알렉산드로스 형제들, 이들은 선왕(先王)이 임명했던 대로 유임시키고 반란자들의 척결에 나섰습니다.

안티오쿠스 3세가 즉위할 당시 셀레쿠스 제국은 잇따른 반란과 외적의 침입으로 제국 개국 이래 최 대의 난관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서쪽에서는 프톨레미 왕조, 로도스 공화국, 페르가몬 왕국, 폰투스 왕국 등이 제국의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으며, 동쪽에서는 박트리아가 독립의 움직임을 보이고, 파르 티아가 침입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왕의 살해자들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게다가 소아시아는 폰투스 왕인 미트리다테스 2세의 딸과 결혼한 장군 아카이우스 휘하에서는 반란을 일으 켰고, 안티오쿠스 3세의 승인 없이 자체적으로 주화까지 발행하는 반역 행위까지 저질러가며 독자적 으로 페르가몬 왕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선왕 살해자들은 안티오쿠스 3세가 즉위 하자마자 권력을 쥐고 있는 대신 헤르미아스의 도움으로 말끔히 처단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헤르미아스는 원래 간신으로 유명한 사나이였지만, 안티오쿠스 3세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신이 권 력을 쥐기 위해 그를 열성적으로 후원했습니다. 사실, 몰론과 알렉산드로스, 아카이우스의 반란은 그 가 정권을 마구 휘두르면서 자초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몰론은 메디아,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총독이었는데 그들은 안티오쿠스 3세가 직접 임명한 장군들이었습니다. 당시 안티오쿠스 3세는 실 권이 없었고 간신 헤르미아스가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 그들(몰론과 알렉산드로스, 아카이우스)은 아 직 어린 왕(안티오쿠스 3세)을 대신 헤르미아스의 간섭에서 해방시킨다는 것을 명목을 내세워 중앙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몰론과 알렉산드로스의 반란은 안티오쿠스 3세에게 자 신이 은혜를 베푼 장군에게도 배신당할 수 있다는 경각심과 대신에게 의지하면 안 된다는 자립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안티오쿠스 3세는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헤르미아스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그 반대파 당수였던 제욱시스의 진언에 따라 진두지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결과 셀레쿠스 제국군은 사기가 올라 몰론과 알렉산드로스의 반란군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 반란군은 기세를 올려 제국의 대부분을 장악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헤르미아스에 대해 반란 의 기치를 들었기 때문에, 군대가 그들에게 대거 호응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헤르미아스만 제거 하면 반란은 사그라들 것 같았습니다. 당시 안티오쿠스 3세는 안티오키아에서 웅거하고 있었는데, 왕이 없는 셀레우키아는 반란군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의 군대의 힘을 알고 나자 두 형제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셀레우키아에서 왕을 참칭하고 안티오쿠스3세에게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반란자들의 군대 역시 헤르미아스라면 이를 갈았으나, 두 형제와는 다르게 안티오쿠스3세에게는 대 항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반란군은 속속들이 안티오쿠스3세에게로 투항하고 두 형제는 반란군 내 에서도 고립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몰론은 군대를 이끌고 직접 티그리스 강을 도강하여 북상해 안티오쿠스3세가 직접 이끄는 니시비스 방면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몰론은 이 간헐적인 전 투에서 안티오쿠스3세에게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자기 군대의 좌익이 고립되어 투항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후 안티오쿠스 3세의 승승장구가 이어졌고, 마침내 몰론과 알렉산드로스는 BC 220 년에 자결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습니다.

그리고 안티오쿠스 3세는 BC 220년에 메디아의 북서부 지역인 아트로파테네까지 정복했습니다. 한편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기회만 엿보던 헤르미아스는 마침내 반역을 꾀하기 시작했는데, 이 음모가 안티오쿠스 3세의 측근에게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이 음모가 발각됨으로써 그는 국왕파의 자객에게 같은 해(BC 220)에 살해당했습니다. 이로써 제국 내에서 그의 왕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세력은 소아시아에서 자신이 왕임을 주장하는 아카이우스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제4차 시리아 전쟁(다니엘11:10-12),

‘10 그러나 그의 아들들이 전쟁을 준비하고 심히 많은 군대를 모아서 물이 넘침 같이 나아올 것이며 그가 또 와서 남방 왕의 견고한 성까지 칠 것이요’

BC 219년, 안정된 제국을 갖게 된 안티오쿠스 3세는 이집트의 혼란한 내정을 기회로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세력을 넓히기 위해 시리아 남부로 진격했고 이리하여 제4차 시리아 전쟁이 발발합니다. 이 거국적인 전쟁은 제 3차 시리아 전쟁의 복수전이기도 했기에 이제 겨우 21세가 된 젊은 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진격했습니다. 처음에는 안티오쿠스 3세 측이 유리했습니다. 전쟁을 하는 동안 그는 셀레우키아, 피레우스, 티레, 프톨레마이스와 같은 동부 지중해의 주요항구들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습니다.

BC 218년 코일레-시리아(레바논), 팔레스타인, 페니키아를 손에 넣었습니다. 특히 겨우 3년 전에 이집트의 대왕 프톨레미 3세 에우에르게테스가 사망했고, 그의 어린 아들 프톨레미 4세 필로파토르 가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왕권이 매우 미약한 때였습니다. 반면 안티오쿠스 3세의 셀레쿠스 제국군 은 얼마 전 몰론의 반란을 진압한 것으로 기세가 올라 있었고, 그는 티레를 비롯한 팔레스타인의 거의 모든 도시를 장악했습니다. 그는 이 지역을 완전히 제국령으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에 1년 가까이를 이곳에서 소모했습니다.

이집트의 권력을 쥔, 그 때까지 부패의 전형으로 여겨져 오던 간신 소시비오스는 단기 결전으로는 셀 레쿠스 제국군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지구전을 계획했고, 그는 말 잘하는 특사를 보내 이집 트가 곧 항복할 것처럼 꾸미게 하고, 안티오쿠스 3세에게 타결될 듯 타결되지 않는 협상을 진행시켜 그의 진군을 지체시켰습니다. 그 동안 소시비오스가 군대를 다시 불러모으고, 용병도 최대한 긁어모 아 BC 217년 팔레스틴 수복을 위해 진군시켰습니다. 소시비오스의 진언에 따라 프톨레미 4세는 직 접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했습니다. 소시비오스의 책략에 놀아나 필요 이상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시간 을 보낸 안티오쿠스3세는 아직 안정되지 않은 팔레스타인의 방어를 위해 라피아(팔레스타인 지역의 가사 근방)로 진군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피아 전투는 헬레니즘 세계의 전투 중, 입소스 전투 이후 가장 큰 전투라고 일컬어집니다. 셀레쿠스 군은 약 7만명, 프톨레미군은 약 8만명에 달하는 인원이 투입되었습니다. 코끼리도 투입되었는데, 안티오쿠스 3세와 프톨레미 4세는 코끼리를 양익에 나누어 배치했습니다. 코끼리 간의 서전에서 셀 레쿠스 제국의 인도 코끼리는 프톨레미 왕조의 아프리카 코끼리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산병 부대와 팔랑크스(그리스 7m의 긴 창 부대)들도 이집트군을 향해 기세 좋게 공격했습니다. 이집트군은 대혼 란에 빠졌습니다. 안티오쿠스 3세는 이집트의 파라오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적진으로 너무 깊이 진군했고 그 사이, 좌익을 희생양으로 삼고 제정신을 차린 이집트군은 우세한 숫자로 셀레쿠스군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중앙에서 점차 셀레쿠스군의 패색이 짙어졌고, 좌익 역시 프톨레미 측에 가담한 그리스 용병 들의 분전으로 괴멸되었습니다. 그 때까지 전장을 지키고 있던 프톨레미 4세는 무사히 후방으로 빠 져나갔습니다.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자 안티오쿠스 3세는 자신이 패배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 습니다. 결국 셀레쿠스군은 라피아의 참패를 뒤로 하고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했습니다. 그러나 라피아 전투의 여파는 아이러니컬합니다. 그 여파란 양 제국의 약화를 초래한 것이지만, 그 약화의 정도가 프톨레미 왕조가 훨씬 컸습니다. 이집트는 긴 내분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중앙에서 마케도니아인과 함께 활약한 토착 이집트인이 전우들을 배반하고 상 이집트에 독립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이집트는 이 내전이 장기화 됨으로 인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안티오쿠스 3세는 프톨레미 제국이 내분에 빠 져있어 자신을 추격하지 못하는 틈을 타 사르디스에서 여전히 반란군을 이끌고 있는 아카이우스에게 로 진군했습니다. 셀레쿠스 니카토르의 차남인 아카이우스의 손자인 아카이우스는 그의 반란은 사 실 셀레쿠스 제국에 대항한다기보다는 자구책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는 사실 마음속으로는 셀레쿠스 제국에 계속 충성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한 번 왕을 칭했고, 주화까지 주조했으므로 반란 행위가 명백한 그를 안티오쿠스 3세가 용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약 2년간의 저항 끝에 붙잡힌 그는 안티오쿠스 3세의 명령으로 야만적으로 처형 당했습니다. 이로써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반란군 세력은 말끔히 제거되었습니다. 폰투스 왕국의 공주 였던 그의 미망인은 안티오쿠스 3세에게 투항했습니다.

제4차 시리아 전쟁 이후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와 동맹을 맺은 안티오쿠스 3세는 BC 213년 아 카이오스 2세를 그의 수도 사르디스 에서 사로잡아 야만적인 방법으로 처형했습니다. 소아시아 지방 을 안정시킨 뒤 그는 유명한 동방 원정에 착수하여 멀리 인도까지 진출했습니다. BC 212년 안티오 쿠스 3세는 여동생 안티오키스를 아르메니아의 크세르  크세스 왕과 결혼시켰고 크세르크세스는 그 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쳤습니다. 파르티아 왕 아르사케스 3세의 수도 헤카톰필로스를 점령 하고 BC 209년 그에게 동맹을 강요했습니다. 이듬해에는 박트리아의 에우티데모스를 격파했지만 그의 칭호와 통치권은 인정해주었습니다. BC 206년 안티오쿠스 3세는 힌두쿠시 산맥을 가로질러 카불 계곡으로 진출했고 인도의 왕 소파가세노스와 우호관계를 새로이 했습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사르디스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이 지역의 통치권을 재정비하는 일에 착수했습니 다. 그는 함부로 군대를 움직이고 싶지 않았기에 별 수 없이 페르가몬, 비티니아, 카파도키아, 폰투스 가 자신의 통치권 밖에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년 후인 BC 212년 그는 군대를 동 쪽으로 출발시켰습니다. 그 성과로 아르메니아의 오론테스 왕조 제10대 국왕인 크세르 크세스에게 자신의 종주권을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바실레이오스 메가스 다시 말해 대왕 이라는 명칭을 선사할 동방 원정에 착수하였습니다. 우선 준비 운동 격으로 BC 209년에는 군대를 이끌고 원래는 셀레쿠스 제국령이었으나  지금은 파르티아의 수도가 되어 있는 헤카톰필로스를 함락시키고 히르카 니아(이란의 카스피해 연안)까지 그들을 쫓아냈습니다. 파르티아의 왕인 아르사케스 2세는 사자를 보내 안티오쿠스 3세에게 종주권을 인정하겠다고 하며 평화를 구걸했습니다.

다음 차례는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이었습니다. 박트리아 왕국은 원래 셀레쿠스 제국령이었으나, 총 독이었던 디오도토스 1세가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고 독자적인 왕국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디오도토 스 1세의 아들은 에우티데모스에게 왕위를 빼앗깁니다. 에우티데모스가 디오도토스 왕가를 멸한 지 약 20년째 되었을 때 셀레쿠스 제국군의 침공을 받았습니다. BC 209년, 파르티아를 복속시킨 셀레 쿠스 제국군은 격전 끝에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아리우스 강 전투에서 박트리아 기병 1만명을 몰살 시키고 번개같이 진격하여 그 수도인 박트라(후일 발흐)를 포위했습니다. 이리하여 발생한 안티오쿠 스 3세의 박트라 공성전은 유명합니다. 2년간의 공성전에도 박트라가 함락되지 않자, 빨리 이 곳에 서 떠나 지중해로 돌아가고 싶었던 안티오쿠스 3세의 속은 타들어가기만 했습니다. 에우티데모스도 이 공성전을 더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양자는 곧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데 합의를 보았습니다.

셀레쿠스 제국과 박트리아 왕국이 맺은 조약의 내용은, ‘반역자 디오도토스를 처단한 공로로 박트리 아 왕위에 에우티데모스를 승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에우티데모스가 어디까지나 셀레쿠스 제국을 상위 군주로 섬겨야 한다는 내용이 전제된 것이지만, 어차피 셀레쿠스 제국을 섬긴다고 해도 그것은 안티쿠스 3세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한 형식적인 것입니다. 에우티데모스는 평화 협상이 진행되는 도 중 갑자기 놀랄만한 제안을 했습니다. 바로 지난날의 원한을 씻게 되었으니,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와 안티오쿠스 3세의 딸을 혼인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안티오쿠스는 고민 끝에 이를 응낙하기로 하고, 날을 잡아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이리하여 박트리아와 셀레쿠스 제국은 완전히 화해했습니다.

안티오쿠스 3세는 동방으로 좀 더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BC 205년에는 알렉산더(대왕) 3세의 원 정로를 그대로 따라 카불 계곡과 힌두쿠시 산맥을 지나 인도에 다다랐습니다. 그곳에서 마우리아 제 국의 왕족이었던 소파가세노스로부터 코끼리를 선물받습니다. 그리고 셀레쿠스 1세 때부터 내려오 는 전통적인 동맹관계를 더욱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케르만 고원을 거쳐 셀레우키아로 입성했습니다. 이 성과는 그리스인들에게 매우 고무적이었고, 그는 “대왕”이라는 호칭을 얻게 됩니다. 이는 안티오쿠스 4세 시대에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그리스인의 식민이 이루어지는 배경이 됩니다.

셀레우키아에서 그는 또 새로운 동방 원정을 준비했습니다. 이번에는 원정 방향이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페르시아 만의 남쪽 연안을 따라 남하하는 것입니다. 이 원정의 주 목적은 제국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아라비아 유목민의 중심 도시인 게라(Gerrhae)를 복속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원정은 게라에서 셀레쿠스 제국의 영향력이 재건되는 것으로 짧게 끝났습니다.

BC 205년(혹은 BC 204년), 라피아의 영웅인 프톨레미 4세 필로파토르가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다 니엘 11:12), 아직 7세에 불과한 프톨레미 5세 에피파네스가 즉위했습니다. 안티오쿠스 3세는 이것 을 좋은 기회로 여기고, 마우리아 제국과 함께 셀레쿠스 제국의 중요한 맹우(盟友)였던 마케도니아 의 필리포스 5세와 손을 잡았습니다. 두 군주는 이집트, 페르가몬, 트라키아를 서로의 이해 관 계가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분할하고, 서로가 필요하면 즉시 군대를 지원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페르가몬이나 로도스 등이 셀레쿠스 제국이 팔레스틴을 손에 넣는 것을 방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BC 200년, 안티오쿠스 3세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오론테스 왕가를 멸망시켰습니다. 앞으로 10년간, 아르메니아 고원은 안티오쿠스 3세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거대한 봉신국 체계를 수립한 안 티오쿠스 3세는 ‘대왕’이라는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의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그를 알 렉산더 대왕에 비유하여 그에게도 ‘대왕’이라는 별칭을 붙였습니다.

안티오쿠스 3세와 필리포스 5세의 계획을 로마가 알게되었습니다. 로마는 사절을 보내, 이집트 그 자체만은 침공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두 군주는 그런 요구에 흔쾌히 응했고, 로마의 사절은 그런대로 만족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같은 해인 BC 200년, 안티오쿠스 3세는 드디어 팔레스틴을 침 공했습니다. 그러나 아이톨리아 출신의 유능한 프톨레미 제국 장군, 스코파스의 눈부신 활약은 안티 오쿠스 3세를 또다시 좌절시키는 듯 했습니다. BC 199년에는 스코파스의 지휘 하에 이집트 군은 팔레스틴에서 셀레쿠스 제국군을 거의 몰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코파스의 운명은 여기서 끝이 었습니다. BC 198년, 오늘날 요르단인 파니온에서 셀레쿠스 제국군과 프톨레미 제국군의 대규모 전 투가 벌어졌습니다. 다니엘11:13-19. “13 북방 왕은 돌아가서 다시 군대를 전보다 더 많이 준비하였 다가 몇 때 곧 몇 해 후에 대군과 많은 물건을 거느리고 오리라.’

또한 그는 딸 클레오파트라를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시켰습니다. 이집트는 사실상 셀레쿠스 왕조의 보호국이 되었습니다. 다니엘 11:17,  ‘17그가 결심하고 전국의 힘을 다하여 이르렀다 가 그와 화친할 것이요 또 여자의 딸을 그에게 주어 그의 나라를 망하게 하려 할 것이나 이루지 못하리니 그에게 무익하리라.’

셋째로 로마와 대전한 마그네시아 전쟁

그러나 동시에 그런 영광과 함께 암울한 소식 역시 존재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가 로마와 대결하여 키노스케팔라이에서 대패한 것이었습니다. 필리포스 5세는 펠라에 틀어박혀 나오 려 하지 않았습니다. 로마군은 그 동안 필리포스가 애써 키워놓은 마케도니아의 촌락을 약탈하고 다 녔습니다. 필리포스는 이런 손실을 감내하면서까지 항전한 이유는 안티오쿠스 3세의 개입을 기다리 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티오쿠스 3세는 마침 팔레스틴에서 중대한 국면에 접어들어 있던 상 황이었고, 페르가몬 왕국에 군대를 보내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필리포스를 도울 수 있는 여유가 없었 습니다. 필리포스는 안티오쿠스 3세에게 실망감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로마에 항복하여 그 보호국 이 됨으로써 동맹을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필리포스는 곧 로마에 더 큰 실망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는 그리스 내의 분쟁에서 언제나 필리포스의 반대편을 들었고, 이런 불만은 계속 쌓여가 종국에는 셀레쿠스 제국과 안티오쿠스 3세는 반(反)로마의 기치 아래 다시 비밀리에 우호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와의 일전(다니엘 11:18,  ‘18그 후에 그가 그의 얼굴을 바닷가로 돌려 많이 점령할 것이 나 한 장군이 나타나 그의 정복을 그치게 하고 그 수치를 그에게로 돌릴 것이므로 19그가 드디어 그 얼굴을 돌려 자기 땅 산성들로 향할 것이나 거쳐 넘어지고 다시는 보이지 아니 하리라.’

BC 196년, 시리아 전쟁이 매듭지어졌습니다. 프톨레미 5세는 안티오쿠스 3세의 딸 클레오파트라 와 결혼하고, 시리아 경영에서 영원히 손을 뗀다는 내용의 조약을 맺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파니온 전투로 인해 역전된 역학관계는 셀레쿠스 제국이 메소포타미아를 상실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BC 198년, 시리아 전쟁과는 별도로 안티오쿠스 3세는 페르가몬 왕국을 공격했습니다. 이는 오히려 그 들이 로마에 도움을 청하여 로마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BC 197년에는 이오니 아 도시국가가 거이 모두 안티오쿠스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이들 중 몇몇이 로마에 지원을 청했고, 양국의 적대감이 본격화 되었습니다. BC 196년, 안티오쿠스 3세는 트라키아에 상륙했고, 여기서 자신의 종주권을 선언했습니다.

셀레쿠스 제국의 최대 영토는 바로 이 시점이었습니다. 그리스는 권력의 공백상태로 안티오쿠스 3세 의  트라키아 합병 선언에 아무것도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트라키아를 합병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로 마와 셀레쿠스 제국의 관계의 악화가 상당히 심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보 속에서  양국 관계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한니발 셀레쿠스 제국의 궁정에 망명 신청을 사건이었습니다. 안티오쿠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 기간 중 한니발의 활약에 관해 들어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해 최고의 예우 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것이 그 자신에 걸맞은 대우라고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한니발 은 군대를 이끌고 싶어 했으나 그가 나중에 이끈 것은 육군이 아닌 해군이었습니다.

BC 191년, 때마침 로마에 불만이 많던 아이톨리아 동맹이 사령관으로 안티오쿠스 3세를 선출하자 안티오쿠스 3세는 군대 1만명을 이끌고 그리스 본토에 상륙했습니다. 안티오쿠스 3세는 지난날 스 파르타군이 페르시아군을 이겼던 바로 그 테르모필라이에서 로마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로마군은 숫 자도 많았고 셀레쿠스 제국군은 포위당했으므로, 1만명이 거의 다 죽는 참사 끝에 안티오쿠스만 병 사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져 아시아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니발 에게는 페니키아 해군이 맡겨졌습니다. 로마의 충실한 동맹자였던 로도스는 당시 최강의 해군을 가진 국가로, 만만치 않은 상대인 페니키아 해군을 에우리메돈 해전에서 격파했습니다. 한니발의 패배를 접하자 안티오쿠 스 3세는 해군 제독 폴리크세니다스의 지휘 하에 함선 90척을 맡겨 미오네수스 해전을 이끌게 했습 니다. 그러나 비슷한 수의 로마-로도스 연합 선단과의 싸움에서 안티오쿠스 3세의 해군이 처참한 패 배로 끝났습니다. 이제 셀레쿠스 제국이 로마군의 아시아 상륙을 제지할 방도가 없어졌습니다. 양군 은 마그네시아에서 충돌했습니다. 이를 마그네시아 전투라 합니다.

안티오쿠스 3세가 직접 이끄는 셀레쿠스 제국군은 총 7만 명 규모로, 카타프락트를 포함한 기병이 1만 2천 명이었으며, 낫 달린 전차, 코끼리 54마리 등 제국 내에서 징집할 수 있는 병종은 모두 모 았습니다. 총 5만명 규모인 로마군은 스키피오 장군이 이끄는 로마-그리스의 혼합 병종으로 무장했 으나, 대부분이 로마군이었고 그리스인은 주로 펠타스토이와 호플리타이(아태네, 스파르타의 중무장 보병)로 전투에 참가한 듯 합니다. 기병은 5천 명 가량이었습니다. 결전 장소인 마그네시아는 개활지 가 아니라서 기병을 활용하기 적합지 못한 장소였습니다. 셀레쿠스 제국군은 좌익에서 스스로 혼란 에 빠졌습니다. 전차가 기병의 진군을 방해한 것입니다.

그러자 우익에서 왕 자신이 이끄는 카타프락트 부대가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흥분한 나 머지 로마군 측면을 공격하는 대신 로마군의 캠프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전장을 뜻하지 않게 이탈했고, 그와 동시에 페르가몬 왕으로 로마의 동맹 기병을 담당한 에우메네스 2세가 혼란에 빠져있던 셀레쿠 스 제국군의 좌익으로 돌격하여 그들을 괴멸시켰습니다. 중앙에서는 로마군이 코끼리를 겁먹게 하는 데 성공하여 그와 함께 팔랑크스의 측면을 찔러 그들이 마지막으로 무너졌습니다. 전투는 셀레쿠스 제국의 진지가 함락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셀레쿠스 제국군은 무너진 이후였습니다.

안티오쿠스는 결국 로마군에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BC 188년,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인들 과 아파메아에서 조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이 매우 가혹했습니다. 셀레쿠스 제국은 1만 5천 탤런트 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소아시아의 모든 영토를 포기해야 했던 것입니다. 새로운 국경선으로 타우루 스 산맥이 설정되었습니다. 제국 해군의 규모 역시 로마의 규제를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또 후일 안 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되는 자신의 삼남 안티오쿠스 4세를 로마에 인질로 보낼 수밖에 없었습 니다. 안티오쿠스 3세는 제2의 알렉산더 대왕이 되려 했던 자신의 야망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제국의 주요 수입원은 시리아 북부와 바빌로니아였기 때문에 무거운 배상금이나 소아시아 포 기는 그리 큰 손실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제국의 위신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는 점 입니다. “안티오쿠스 메가스”의 권위를 선언한 지 불과 10년만에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속주들은 곧바로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아르메니아 출신의 장군인 아르탁 시아스가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아르메니아가 제국에서 분리되어 나갔습니다. 또, 파르티아가 공격해 오기도 했습니다. 제국의 동부 속주는 또다시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안티오쿠스 3세는 다시 동방 원 정을 떠날 결심을 했습니다.

시리아와 바빌로니아는 제국에 충성하고 있으므로, 셀레우키아에서 출발하여 이란 고원의 독립적인 세력들을 토벌하고 이 지역에 다시 제국의 권위를 세우고 싶었습니다. 그는 다시 원정군을 꾸려 셀레 우키아를 출발했습니다. 처음에는 원정이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나, 안티오쿠스 3세가 여기에서 최후 를 맞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는 셀레우키아에서 가까운 자그로스 산록의 바알 신전 을 약탈하라는 명을 내렸을 때, 갑자기 암살자가 뛰쳐나와 그를 찔렀습니다. 치명상을 입은 안티오쿠 스 3세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습니다.

넷째로 안티오쿠스 3세의 사후

그가 사망하자 셀레우코스 제국은 장남 셀레쿠스 4세 필로파토르(BC 187~175)가 통치했습니다. 그 는 긴축 정책을 취하여 로마나 주변국과의 우호관계를 증진시키는 데 힘썼습니다. 셀레쿠스 4세는 후일  데메트리오스 1세가 되는 아들을 로마에 인질로 보내고, 그 대신 동생인 안티오쿠스 4세를 데 리고 왔습니다. 셀레쿠스 4세는 로마에 배상금을 모두 갚고, 제국의 재정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기 때문에, 셀레쿠스 제국은 다시 지중해와 중동의 강자로 떠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셀레쿠스 4세 는 재정장관 헬리오도루스에게 암살당하고, 그에 편승하여 왕위를 얻은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 의 통치가 이어지게 됩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다시 셀레쿠스 제국을 초강대국으로 키우는 데 성공 했으나, 그리 길지 않은 통치 끝에 그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셀레쿠스 제국은 그 자신을 파멸로 이끌 긴 내분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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