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사도행전 4:12

 

교회를 다니면서 성경에 대한 여러 의문들이 많이 들기도 하지만 특히 구원에 대한 의문은 여러 부분에 있어 많은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우리 기독교가 타 종교인들이나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 받는 여러 이유 중 하나가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종교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그 어떤 경우에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성경적 가르침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다른 모든 종교는 사탄의 종교이며 거기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교리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로 말미암아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의문점 중 하나가 복음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죽은 자들에게 과연 구원이 있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유일한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해야하며 그리고 성경의 정확한 해답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기 전의 사람들에 대한 구원문제

복음이 있음을 듣지도 못한 자들이란 기독교가 들어가기 전에 살다가 죽었던 모든 사람들이 해당될 것이며 그리고 어린 유아의 죽음도 여기에 해당이 될 것입니다. 예수가 있음을 그리고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도 못한 채 살다가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세상이 무엇이며 이성적 판단이나 사고의 능력이 없는 어린 유아의 죽음이 단지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니냐라는 비난조의 질문이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한 무수한 질문을 받아 보았을 것입니다. 과연 이런 질문에 대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답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어떤 답을 할 것인지 무척 궁금한 일입니다. 그리고 정확한 성경의 가르침이 어떠한지 분명히 알기를 원할 것입니다.

수많은 신학자 혹은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에 대한 여러 학설들이 나오게 되고 나름대로의 신앙적 가치관이나 연구의 결과로 해답을 하긴 하여도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많이 있음 또한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다음과 같은 경우가 될 것입니다.

1.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기 전의 사람들에 대한 구원은 그들의 행위와 알고 있는 지식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기 전의 모든 사람들은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복음에 따른 기준에 근거하여 이들을 심판 할 수 없으므로 이들에 대한 심판 기준은 그들의 행위와 알고 있는 지식에 근거해서 정한다는 것입니다. 이 행위와 지식에 대한 판별은 자신들의 양심이 기준이 되며 양심에 따라 올바르게 행동을 하였다면 구원을 받을 것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들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에 보내시지는 않으신다.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지옥에 보내신다. 죄에 대한 심판을 얼마나 아느냐에 달려 있다. 즉 미국에 사는 사람들과 같이 최상의 영적 특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기준은 예수의 복음을 비롯하여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문명화되지 않은 정글에 사는 원주민들은 창조주가 계신다는 양심의 소리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양심이 자기를 고소하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양심에 따라 잘 행한 사람들은 정죄하지는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주장은 상당한 문제점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로마서2:14, 15)에, ‘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유대인들은 율법에 의해 정죄되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양심에 의해 정죄되는 데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 아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인간의 기준으로 구원의 선을 그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구원은 유일한 하나님의 선물로서 인간의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서만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전 세상이나 지금의 세상 그리고 미래의 세상도 마찬가지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벗어 날 수 없으며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명백히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인간 지식으로의 앎과 모름에 따라 구원의 방편이 전혀 달리 작용되지 않습니다. 이미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에게 있어 심판의 선고는 우리 시조의 범죄 순간부터 만들어 진 것이기 때문에 그 이후의 모든 인간은 이미 심판의 선고 하에 놓여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있음을 알지 못해서 예수를 믿지 못하고 죽은 모든 자들은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1.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절대 선이나 악에 대해 명확한 기준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과거에 있어서의 악이 오늘날의 선으로 혹은 과거에 있어서의 선이 오늘날의 악으로도 충분히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리고 인간은 그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죄를 짓지 않고 평생을 살 수 없습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죄만 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으로 짓는 죄도 엄연히 죄로 규정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그리고 영적 범죄 또한 무서운 죄가 됩니다. 인간 구원의 기준은 죄와 깊은 상관이 있으되 그 죄는 행위 죄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원죄에 해당됩니다. 설사 행위로는 그 어떠한 죄를 짓지 않아 행위 죄가 없다 하여도 원죄는 절대 인간이 해결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는 모든 원인은 원죄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원죄를 해결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구원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이 지식이나 도덕적 가치관에 의해 성인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지 못합니다.

둘째로 유아들의 죽음 문제

이성적 판단이나 사고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유아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비록 어린 아기가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었다 하여도 그 어린 아기는 지옥에 가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에 대하여 심판하시는데 아기들은 선악에 관한 관념이 없으므로 죄를 짓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하셨기 때문에 어린 아기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간다.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한 책임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문제는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전혀 죄를 알지 못하고 세상에서 얼마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은 어린 유아에 대한 구원의 문제를 논한다는 그 자체가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그 가르침을 우리 인간의 형편과 사고에 비춰 마음대로 해석하거나 가르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과 성경적 바른 가르침을 찾아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묵상하기도 하고 여러 성경의 가르침들이나 다른 앞선 성경학자들의 생각과 그리고 그들의 견해들을 읽어보고 종합해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던 진리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죽은 어린 유아들에게는 무척 죄송한 말이 되지만 그들도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예외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지 예외가 되는 경우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믿음의 가정들에만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믿음의 가정에 있어 어린 유아들은 이미 부모들의 믿음의 영향 하에 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며 하나님의 택한 가정이기 때문에 당연히 구원받음이 마땅할 것입니다.

누가복음1:41, 44에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할 때에 태중에 있는 세례 요한이 기쁨으로 뛰놀았다고 했습니다.’보라 네 문안 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했습니다. 그리고 42절에 엘리사벳이 성령에 충만하여 마리아에게 축복하기를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했습니다. 시편 127편3절에서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했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부모의 태중의 자녀라도 성령충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상급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가정은 그 예외 대상에서 제외되며 어린 유아라 할 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미 앞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어린 유아라 할지라도 그의 원죄는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허락하신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지식적 앎과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 유아가 죄를 알든 모르든 아니면 죄를 지었던 짓지 않았던 그 지식과 죄의 행위에 의해 구원의 성격이 달라질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분명한 확신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규정은 그 어떤 예외 규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의 통치기간 중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사울에게 원수 나라인 아말렉 족속을 멸하라는 명령을 전달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명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삼상15:3)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통과하는 도중 헤스본 왕 시혼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기들의 땅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자 하나님께서 시혼과 그 땅을 이스라엘민족에게 붙이시는 기사를 보게 됩니다.

이때 이스라엘 민족이 헤스본 왕 시혼을 죽이고 그 땅을 점령하게 되는데 기록되어진 말씀을 보면 “그 때에 우리가 그 모든 성읍을 취하고 그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신2:34)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은 아모리 족속입니다. 아모리 족속은 창세기 15:16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400여년 전에 이미 진멸하기로 작정하신 아낙자손입니다. 아낙자손은 노아 홍수 후의 네피림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아닙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어떤 특정 인물 다시 말하면 죄를 전혀 알지도 못하고 짓지도 아니한 어린 유아라 하여 살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 족속을 멸하실 때라든지 아니면 여타의 다른 여러 원수나라를 멸하라 명하셨을 때 어린 유아 심지어 젖먹이는 갓난아기라 하여 예외를 두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이 생각하기에 따라서 대단히 잔악한 하나님으로 오해하기 쉬우나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감정이나 사고 혹은 그 어떤 인간적 가치 판단에 따른 기준에 의해 자신의 일을 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의 심판에 대한 기준은 분명한 것이며 그 어떤 인간의 행위나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갓난 어린 아기라도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약속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거나 혹 그 어떤 인간적 판단에 근거한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진리임이 분명합니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 할 수 있습니다. 구약 때의 사건이 신약의 가르침과 다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르다는 본질적 의미가 원론적 다름이 아니라 하나의 완성적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욱 옳을 것입니다. 구약 때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 명령이 신약에 와서 다르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맥은 동일하게 적용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는 더욱더 그러합니다. 구약이나 신약 모두 동일하게 구원은 유일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으며 이 구원의 얻고 잃음은 인간의 그 어떠한 것에 전혀 좌우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 유아라 해도 전혀 예외의 대상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음을 알지도 듣지도 못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접근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음을 알지도 듣지도 못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는가에 대한 이유를 네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사도행전 4:12과 요한복음 14:6 에서 가르치는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은 어떤 특정한 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교훈이며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은혜 받을 때와 구원받을 때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지 않아 예수를 믿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성을 제한시키지 못합니다. 이미 우리 인류는 사망선고 받은 상태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누구를 먼저 구원하고 하지 않는가에 대한 그 어떠한 항변도 할 수 없습니다.

  1.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면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됩니다.

우리의 시조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인의 후손을 통한 메시야의 약속이며 이 메시야를 통해 인류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우리의 시조와 하셨습니다. 이 때 당시 이 지구 위에는 별다른 인간이 살지 아니 했으며 아담과 하와만이 살았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과 약속을 세워 그 약속대로 메시야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의 약속은 전 인류역사상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까지 계속 유효한 것입니다. 그 외 다른 어떠한 불순물도 첨가되어 질 순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시조와의 약속이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지고 민족들이 많아졌다 하여 전혀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많아지고 민족이 흩어 졌다 하더라도 만약 하나님의 이 약속에 대한 분명한 교훈이나 가르침이 조상 때부터 그들의 후손들에게 계속적으로 있어 왔다면 그리고 그 가르침을 따라 인류가 살아 왔었다면 누구는 복음이 있음을 알고 또 누구는 알지 못하고에 대한 문제는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가르침보다는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에 따라 살기를 원했으며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충실한 역할을 담당해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믿기보다는 사탄의 말 듣는 것을 더 합당하게 여기며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이용하여 사탄이 만들어 낸 것이 종교입니다. 사탄은 바벨탑사건 이후 신에 대한 본능적 인간의 마음을 이용하여 종교라는 자리를 빌려 하나님은 밀어 내고 그 자리에 사탄이 앉아 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거역한 대가로 나타난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지고 민족이 늘어난다 해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그 약속을 믿었더라면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용서받지 못할 범죄로 말미암아 구원을 상실한 인류를 위해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한 사람 아브라함을 택하여 민족을 이루시고 이 민족을 통해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잃어버린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알게 되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아말렉과 같은 족속이기 때문에 완전히 진멸 되어야 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그 은혜로 이렇게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시간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사람들은 어제가 있었고 오늘이 있으며 또 내일이 있을 것입니다. 과거가 있으면 현재가 있고 현재가 있으면 또 미래도 있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압니다. 이런 이유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다릅니다. 그 분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며 언제나 현재로서 영원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란 없습니다. 그 분에게 있어 시간은 항상 현재로 존재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이 세상의 시간이나 세월이 수 천년 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단 하루의 순간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수 천년의 세월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 편에서는 한 순간이 입니다. 이러한 순간의 일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우리에게는 긴 역사를 가진 사건임에 분명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복음이 있음을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사람들에 있어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지금 현재의 일로 해당되는 성질의 것이 되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조와 약속하신 그 약속의 진행이 계속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 약속을 들을 수 있었고 믿고 죽은 자는 구원을 받는 것이 되며 지금 이 약속을 믿는 자도 구원을 받게 될 것이며 그렇지 못한 자들은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1. 인간 세상에는 선악의 기준이 없습니다.

복음이 있음을 알지도 듣지도 못한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데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볼 때 선하고 착한 사람도 구원을 받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이야 당연히 구원을 받아서는 안되며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 상식입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똑 같이 형벌을 받게 된다면 참으로 불공평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 세상에 있어 절대적 선악에 대한 기준은 없습니다. 선악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항상 달라 질 수 있는 가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상인이 비정상인의 세계에 가면 비정상인이 정상인이 되고 정상인이 비정상인이 됩니다. 도둑놈의 세계에서는 도둑질을 잘하는 것이 선이 되며 강도의 세계에서는 강도 짖을 잘해야 선한 사람이 됩니다. 공산주의 세계에서는 공산주의적 사상에 잘 무장되어 있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식인종 사회에서는 사람 잡아 먹는 것이 선이었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동성연애는 죄라고 규정했는데 일부 교회와 목사들과 오늘날의 사회는 그것을 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선이 내일의 악으로 오늘의 악이 내일의 선으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어 유일한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기준만이 정확한 준거가 됩니다. 우리 편에서의 선이 하나님 편에서의 악이 될 수 있으며 인간 편에서의 악이 하나님 편에서의 선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 성도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들은 믿기를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믿었습니다. 중세시대의 카톨릭이 프로테스탄트를 박멸하려고 했던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믿었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상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 분은 인간의 이성이나 상식으로 판단 가능한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고 시도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절대 능력을 폄하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위치로 끌어내리려는 시도가 됩니다. 선악의 기준이 없는 이 세상에서의 인간에 대한 구원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만이 세울 수 있습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의 선악에 대한 평가는 하나님이 하시며 그리고 기록된 그 분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너무 억지가 아니냐 라는 항의가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스스로가 선하다거나 자신은 온전한 사람이라 자신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현재 나의 모습을 놓고 비추어 본다면 과연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를 물어 보았을 때 그렇다라는 대답보다는 아니다라는 대답이 나올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달라 질 것이 없이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죄의 유혹에 미혹된 인간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이 죄로부터 해방 될 수 없습니다. 저지른 죄 혹은 저질러 지는 죄 우리 심령 깊숙한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죄의 유혹을 없애기 위해 수많은 도를 닦고 또 닦아도 그리고 아무리 선한 행위를 하여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1993년 11월 10일에 돌아가신 고 성철 스님을 인간으로서 무척 존경합니다. 물론 종교를 떠나 모든 이들이 존경하고 그 분의 삶에 대해 깊은 경외심을 보였을 것입니다. 수 십년 간 은거해 살면서 솔잎으로 식사를 하시며 모든 세속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오직 수련에만 정념하였습니다. 이 죄악 된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서 영혼의 참 자유를 얻기 위한 무수한 노력 끝에 도의 경지에 이른 스님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그 분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그 분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그렇게 슬프고 안타까울 수 없을 것입니다. 죄에 대한 처절한 싸움에서 그렇게 힘들어했던 고 성철스님의 마음을 느끼면서 그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그 어떠한 노력과 수행에도 결국 죄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없음을 볼 때 그 분보다 인간적으로 훨씬 못한 나를 택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셔 구원의 선물을 주심에 대해 너무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성철 스님의 열반송을 보면서 그분의 마음을 이해하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열반송이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노래입니다.

生平欺狂男女群(생평기광남여군)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

活焰阿鼻恨萬端(활염아비한만단)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

“살아 평생 남녀 무리를 미친 듯이 속여서 하늘에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그 많은 죄업으로 인해 활활 유황불이 이글거리는 아비규환의 무간 지옥에 떨어 질 것을 생각하니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 도다. 한 수레바퀴가 붉은 한을 내 뱉으면서 푸른 산에 걸렸구나”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하면서 남긴 그의 말입니다. 8년 간이나 장자불와(長坐不臥)와 20년 간의 불출수행(不出修行)을 한 고 성철스님의 아픔이 그대로 느껴지는 글입니다. 수미산은 중국의 전설적인 산으로 해면을 기준으로 하여 위로 8억 류순 아래로 8억 류순 이라 합니다. 한 류순은 6㎞ 라 하니 그 높이는 가히 상상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가 수미산을 지나친다하니 이 얼마나 처절한 소리입니까? 이런 면에서 성철스님은 참으로 진실합니다.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스님 중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목사님까지 되신 분도 있는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과연 우리는 고 성철 스님보다 더 나은 인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깨닫고 남긴 마지막 그의 열반송을 통해 인간의 그 어떠한 수련으로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에 대한 단적인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결론

인간의 죄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가 없으면 그 어떠한 인간의 선행이나 수련으로도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구원에 대해 우리가 논할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구원도 우리가 논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 하는 가에만 귀를 기울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저 사람은 악한 자이기에 구원받지 못한다고 규정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언젠가 회개하고 예수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수가 무궁무한 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이런 문제에 대한 어떤 복안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구원과 지옥에 대한 두 가지 암시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베드로전서3:18-20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했습니다. 19절에 주님이 영으로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했는데 그 영들은 노아시대에 방주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은 자들의 영이라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6에,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하셨는데 노아 홍수 당시에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 중에 노아가 방주 짓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 방주에 들어가지 못해 홍수에 죽은 자들에게 한번 기회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주님의 영이 지옥에 가셔서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이 들어가기 전에 살고 죽었던 자들과 복음이 전파되던 때에 미쳐 복음이 그 지역에 들어가지 못해 복음을 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문제가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계시록 20:11-15은 백보좌 심판의 광경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행위의 책에 따라 사람들을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심판하신다는 것은 죄의 경중을 따지기 위해서 입니다. 세상에서도 죄지은 사람이 재판을 받는 것은 그들이 지은 죄에 따라 죄벌을 주기 위해서 입니다. 어떤 자는 1개월 징역살고, 어떤 자는 1년, 혹은 5년, 십년, 종신형을 받습니다. 그렇듯이 백보좌 심판관이 사람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지옥에도 죄의 경중에 따라 지옥 고통의 경중이 있다는 암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불못에 들어가면 영원한 형벌을 당하는데 그 형벌에도 죄에 따른 경중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만약 그런 경중이 없다면 죄판할 것 없이 모두 불못에 넣으실 것입니다.

구원은 유일하시며 참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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