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의 의미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의 의미

창세기 39:1-23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말씀을 볼 때, 요셉이 그의 생애 중 가장 괴롭고 고독하고 어려운 시절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에 4번이나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우리 다같이 그 구절들을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처음 구절은, 창세기 39장 2절입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와서 노예 생활 이 시작되는 시점인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생활이나 그 상황에 어느 정도 적응하면 또 견딜 만합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시작되는 그 시점은 충격으로 인해 너무나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도 그렇게 귀염 받던 요셉이 노예로 팔려와서 본격적으로 노예생활이 막 시작되는 때 입니다.

두번째 구절은 3절에 있습니다. 3절은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어느 정도 노예생활에 적응된 시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노예생활에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한 결과가 다른 사람들이 깨닫게 되는 단계입니다.

세번째 구절은 21절에 있습니다. 이 21절은 요셉이 노예생활이었지만 잘 나가다가 당하게 된 너무나 억울하고 참담한 그런 상황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보디발의 총애를 받고 보디발의 집에서 형통한 삶을 살았는데 보디발의 아내로 인하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가 그 여인을 물리친 것은 주인에게 충성하기 위해서요, 인간적인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신앙의지로 그 여인을 물리쳤는데 그 결과는 인간으로서는 가장 절망상태인 감옥에 감금된 그런 참담한 상태입니다. 감옥에 있는 그런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네번째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말씀의 구절은 23절입니다. 이 구절은 요셉 이 감옥생활에 익숙하게 된 시기입니다. 요셉의 감옥생활의 형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감옥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요셉이 인정받고 감옥 안이지만 일에 몰두하고 열정과 정열을 쏟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감옥생활의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결과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창세기 39장을 보시면서 의문을 가져본 적은 없습니까?

그 의문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이런 어려움에 처하지 않게 하실 수 있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요셉이 노예로 팔려 오지 않았어야만 하고,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신다면 요셉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했다면 감옥에 갇히지 않아야 하지 않았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셔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까 우리는 어려움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얼마나 어려움이 많은 지 말할 수 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실패 좌절 고난과 고통이 없어야 하겠는데 성도들마다 요셉과 같이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의미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를 의심하게 되고 그 고난을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원망, 불평, 불 순종하고 방종하다가 하나님의 축복을 놓쳐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는 분들 중에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하시는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내게 이런 고통이 왜 왔는가? 왜 나의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가라고 신음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1). 먼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는 경우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부정적 측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우리에게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는 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병도 걸리지 않고, 사업에 실패도 당하지 않고, 남에게 사기도 당하지도 않고, 차 사고도 나지 않고, 집에 불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8:22-25말씀에 보면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타셔서 갈릴리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시는데 호수 한 가운데에 이르러 심한 광풍이 불어 파도로 인해 물이 배에 가득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이것 보십시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분명히 함께 계셨는데도 광풍이 불어 배에 물이 가득해 배가 까라 앉을 지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면 풍랑과 광풍이 불지 않아야 하지 않았습니까?

2). 긍정적 측면에서, 또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모든 축복이 당장 쏟아 지고 사업도 성공하고 항상 건강하고 형통하기만 한다는 의미도 아닌 것입니다. 물론 축복의 근원은 하나님이 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은 반드시 성공해야 하고 소원성취되야 하고 병도 낫고 모든 일이 잘 풀리기만 한다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온실 안에 있는 식물과 같이 바람도 없고 추위나 벌레도 없는 그런 환경을 조성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다루신다는 원리입니다. 반드시 다루십니다. 굳건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 각 사람들을 훈련시킵니다.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믿음의 최후 승리를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훈육하십니다. 온실 밖의 강한 바람과 추위와 더위와 가뭄과 폭풍을 이기도록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혹독하고 비참할 수 있습니다. 그런 혹독한 훈련 가운데서 우리가 상하지 않도록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고린도후서 4:8-9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함을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림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려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했습니다.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함을 당하고 핍박을 당해도 싸이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거꾸려 짐을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경우를 두고 볼 때 하나님께서 요셉을 노예상태로 이끄시는 것은 요셉을 단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노예 상태에 있는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결과는 요셉을 노예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노예상태를 잘 감당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노예상태를 잘 유지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조치를 취하시는데,

  1. 그 주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과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형통케 하심을 알게 하시고,(3)
  2. 요셉이 그 주인의 은혜를 입게 하시며,(4)
  3. 요셉을 가정총무로 삼게 하시고(4)
  4. 그 주인이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하나님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치는 것을 알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요셉 덕분에 자기가 부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인인 보디발이 요셉에 대해 이렇게 깨닫게 된다는 것은 노예로서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요셉에게 다 맡기기만 하면 자신은 더 부자가 된다고 생각해서 자신 집안의 모든 일들을 요셉에게 맡깁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요셉을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킨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축복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요셉을 노예상태에서 얼마든지 해방 시키실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요셉의 노예상태는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떤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어떤 때가 이르기까지 노예여야 하며 그 노예생활을 잘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노예생활은 장차 그 후손들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것에 대한 예표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에서 노예생활로 이끄신 것은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 끌어 드리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창세기 15:12-17말씀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일을 이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 15:12-17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예정의 말씀인데 그의 후손들이 이방나라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다가 때가 되면 나오게 되는데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라는 예언의 이행인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여러분을 향한 어떤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지 그 처한 어려운 상황에서 잘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21-23절의 내용의 말씀의 상태가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요셉이 억울한 감옥생활이 시작되고 감옥생활의 적응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정금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 감옥이라는 극한 불 용광로에서 단련을 받고 있지만 그런 용광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풀무불에 들어갔을 때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야만 그 시험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를 잘 터득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를 잘 알면 하나님의 시험에 성공적으로 잘 감당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낙제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그 사람에게 알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훈련을 시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면 끝을 알게 됨으로 시험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다시 요셉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유혹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39:10에 날마다 요구했다고 했으니 그 날마다가 10년일 수도 있습니다. 여자가 음풍으로 가득 찼는데 왜 주위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겠습니까? 그 남편이 어찌 눈치채지 못했겠습니까? 괴로운 것은 요셉입니다. 노예이기 때문에 그 집에서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사실을 주인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속으로만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드디어 운명의 날이 왔습니다. 어느날 평상시처럼 자신의 맡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그 여인이 기거하는 내실 쪽으로 들어 갔는데 그 집의 모든 종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기분이 이상하고 섬득했습니다. 이제 사는냐 죽느냐 결판이 나야 하는 단계입니다. 그는 거룩한 죽음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여 주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도 죽는 것이요, 여 주인의 요구를 들어주는 날에는 주인에게 죽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입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다가 죽겠다고 결심하고 그 여주인에게 도망쳐 나옵니다. 그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만약 그가 그 순간에 자신은 노예인데 여주인이 하자는 데로 할 수밖에 없다고 하여 그 여자의 요구에 응했다면 그는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당장은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피할 길을 열어 주실 뿐만 아니라 큰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보디발이 저녁에 집에 돌아왔을 때 온 집안에 소동이 났습니다. 그 여자가 온갖 없는 말로 요셉을 고자질합니다. 보디발이 화가 머릿끝까지 났었지만 앞뒤 경황을 곰곰히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게 된 것도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종들의 눈치를 보더라도 요셉에게 혐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아내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의 체면도 살리고 자신의 위신도 유지하고 또 무엇보다도 의리 있고 충성스런 요셉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요셉을 감옥에 넣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지 않았다면 보디발이 감옥에 가두는 정도로 문제를 덮어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입니까? 지금 그 아내는 펄펄 뛰고 있습니다. 그 놈을 당장 죽여버리라고 성화였을 것입니다. 또 보디발 자신도 일개 노예 녀석이 감히 자신의 아내를 범하려고 했다니 남자의 질투로 그만 놓아주겠습니까? 그 당시 애급 법은 노예가 주인의 아내를 범하거나 범하려 했을 때 즉결처분을 했던 것입니다. 자기 아내가 일개 노예에게 정을 쏟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남자의 자존심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예 그 노예를 아내가 보는 앞에서 죽여 없앴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죽이지 않고 그것도 왕의 신하를 가두는 감옥에 가두었겠습니까? 요셉이 왕의 고관직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감옥 안에서 죄수들을 돌볼 사람이 없어 요셉을 살려 감옥 안에서 일보게 했겠습니까? 보디발이 요셉을 옥에 가둔 것은 요셉을 죽이기 위해서 넣은 것이 아니고 요셉을 살리기 위해서 넣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을 자기 집에 더 이상 놓아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자기 아내의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을 옥에 가두므로 자기 아내로부터 요셉을 격리시켜 요셉을 보호하기 위해서요, 또 자기 아내가 요셉에게 향하는 정욕으로 인해 갖는 자신의 손상된 자존심과 위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에 요셉을 감옥에 가둔 것은 앞으로 바로왕을 만날 기회를 갖게 함이요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환히 보입니다.

첫째로 보디발이 요셉을 죽이지 않고 왕의 고관들만 가두는 감옥에 가두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요셉을 감옥에 가두긴 했지만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감옥의 제반 업무를 맡았다는 사실입니다. 보디발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요셉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했듯이 감옥 안에서 감옥의 모든 일들을 요셉이 맡게 했다는 것은 보디발의 입김이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 전옥은 보디발의 부하입니다. 만약 전옥 자신의 판단으로 요셉에게 이런 일을 맡겼다면 보디발의 아내를 겁탈하려다가 감옥에 갇힌 노예에게 이렇게 자유롭게 활동하게 했다가는 이 전옥의 목이 온전하겠습니까? 보디발의 명령에 의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감옥 안에서도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신 결과인 것입니다. 요셉이 비록 감옥에 있었지만, 감옥에 들어온 것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요, 감옥 안에서 쇠고랑차고 감방에 갇혀 있지 않고 인정을 받고 활동할 수 있었다는 것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였던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처지나 환경만을 생각하고 원망 불평했더라면 그 노예상태에서 견뎌 났겠습니까? 아마도 요셉은 감옥 생활이 즐거웠을 것입니다. 여자에게 시달리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인인 보디발에게도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옥생활이 신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에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어떤 환경에서라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감지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어떤 환경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요셉도 그 반대로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를 애굽으로 팔려와 노예생활을 하게 했습니까? 또 왜 하나님께서는 내가 말씀대로 순종하기 위해 그 여자의 욕구를 피했는데 그 결과는 감옥생활을 하게 하십니까? 왜 보디발 주인은 내가 자신의 여자를 건더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를 감옥에 가두 버렸나하고 원망할 것만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아 낼 수 있고 원망 불평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일에 묶여 버릴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경우의 사람들입니까? 사람마다 어려움은 다 있습니다. 사람마다 문제는 다 있습니다. 그 문제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여러분들에게 달렸습니다. 여러분들의 고난은 여러분들에게 유익이라고 아무리 성경이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원망만 하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 환경만 생각하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환경, 그런 고난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하는 영적 눈이 밝아야 되겠습니다.

‘발자국’(foot prints)이란 영어시의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대강 이런 내용입니다.

한 사람이 꿈에 주님과 함께 자신의 지난 인생의 날들을 회고하는 장면입니다. 해변가 모래사장을 걷고 있는 것으로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인생에 있어서 형통하고 즐겁고 잘 될 때에는 모래사장의 발자국이 두 사람의 발자국이였습니다. 한 사람의 발자국은 자신의 것이요, 다른 한 사람의 발자국은 예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인생에 있어 내리막 길, 즉 실패하고 좌절되며 괴롭고 원통하며 고독한 일을 당했을 때에 대해서 모래사장에 난 발자국을 보니 한 사람의 발자국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예수님께 불평하기를 예수님, 내가 어려울 때에, 괴로울 때에 고독할 때에 주님이 저와 함께 계셔 주셔야 하는데 내가 어려울 때마다, 그리고 그때야 말로 주님이 저와 함께 계셔야 할 때에 주님은 어디로 가시고 나 혼자 괴로운 그 길을 걷게 하셨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어려울 때의 그 한 발자국은 네 발자국이 아니라 내 발자국이었느니라. 네가 괴롭고 어려울 때 마나 내가 너를 업고 지났느니라.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네 혼자서 그 어려운 때를 넘길 수 없었느리라.”고 하셨습니다.

예례미야 애가 3:25-33절 말씀을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Views: 2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